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82)화 (82/128)

그녀는 그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얼마나 후회하든 그건 그만의 감정이라고. 강요는 이기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칼날처럼 꽂힌 말의 의미 정도는 똑바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온은 제가 그녀의 뜻을 존중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난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낼 때까지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여자를 보기 전까지는. 그래, 모든 게 뚜렷했었다.

부우우, 바깥에서 나팔이 울자 다시금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방벽에서 귀환해 쓰러진 베로니카를 보았을 때, 리온은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멍청하게도 그 지경까지 떠밀려서야 깨달았다.

놓을 수 없다. 놓아줄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주변만 맴돌아도 좋으니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좋은 인간인 척 애써도 경멸스러운 욕심은 감춰지지 않았다.

“완전히 동화된 게 차라리 다행인가.”

리온은 잠든 베로니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다칠 때마다 내가 필요하겠지, 이제.”

많이 편해졌는지 그녀는 녹진하게 풀어진 얼굴이었다. 수녀들이 애써 씻긴 게 무색하게 의식을 찾자마자 땀을 잔뜩 흘렸다. 물론 가치는 있었다. 리온의 성력이 그녀의 신체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가지 마….”

안색을 확인하느라 잠깐 몸을 떼어 낸 순간이었다. 베로니카가 잠결에 칭얼거리며 바짝 파고들었다. 눈가는 발갛게 흐트러졌고 입술은 가만히 벌어졌다. 색색거리며 가냘픈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안 가. 아무 데도.”

대답해 준 리온은 하얗다 못해 창백한 볼을 느리게 매만졌다. 이 얼굴을 다른 인간이 볼 뻔했단 사실만으로 신경이 서늘하게 곤두섰다. 그녀는 그를 어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시선이 저에게서 비껴갈 때면 어릴 때나 품었던 소유욕이 고개를 쳐들곤 했다. 가지고 싶다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식의 어린애 같은 질투가 치밀었다.

하얀 목선에 고개를 묻자 은은한 체취에 하반신이 지치지도 않고 일어섰다.

인간의 살결이 이렇게 여리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이렇게 부서질 듯 작은 여자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현실이 더 의심스러웠다.

꿈처럼 사라질 것 같은 여자를 바싹 끌어안고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골반 위 움푹 팬 부근까지 손이 내려가자 허리가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굴곡에 리온은 짧은 숨을 뱉었다.

쾅, 쾅, 바깥에서 대포가 울부짖는 소리가 현실을 상기시켰다. 오늘 밤은 황실 군대가 성벽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재정비를 마친 기사단도 다시 전장에 나가야만 한다.

지겹게 죽였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하무트는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제 가치를 들켜 버린 여자 또한 낫자마자 전투에 뛰어들어야 할 게 분명했다.

베로니카는 오늘, 황실 군대가 막지 못하고 들여보낸 수백 마리 바하무트를 혼자 힘으로 끝장냈다. 피난민 행렬을 조금 도왔던 때와는 다르다. 이제 온 시민이 그녀를 알게 될 것이다. 베로니카는 평민이고, 여자이며, 심지어 노련한 기사들과 비교할 때 어린 편이다. 사람들은 약자가 위에 설 때 더욱더 열광한다. 베르크의 성을 단 리온이 큰 관심을 얻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좋은 일이 아니다. 그녀는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새삼 몸을 아낄 이유가 있어요? 어차피 언제든 남을 위해 죽어야 했는데.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아니, 아니다. 틀렸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죽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 그럼 어떤 식으로 죽어야 했지?’

불현듯 내면의 심연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기만이란 말은 아마 인간이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존재기에 생겨났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던 적 없어.

그렇게 되뇌는데 문득 최초의 바하무트를 교회에서 맞닥뜨린 때가 떠올랐다. 그것의 단단한 가죽에 검을 깊숙이 찔러넣은 순간, 동시에 쓰러진 베로니카에게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거기서 그녀를 죽일 뻔했다.

‘인정해. 희열을 느꼈잖아. 비로소 어깨에 짊어진 사명을 끝내는 데 기뻐했잖아.’

아니, 아니다. 그는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비극을 끝낼 기회를 코앞에서 놓쳤다. 그 후에 죽은 인간들의 목숨은 모두 그의 책임이다.

시커먼 딜레마 속에서 정신이 고통스럽게 발버둥 쳤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죄책감이 타올랐다. 리온은 꽉 끌어안은 여자에게 고개를 묻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는 목적을 잃은 인생이 어디까지 비참해지는지 볼 필요가 없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반나절을 무리하고도 성력을 나누어 준 여파가 천천히 찾아든다. 느리게 퍼지는 독처럼.

***

신께서 일곱 번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신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 Genesis 2:3

***

베로니카는 더웠다. 그래서 성가신 이불을 치우자 누군가 다시 덮어 주었다. 더운데, 더워 죽겠는데. 이번에는 발길질해 이불을 걷어찼다. 그런데도 또 덮이고 말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이불을 걷어 내는 게 아니라 제가 멀어져야겠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빠져나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반짝 떴다. 떨어진다, 떨어…

“뭐야.”

…진다.

콱, 팔이 붙들린 베로니카는 찌푸린 남자에게 단숨에 끌려 올라갔다. 리온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침대에서 떨어질 뻔한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힘줄이 도드라진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왜 거기까지 가 있어?”

“…누가 밀었나 봐요.”

뻔뻔하게 중얼거린 베로니카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남자의 눈길이 가슴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베로니카는 뒤늦게 이불을 끌어안았다.

“보지 마요.”

“이제 와서? 잠든 후에 닦아 주기까지 했는데.”

태연한 말에 가슴 깊이서부터 부끄러움이 울컥 치밀었다. 갑자기 온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잠기운을 지우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남자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그녀를 보고 멈칫했다. 베로니카는 그 꿰뚫어 보는 시선에 읽히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옷이나 갖다 주세요.”

다행히도 리온은 딱히 그녀를 놀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별말 없이 상체를 일으킨 그가 옆에 떨어진 제 옷을 주워 입었다. 베로니카는 그의 하반신을 보지 않기 위해 너른 등판에 시선을 고정하려 애썼다. 튀어나온 견갑골과 일자로 깊게 패는 등줄기.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근육 따위를. 그러다 그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튼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배는 안 고파?”

“안 먹어도 돼요. 어차피 먹어봤자 게워 내기만 할 거고.”

먹지 않아도 괜찮고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근거는 없어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잠은 잘 잔 것 같은데.”

놀리는 건지 그냥 하는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에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말마따나 짧게나마 자긴 했다. 필요했던 일 같진 않지만, 안아 주는 품이 안온했던 탓이다.

사람 몰골을 갖춘 리온이 그녀의 옷을 가져다 주자 베로니카는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옷을 입었다. 움직이는 팔다리의 감각이 어제보다 훨씬 가볍고 편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호흡을 받아 마신 게 효과가 있었던 듯싶었다.

한창 이불 속에서 씨름하는데 사람이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베로니카는 옷을 입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꽤 한참 동안. 다시 바깥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가 버린 줄 알았어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뺀 베로니카가 나지막이 말했다. 리온은 탁자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 정도로 예의 없진 않은데.”

“항상 인사도 없이 그냥 갔잖아요.”

뼈 있는 말에 리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눈을 보며 베로니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기억에 남지도 못한 사건이었다. 교황청에서 도망 나온 후에, 여관에서 같이 지내던 일상 따위는. 그는 그녀가 배웅을 위해 애써 일어나지 않으면 소리 없이 나가 버리곤 했다.

침대에서 혼자 깨는 데는 익숙했다.

“기억 안 나면 말고요.”

옷의 매듭까지 야무지게 묶은 베로니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어 있는 남자를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가 팔을 붙들었다.

“어디 가게?”

“나가서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고요.”

“나한테 물어봐. 다 대답해 줄 테니까.”

“싫어요. 오스카한테 물어볼 거예요.”

어제 반응이 가장 강렬했던 이름을 대자 아니나 다를까 리온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 그 이름을 지나치게 많이 듣는 기분이 드는데.”

“내가 많이 말하니까요. 놔요. 어제 전투에서 다친 데는 없는지도 확인하고 싶어요.”

“왜?”

짧은 물음에 베로니카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묘하게 날 선 분위기를 풍기는 리온이 천천히 다시 물었다.

“왜 네가 그걸 꼭두새벽부터 확인해야 하지?”

지금이 새벽인 줄도 몰랐다. 실은 바로 오스카를 찾아갈 생각도 아니었다. 다만 리온과 한방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친밀하게 말을 섞다가 예전으로 돌아갈까 무서웠다.

“글쎄요,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베로니카는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그러곤 시선을 돌리려다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

맹세코 그런 얼굴을 보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알았으면, 다르게 표현했을 거다. 그가 제게 했던 고백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게. 그리하여 여태껏 그랬듯 내면의 심연을 감출 수 있게.

베로니카는 숨을 멈춘 채 가면이 완전히 부서진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끔찍한 정적 속에서 부서진 소년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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