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멎지 않는다.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미친 듯이 날뛰다가 결국 이런 비참한 결말이다. 꼴 한번 볼 만하다는 생각에 리온은 핏물을 씹어 뱉으며 실실 웃다가 벽을 기어 올라온 바하무트의 머리를 누운 채 횡으로 세차게 베어 냈다. 벽을 하나의 사다리처럼 기어오르던 행렬이 길게 떨어져 나갔다.
잠깐 의식을 잃었던 사이 새로운 바하무트 무리가 성벽 위까지 도달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검 끝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난 리온은 발밑으로 질퍽한 피를 떨어뜨리며 병력을 청하기 위해 봉화에 다가섰다. 한계였다. 부싯돌은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거푸 미끄러졌다. 피는 불꽃을 닮았다. 다 태워 버리고 망가뜨린다.
그가 그랬듯이.
“…빌어먹을.”
화륵, 마침내 불이 붙은 순간 콱 바하무트의 커다란 손이 발목을 잡았다. 리온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것의 머리에 검을 꽂았다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뒤로 물렸다. 기침이 터졌고 등이 고통으로 경련했다.
“큭.”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하지만 쉬어서는 안 된다. 그의 자리를 대체할 병력이 올 때까지 버티지 않으면 거리가 저번처럼 쑥대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자가 위험을 무릅쓰도록 둘 생각은 없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야 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흐릿한 시야를 슥 닦아 내자 거기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리온은 서늘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가기 전에 한 번만 더 안아 보는 건데.”
언젠가 아침이 올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끝나 가는 밤의 자락을 움켜쥐고 싶었다. 노을 지는 꿈속에 머무를 수 있다면 영영 해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광야에서 단둘이 누워 있던 어느 밤이 떠오른다. 모닥불 옆에서 두런거리던 시간, 올려다보던 생기 넘치는 얼굴. 이제야 차라리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못되게 굴길 잘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길 잘했다. 그녀가 덜 슬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정 많은 여자는 분명 그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뻤다.
그녀는 그의 신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리온 베르크는 신의 기사였다.
피가 묻은 채 경련하던 손 위로 툭, 툭 뜨거운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리온의 눈이 커졌다가 비틀린 웃음을 담고 휘어졌다.
벽 위로 턱턱 손 수십 개가 갈고리처럼 걸쳐진 건 그때였다. 그는 마지막을 예감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둥그런 얼굴들이 벽 위로 하나둘씩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온은 늘어뜨렸던 검을 천천히 고쳐 쥐었다.
***
팍, 새 한 마리가 투명한 창문에 세차게 부딪혔다. 베로니카는 놀라서 말을 멈추고 주르륵 추락하는 비둘기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강하게 부딪혔으니 죽었겠지.
불현듯 아침에 깨진 거울이 떠올랐다. 명백한 흉조가 거듭 눈에 들어오자 정체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발을 타고 올랐다.
“그래서 내게 확인하고 싶은 건 ‘광야가 성도인가’하는 문제겠구나.”
교황이 운을 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의 일을 다 털어놓은 것도 잊은 채 새가 떨어져 죽었는지 확인하러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부딪힌 자국이 남은 창문을 멀거니 보던 베로니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네. 황실의 기록 한 줄 외에 뒷받침할 자료는 더 찾지 못했지만, 성하께서는 알고 계시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그래, 내가 그 답을 내주면 교회를 위해 봉사할 테냐?”
“네.”
베로니카는 결연히 대답했다. 서고를 밤새 뒤지고 그 고생을 하면서도 얻지 못했던 해답이 눈앞에 있었다. 교황은 애가 탈 정도로 침묵을 지키다 그녀의 긴장이 극도에 달했을 때 눈썹을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아이야, 정말 미안하구나. 네 기대는 잘 알겠다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진정한 성도가 다른 곳에 있다니, 평생 들은 말 중 가장 터무니없는 이야기구나.”
파스슥 거품처럼 부풀었던 기대가 사그라드는 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는 순식간에 축 처지는 어깨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뭐야, 아니라고? 그럼 정말 예언이 어긋난 거야? 역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가정이었던 거야?
실망감에 잠겨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잠깐만,
두근, 두근.
세상의 소리가 아득하게 사라지고 교황이 넷째 손가락에 낀 반지만 보였다. 베로니카의 눈이 점점 커졌다. 황실 서고에서 읽었던 기록 중 반지와 관련된 설명 하나가 뇌리를 강타했다.
신 앞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교황에게는 ‘어부의 반지’가 주어지노니 그것에는 물고기를 낚는 사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반지의 주인이 거짓을 말할 때 사도의 모습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하인리히 2세는 교황을 알현하러 올 때마다 그의 반지만을 바라봤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