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81)화 (81/128)

‘최초’의 힘이다. 대기를 다루는 바하무트의 능력.

코피가 주룩 흐르는 게 느껴졌다.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충격이 감돌았다. 수백 마리 괴물의 머리를 터뜨린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기의 일렁임이 돌멩이가 떨어진 호수처럼 어느 한 곳에서 뻗어 나왔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끌려 나온 유약한 여자. 붉은 눈을 제외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반항 한 번 안 했던 순순한 여자.

제 말이 거짓이면 벌을 받겠다던 이단 심문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가 뜯겼다.

울던 아기도, 넘어져 신음하던 노인조차도 그녀를 올려다보며 침묵했다. 모두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베로니카를 신처럼 의식했다.

지붕 위에서 새로운 바하무트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압도적인 파문의 한가운데. 베로니카는 비명처럼 고함쳤다.

“풀어, 빨리!!!”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얼빠진 채 주저앉아 있던 기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밧줄을 잘랐다. 그녀는 자유로워지자마자 곧장 어느 시체 옆에 떨어진 헤네시스를 주워 들었다.

서걱, 달려들던 바하무트가 시원하게 잘려 나갔다. 베로니카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내려 아이를 덮치려던 개체까지도 처리했다. 어쩌면 아까 불을 붙이기 직전, 순순히 눈을 감았을 때,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긴 제가 죽을 자리가 아니란 걸.

“교황 성하를 지켜라!!!”

정신 차린 기사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럼 시민들은? 시민들은 누가 지키는데?

광장 바깥에서 바하무트가 속속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이 숨을 데 없이 밀집한 장소란 그들에게 잘 차려진 잔칫상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뚫린 길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바하무트를 보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베로니카는 그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베고, 찌르고, 때로는 터뜨리면서.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 몸은 오히려 날개 돋친 듯 가벼워졌다.

“저건 아무 대가 없이 힘을 안겨 주는 기적이 아냐. 베푼 만큼 생명력을 앗아 가는 무기지.”

신검에 대한 경고가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리온도 이 상황에선 검을 놓지 못했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바하무트가 인간을 동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들은 냄새와 소리를 따라 사냥했다. 자연스럽게 전투 중인 베로니카에게 몰려들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황실 군대든 신성 기사단이든, 언제쯤이면….

부우우, 등 뒤에서 나팔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들었다고 기억할 뿐인지도.

뒤를 돌았고 사람들의 환희에 찬 얼굴을 보았다. 다행이다,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날아갈 듯 가볍던 몸이 이상하게 기울었다. 바닥을 짚으려던 검이 미끄러졌다.

망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지금은 그 조건을 충족했을까?

***

온몸이 아팠다.

“마셔.”

처음 들린 소리였다. 입술에 술잔이 닿고 차가운 게 들어왔다. 꿀꺽꿀꺽 넘기자 그래, 그렇게, 하는 낮은 어조의 칭찬이 뒤따랐다.

눈을 뜨고 싶었는데 의식은 금세 심연으로 침잠했다. 어둡고 질척하고 끈적끈적한 심연. 그곳에서 베로니카는 어떤 남자와 몸을 섞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깊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짓눌린 채 흔들렸다. 그녀에게 몸을 묻은 남자는 신음을 흘릴 때마다 연신 이름을 불러 주었다.

“베로니카.”하고.

마치 길을 잃은 배를 불러오는 등대처럼.

흐릿하게 뜨인 시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짙게 뻗은 눈썹 아래로 서늘한 불꽃을 보다 눈을 감았다. 제가 침대에 안전하게 누워 있다는 건 도시가 무사하다는 뜻일 테다. 굳이 그에게 말을 걸 필요는 없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리온은 또다시 어떤 잔을 입가에 내밀었다. 턱으로 흐르는 게 싫어 입술을 살짝 벌렸다. 틈으로 빠져나간 액체를 그가 손으로 닦아주었다.

진통 효과가 있는 즙일까. 그래서 이렇게 축 늘어져 잠만 잤나. 생각하며 옆으로 돌려 눕자 잔인한 격통이 전신에 내달렸다. 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처 부위 하나 없는데 칼에 잘게 저며진 것처럼 아팠다. 악문 잇새로 작게 신음하자 리온이 입을 열었다.

“왜 멈추지 않았지?”

평소의 그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경고했을 텐데’ 같은 말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베로니카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새삼 몸을 아낄 이유가 있어요?”

“…….”

“어차피 언제든 남을 위해 죽어야 했는데.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리온은 말이 없었다. 잠자코 기다리던 베로니카는 의아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곧장 시선이 마주치리라는 예상과 달리 리온은 가만히 놓인 그녀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톱이 부러진 두 번째 손가락. 검을 잡을 때 다친 걸까.

흘금 다시 시선을 올렸다. 반듯하게 선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이 날카로웠다. 붉은 머리칼은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그에게선 피로한 분위기가 흘렀다. 본디 지니고 있던 퇴폐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아냐, 틀려… 이건 내가 생각한 게….”

물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가 중얼거리다 뚝 끊겼다. 리온은 표정을 감추듯 눈가를 문질렀다. 짙은 절망이 그의 느린 호흡에 달라붙어 흘렀다.

왜? 왜 당신이 실의에 빠지는 거야?

베로니카는 충동적으로 팔을 뻗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걷어 내자 상처받은 눈과 마주쳤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세상을 지탱하기 위해 나를 골랐으면서, 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베로니카의 질문에 차가운 눈매가 억눌린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가 삼킬 듯이 그녀를 보다가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베이른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

겨울의 일이다. 봄의 온기를 알기엔 너무 이른.

“네 옆을 스치지도 않도록. 네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 수 있게.”

그가 떠나가려는 손을 붙들어 입술을 묻었다. 온 신경이 맞닿은 피부에 쏠렸다. 베로니카는 처음 그를 봤던 날을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서 죽어 버릴 수 있게요?”

핏기가 가신다는 말뜻을 처음으로 눈으로 확인했다. 일그러지는 낯빛은 피할 수 없는 불길과 절벽 사이에 갇힌 사람 같았다. 그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그가 살릴 운명을 타고났다면 그녀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비극에 원인을 따져봤자 신에게 귀결할 뿐일진대.

“있잖아요, 원래 성력은 치유의 기능을 하는 거죠? 그동안은 동화를 막느라 급급해서 내 부상을 치료하지 못했겠지만.”

불쑥 나온 질문에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음에 나올 말을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맞죠? 잘됐네요. 날 도와줘요.”

“어차피 이런 걸 원해서 왔잖아, 너?”

“안아 주세요.”

“…뭐?”

“어차피 이런 걸 원해서 내 옆에 있는 거잖아요.”

한때 가슴에 박혔던 칼을 있는 힘껏 뽑아 그에게 찔러 넣었다. 상처를 주는 일은 생각만큼 유쾌하지 않다. 누구나 해 보면 알게 된다.

“혹시 안 내켜요? 지금 꼴은 보기에 안 예뻐서?”

“베로니카.”

“내 이름 부르지 마요.”

갈라진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리온은 입을 다물었다.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카는 빈정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보탰다.

“다시는 보기 싫다는 사람한테 왔으면 필요라도 있어야 하잖아요. 당신이 가르쳐 준 거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고 왜 걱정하는 척을 하는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데. 괜히 살고 싶어지기만 하는데.

“싫으면 말고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니까요.”

도발이 아니라 체념의 목소리였다. 무표정하던 남자의 미간이 비틀리자 우습게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희열과 닮은 짜릿함이 일었다. 돌멩이를 던진 듯 일어나는 파문이 좋았다. 망가졌나 보다. 어젯밤에 어딘가 단단히 망가진 게 틀림없다.

“다른 사람?”

리온이 특유의 가라앉은 어조로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베로니카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비명이라도 질러서 사람을 부르죠, 뭐. 다른 기사가 오면 부탁할 거예요. 나는 이번에 쓸모가 증명됐으니까 그들도 얼른 회복되는 게 좋다고 판단 내릴지도 몰라요.”

멈춰, 마음에도 없는 소리 좀 그만해. 속으로 아무리 말려도 입술은 멈추지 않았다.

“아, 오스카라면 분명히 해 줄지도.”

“사람 돌게 하는 구석이 있네, 너.”

리온이 말을 끊어 낸 건 그 순간이었다. 다른 남자의 이름이 마침내 입에 오른 순간. 그는 붙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일어나려 했다. 베로니카는 때맞추어 속삭였다.

“너무 아픈걸요.”

일어난 남자가 그대로 우뚝 굳었다. 베로니카는 쉰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도 갈 건가요?

그가 욕을 중얼거렸던가. 아,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은 몸을 기울인 남자의 사나운 입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가느다랗게 내뱉던 호흡에도. 터질 것처럼, 이대로 죽을 듯이 날뛰던 심장에도.

입 안에 들어온 혀를 세게 빨자 리온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더 거칠게 파고들었다. 문득 그는 호흡을 나누며 아무 타격도 없는 건지 궁금해졌다. 사실 이건 목마르다고 서로의 피를 빠는 파멸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와 입을 맞추면 서글퍼진다. 살고 싶어져서. 죽음이 무서워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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