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을 싫어한다. 그의 잔혹성을 꺼린다. 하지만 그게 눈앞의 문제보다 중하냐 묻는다면, 그 정도는 아니다.
안내된 방은 작고 소탈했다. 이런 방을 집무실이라고 한다던가. 솔직히 집무실이 정확히 어떤 업무를 보는 장소인지도 잘 모른다. 베로니카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로니카는 긴장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인사했다. 작은 방에는 꽉 차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병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자면 성하께 위해를 가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고자 청한 것입니다.”
베로니카는 주변에서 주워들은 기사의 말투를 어색하게 흉내 냈다. 그래야 하는 분위기였고, 그들의 경계는 피부로 느껴질 만큼 뚜렷했다.
“그러니까… 절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흐린 창가를 등지고 앉은 교황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역광인데다 의자를 반쯤 돌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대로 죽었나 싶을 만큼 미동 없던 교황은 한참 만에 인자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아이야. 내가 너를 두려워해 기사들을 세웠다고 생각하느냐?”
“…아닌가요?”
뜻밖의 질문에 베로니카는 엉겁결에 제 말투로 되묻고 말았다. 처음과의 간극이 우스웠는지 교황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나를 보호하겠다 자발적으로 나선 신의 기사들이다. 내 안위를 근심하는 마음에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명령에 따른 복종이 되지는 못한다.”
의외였다. 베로니카는 병사들을 휘둘러보았다. 표정으로 미루어 결코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교황이라는 직위도, 교황청도, 종교란 결국 모두 그런 것이지. 근심에 찬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게야.”
교황은 느긋한 어조로 설명을 더했다.
종교가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지금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카르트의 교황이었다. 베로니카는 놀랍고도 흥미로운 마음으로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어제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네게 악의는 없었단다, 아이야. 이것만은 진심이니 알아 두려무나, 너는 알려지는 것만으로 재앙을 싹틔울 불씨였다. 동화자로 살아남은 순간부터, 카르트에 들어와 불길한 예언을 던진 순간까지 죽 그랬지.”
거기까지 말한 교황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탁, 저벅, 탁, 저벅, 그가 베로니카를 가까이서 보려는 듯 다가왔다. 이전에 목이 졸렸던 기억이 떠올라 뒤로 물러서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어제의 일로 이단 심문관 셋과 판관 다섯이 죽었다. 세간에는 성녀를 죽이려고 해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돈다더구나. 그럴 만도 하지. 그 수많은 인파 중 재판과 관련된 사람만 사망했으니 말이다.”
몰랐던 얘기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시민들의 피해는 부상에 그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그래서 제 알현 요청도 받아들이신 거군요.”
“그래, 그랬단다. 영리한 아이야.”
“제게 뭘 바라세요?”
베로니카는 경계를 숨기지 않고 물었다. 교황은 골똘히 생각하듯 침묵하다가 운을 뗐다.
“시민들에겐 위로가 필요하단다.”
처음에는 그게 재판에 대한 변명인 줄 알았다. 민심의 안정을 위해 날치기 재판을 거행했노라고. 용서하라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알쏭달쏭하기 그지없었다.
“최후의 날에는 믿음보다 희망이 필요한 법이지. 예컨대 성도를 지킬 성녀 같은 것 말이다.”
교황은 그야말로 돌려 말하기의 귀재였다.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멍하니 그의 말을 되새기던 베로니카는 암시 하나를 발견하고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을 느꼈다.
성녀, 소문, 위로, 설마.
“설마 제가 진짜 성녀가 되어 주기 원하시는 건 아니겠죠.”
부정을 원하고 내뱉은 말에 교황이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눈이 좁아지자 정말로 검은 동공만 보였다. 그게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가 베로니카는 이내 죄책감을 느꼈다. 제게 무슨 짓을 했든 간에 교황은 그녀 안에서 평생의 권위를 지닌 교회의 아버지였다.
“말도 안 돼요.”
베로니카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니, 성하께서는 당장 어제 저를 죽이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서 교회의 편이 되라고요?”
“말했지 않니, 어제도 네게 악감정은 없었단다. 시민들의 동요와 불안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을 뿐이지, 하나 알다시피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재판으로 동요를 잠재우려다 진실로 눈에 보이는 이적이 나타났다. 난세의 희망이 필요했던 교황에겐 도리어 반가운 사건이었다. 정보를 통제하고 여론을 만드는데 능숙한 교황청다웠다. 예언의 시대가 끝나자 이단 심문의 시대를 연 교황다운 발상이었다. 실제로 교회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구간 지기의 부인도 하루아침에 신이 보낸 천사로 탈바꿈할 수 있으리라.
비현실적이고도 현실적인 제안에 베로니카는 머리끝부터 떨어지는 오한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을 속아 왔을까. 시민들을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됐을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승낙했을 때 얻을 것, 거절했을 때 잃게 될 것들….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제가 왜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으시네요.”
베로니카는 한참 만에 생각의 끝에 도달했다. 교황은 이쪽에서 찾아왔다는 사실도 잊었던 듯 눈썹을 추어올렸다. 나이 들어 깜빡 잊었던 건지 아니면 애초에 감히 그녀가 뭘 부탁하리라 생각지 않았던 건지 궁금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성하, 부디 지금 제가 여쭙는 질문을 신성 모독이라 여기지 말아 주세요.”
생각해 보면 교황이야말로 진정한 성도가 어디인지 알만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베로니카는 지금이야말로 기록에도 적히지 못한 역사를 들을 기회라는 것을 눈치챘다.
광야가 성도인지 알아내야 한다. 이주를 제안해야 한다.
어쩌면 형편에도 안 맞는 연극에 동참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로써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도박이었다.
***
서걱, 몸뚱이가 잘려 나갈 때마다 그 소리가 귓가에 크게 메아리쳤다. 안개처럼 흩뿌려지는 핏방울을 맞으며 리온은 생각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서 죽을 순 없다고.
그로서는 처음 해 보는 생각이었다. 스물아홉 해가 지나는 동안 목숨이 아까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러서지 않는 희생은 기사의 덕목 중 하나였다. 검을 휘두르며 머뭇거린 기억은 아무리 뒤져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신검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비참하게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서 하나뿐인 온기를 안고 싶다고. 미움받아도 좋으니 하루만이라도 더, 주어진 시간을 늘리고 싶다고.
벽을 오르는 개미의 행렬처럼 바하무트는 쉬지도 않고 들이닥쳤다. 똑같이 생긴 동족을 밟고, 뜨거운 기름과 불화살과 대포에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은 채.
바하무트의 무서운 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검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낙뢰 같은 눈부신 검기가 살해를 거듭했다. 수 시간 째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시간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식의 학살에서 보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인간이든 아니든 붉은 피는 어느 정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었을 때, 뎅, 뎅, 뒷덜미를 잡아채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돌아본 순간, 거짓말처럼 전장의 모든 소리와 풍경이 사라졌다.
리온은 어느새 카르트의 뒷골목에 서 있었다. 아직 무너지기 전, 성도가 아직 아름답고 평화로웠을 때의 기억이다. 방금까지 싸우고 있던 걸 떠올리고 손을 내려다보자 신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뎅, 뎅, 뎅, 다시 한번 교회의 종탑이 운다. 리온은 절망을 일으키는 분위기 속에서 금세 언제의 기억인지 깨닫는다. 이건 그가 모친을 만나기 위해 수도원을 몰래 빠져나온 날의 정경이다. 땅거미 지는 거리, 카르트의 가난한 외곽.
고개를 천천히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 집이 보인다. 경첩이 녹슬고 고리가 뜯겨 나간 낡고 허름한 집.
리온은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듯 걸어가 문을 연다. 삐거덕거리며 어둠에 고운 빛이 파고든다. 처음으로 보이는 건 앙상한 다리다. 마르고 힘없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천장에 목을 맨….
덥석,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손을 붙잡았다. 리온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럼 기다리라는 말은 왜 했어요? 다음엔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광야에서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길 바란다고 했으면서. 그래서 나는….”
베로니카다. 이 기억 속에 있을 리 없는 여자가 따지듯이 내뱉었다. 뚫어지게 그녀를 보던 리온은 저도 모르게 언젠가의 대답을 뇌까렸다.
“그래야 다루기 편할 테니까. 기껏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하루쯤 더 다정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여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리온은 폐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좋아해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좋아해요.”
그녀가 한 번 더 말했다. 필요하다면 백 번도 더 말할 것처럼,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서 계속 기다렸어요.”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한테는 포기가 쉽지 않아요.”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울지 마, 제발 나 때문에 그 아까운 눈물을 흘리지 마.
손을 뻗었다.
닿아라.
“베로니카.”
닿아라. 제발.
“난….”
쾅! 콰광! 순간 발밑이 무너지며 시야가 새카맣게 뒤덮였다. 대포 소리가 귀를 터뜨릴 듯 몰아붙였다. 리온은 눈을 크게 떴다. 성벽의 바닥이 눈앞에 보였고 아포칼립시스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의 바로 옆에 떨어져 있었다. 큭, 그가 등을 구부리며 기침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왔다. 귀에서도, 입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