“성벽이요?”
베로니카는 경계하며 되물었다. 제 방 앞에 선 병사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님이 부르십니다.”
“무슨 용건으로요?”
“가면 알게 되실 겁니다.”
처음에는 저지른 일이 곧바로 들통난 줄 알았다. 하지만 부단장이라, 의외의 인물이다. 어쩌면 지금 잡으러 올 사람을 허탕 치게 할 수 있을지도.
“…안내해 주세요.”
베로니카는 지금쯤 이상을 감지했을 교황을 떠올리며 승낙을 내놓았다. 나이 든 사제에게 교황을 들먹이며 비밀 엄수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도 교황에게 직접 심문을 받으면 당연히 서편의 내용과 시킨 사람을 순순히 말할 것이다.
다행히도 필립의 용무는 급한 종류인 것 같았다. 병사는 빠르게 움직여 교황청 앞에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부단장의 병사와 견습 기사 하나가 베로니카와 동승했다. 다른 호위 및 감시는 말을 타고 뒤편에 따라붙었다.
교황이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베로니카를 선전용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사실이니까.
가볍게 덜컹거리는 감각이 꼭 오르내리는 심장의 상태와 흡사했다. 베로니카는 잔뜩 긴장한 채 차창 밖만 응시했다.
“벌써 무기가 모자라나 봐요.”
마침 대로의 옆으로 군대의 행렬이 지나가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말마따나 갑옷도 무기도 제각기 다른 병사들은 통일성을 찾기 힘든 모습이었다.
“시민군이라서 그렇습니다. 18세에서 65세 사이의 남성은 모두 징집되어 오늘부터 성벽과 방벽을 지키는 일에 투입됩니다. 바하무트의 눈도 없어졌으니 동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필립의 부하가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베로니카는 시민군이라는 말에 기나긴 행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8세에서 65세 사이의 모든 남자라니. 카르트의 인구가 백만이다. 산사태로 죽은 이들을 빼고, 여자와 아이와 노인을 제외해도 그 수는 꽤 될 테다.
“그럼 기사단은 당분간 과로에서 해방될 수 있겠네요.”
딱히 대꾸를 바라지 않는 혼잣말은 마차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머릿속에 리온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솔직하게 그가 신경 쓰였다.
나가기 전의 그는 피곤해 보였으니까.
“버리지 마.”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던 감각이 떠올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도 오스카를 질투했다. 돌아온 이후로 진심인가 헷갈릴 정도로 다정하게 굴었다. 진심일 리 없다. 아니, 진심이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진심은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상처만 될 뿐이다.
그래서 억지로 밀어내려 노력했다. 속지 않는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겨우 정리했는데 괜히 삶을 욕심 내고 싶지 않다.
투득, 그때 갑자기 하얗게 질린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왜 우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 베로니카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몸이 추위에 노출된 것처럼 자꾸 부들부들 떨렸다. 동승한 기사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밖에… 개들이, 주인도 없이 돌아다녀서.”
베로니카는 멍하니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다시 창밖을 보며 띄엄띄엄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겼다. 실제로 거리에는 비쩍 마른 큰 개들이 꼬리를 만 채 병사들 사이를 의미 없이 서성거렸다.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슬픈 사고를 당하고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서럽게.
“도착했습니다.”
마침 마차가 멈춰서 어색한 분위기가 끝날 기미를 보였다. 데리러 온 병사가 먼저 내리고 견습 기사가 베로니카의 손을 잡아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이쪽입니다.”
눈가를 문질러 닦고 혼잡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발걸음마다 불안이 점점 커졌다. 왜? 왜지?
병사는 지저분한 막사 앞에서 멈추더니 천막을 들어서 고갯짓했다. 들어가란 뜻이었다.
“혼자서요?”
“예.”
베로니카는 가만히 서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냈다. 그리고….
우뚝, 걸음이 멈췄다. 심장이 덜컥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툭, 투득,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은 막사 안에서 핏방울이 허공을 가르고 바닥에 떨어졌다. 툭, 툭. 베로니카의 윤기 잃은 눈동자가 시트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핏물을 타고 거꾸로 올라갔다. 새빨갛게 젖은 침대. 그 위에 시체처럼 누운 미동 없는 남자.
“아니… 아니야.”
현실이 아니다. 꿈이다. 환상이다. 거짓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뒷걸음치던 베로니카는 휙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떼지도 않아 천막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필립에게 가로막혔다.
“아, 제때 와서 다행입니다.”
죽음이라도 만난 듯 창백하게 질린 베로니카를 필립이 차가운 태도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베로니카, 그게 당신 이름이 맞습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대다수의 경우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 법이다. 필립도 같은 맥락으로 읽었는지 더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많이 진정됐습니다만 아까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는 당신 이름을 거듭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 주십시오. 베르크 경 덕분에 당장 참여할 전투는 없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요.”
가까스로 내뱉은 말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린 필립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아포칼립시스의 힘을 너무 많이 빌렸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
“내키지 않더라도 부탁합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저번에도, 부상도 낫지 않은 베르크 경의 출전은 모두 당신 대신이었습니다. 원래 성하께서 전장에 내보내라 명한 신검은 당신입니다.”
머리가 온통 어지럽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베로니카는 그저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이 정도로 죽을 리가 없어요.”
말도 안 된다. 그는 리온 베르크다. 베이른의 잿더미에서 그녀를 구원한 신의 기사.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바하무트를 도륙한 붉은 기사. 그런 그가 다름 아닌 신검에 먹혀 죽는다는 게 말이 되나.
“물론 그가 내상을 재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 해도 그런 기적을 세 번이나 일으킬 만큼 성력이 무한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세 번? 베로니카는 미간을 찡그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명을 요구한다는 걸 알았는지 돌아서려던 필립이 하나하나 과거를 언급했다.
“토벌전의 불 속에서 당신을 구한 날, 당신이 죽은 줄 알았던 날의 폭주, 그리고 오늘까지. 돌이켜 보면 베르크 경의 폭주는 하나같이 당신과 연관된 셈입니다.”
첫 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져 들렸다. 툭, 툭, 피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난데없이 창문에 부딪혀 추락한 새가 떠올랐다. 그 새는 살았을까?
***
새의 추락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날개를 가졌기 때문이다.
떨어져선 안 되는 존재가 비참하게 바닥을 구를 때,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무참한 절망을 느낀다.
눈을 떠, 제발 다시 하늘로 돌아가.
베로니카가 아는 리온은 정말이지 병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당장이라도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고, 어느 날엔가 했던 말처럼 놀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두는 단지 베로니카의 상상으로,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기다란 손가락을 타고 올라갔다.
손등과 팔에 남은 화상자국. 끄트머리가 그슬린 손수건.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토록 모든 게 분명했는데. 의문은 해결되는 동시에 가장 강렬한 의심을 영혼 깊숙이까지 떨어뜨렸다.
“왜…?”
왜 그는 그녀를 위해 그렇게까지 했을까.
베로니카는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흉곽을 바라보다가 눈길을 조금 더 위쪽으로 올려보냈다. 선이 또렷한 눈매는 검은 천에 가려진 채였다. 멋대로 벌어진 동공이 작은 빛도 고통스러워해서 가린 거라고 했다. 우뚝 솟은 콧대 아래로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거친 숨결이 흩어졌다.
공기 중엔 짙은 피비린내가 났다. 그는 마침내 죽을지도 모른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이제 싫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 그런데도….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거듭 삼키며 꾹꾹 억눌렀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뭘 그렇게 힘들게 참아? 그냥 흘려보내.”
베로니카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눈물은 자유를 되찾았다는 걸. 사슬이 풀린 건 이제는 머나먼 과거가 된 겨울의 일이다. 참는 법 같은 건 잊어버렸다. 그가 그녀의 족쇄를 풀어 주었다. 깨달은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후드득 시트에 떨어졌다. 쏟아졌다. 막아도 막을 수 없었다.
젖은 얼굴을 닦기 위해 천을 찾으려던 때였다.
탁상에 놓인 검대 옆에서 베로니카는 낯익은 양피지를 발견했다. 그의 갑옷 안에 있던 소지품 중 하나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구겨진 종이를 펼쳐 익숙한 필체를 읽었다.
친애하지 않는 리온 베르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