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80)화 (80/128)

눈을 감으면 시야에 얼굴이 들어찼다. 낮은 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맞추던 눈, 억누르듯 찌푸리던 미간, 세상엔 아무도 없었다. 그와 그녀 단둘뿐이었다. 둘이서 온통 흔들렸다. 불꽃처럼, 물결처럼, 그리고….

“베로니카.”

“추정 5만?! 그게 정말이야?”

문밖에서 터진 외침에 베로니카는 눈을 반짝 떴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쉬잇, 조용히 해. 그래. 그렇다니까, 회의에서 나온 데인 경이 하는 얘기를 내가 똑똑히 들었어.”

“말도 안 돼. 비도 오고 어두운데 그걸 어떻게 다 셌는데?”

“야, 이 멍청한 새끼야. 황궁의 수학자들이 너처럼 천치도 아니고 그걸 손가락으로 일일이 셌겠냐? 새가 돌아오는 시간을 재고 땅의 면적을 고려해서 계산한 거지.”

기사들의 목소리가 다소 어리게 느껴졌다. 밤이 지나가는 동안 지키는 사람이 바뀐 건가?

밖은 어느새 새파란 이슬이 맺히는 시각이었다. 군대는 아직까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손바닥에 난 상처를 잡아 뜯으며 초조하게 귀를 기울였다.

“아, 그래? 거 모를 수도 있지. 그깟 일로 사람을 천치라고…. 근데 그래도 여기까진 못 들어오겠지? 기사단 전원이 출전했잖아. 베르크 경도 있고.”

“또 몰라. 얼마 전에 그 난리가 있었는데 중앙 성벽을 혼자 맡았대. 아무리 베르크 경이라도 이번엔 버티지 못 할지도 몰라.”

“윗분들도 잘 아실 텐데 왜 출전시킨 거야?”

“글쎄, 그게 내가 듣기론….”

말하던 기사가 답답하게 소리를 낮추었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두른 채 문으로 다가갔다.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두는 거야. 알아서 갈려 나가고 나면 신검은 다른 독실한 기사를 선택할 테지. 그러니 교회 입장에선….”

“…우리 순서는 안 오겠지?”

심장이 철렁했다. 숨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던 때였다. 부우우, 하는 나팔 소리가 수군대던 병사들의 대화를 집어삼켰다.

베로니카는 휙 뒤돌아 후들거리는 다리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그러곤 창문을 활짝 열어 저 멀리 방벽이 있을 곳을 내다봤다. 그러나 귀환하는 병사의 모습은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지, 방금 그 나팔은?

강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칼을 휘어잡는데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옆에 세워 둔 검을 잡았다.

“헤네시스를 바닥에 놓고 돌아서십시오. 시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즉시 강제 진압합니다.”

처음에는 엿듣는 걸 들켰다고 생각했다. 아까까지 바깥에서 떠들던 목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방으로 들어온 발소리가 꽤 많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바닥에 검을 두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기사들 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검을 주워 들어 뒤쪽으로 건넸다. 이윽고 그녀의 양 손목을 께름칙한 것이라도 대하듯 아프게 잡아 묶었다. 베로니카는 자신과 몇 살 차이도 안 나 보이는 소년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어디로 데려가려고요?”

회피하지 못하도록 그나마 또래로 보이는 한 명을 집어 물었다. 그러나 손목을 묶는 견습 기사는 상황을 알려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반항할까? 아냐, 어찌 됐든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다. 섣불리 적으로 돌려선 곤란하다.

영문도 모른 채 당기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그녀를 대성전의 열린 문으로 이끌었다. 봄이라 해도 아직은 추운 날씨라 피부에 와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베로니카는 어두운 성전에서 하얗게 밝은 바깥으로 나가며 부신 눈을 내리깔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른 새벽임에도 밤새도록 이어진 기도회 때문에 광장에는 인파가 넘쳐 났다. 밤을 새워 시간 감각이 흐려진 사람들. 맹목적이고 독실하며 신실한 사람들.

“거기서 멈춰.”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연행이 끝났다. 베로니카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고, 대충이나마 제가 처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높이 세워진 나무 기둥, 중앙에 기립한 붉은 옷의 이단 심문관들, 군중 앞에 손이 묶인 채 선 죄인까지.

“천 년 전, 가엾은 아들을 불쌍히 여기신 아버지께서는 예언하셨습니다.”

종교 재판이다.

“성도의 안식과 평화는 영원하리라. 그 땅에 죄 없는 피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아니하리라.”

종교 재판의 형상이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이단 심문관을 쳐다보았다. 옆에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교황이 인자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한창 진행되던 무언가에 난입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예언의 시대는 20년 전 종언을 맞이하였고 우리는 지금 부서진 예언의 조각 위에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베로니카는 시민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녀를 아는 것처럼 흘금거렸다.

“시중에 떠도는 삿된 말처럼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까? 카르트가 최초의 땅처럼 손쓸 여지 없이 타락했기 때문입니까?”

샛별처럼 빛나는 눈. 뜨거워진 열기. 악의. 원망.

“20년간 교황청은 예언의 시대가 종식된 이유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앞에는 이 모든 재앙을 불러온 마귀의 현신이 서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갔다. 너무도 느닷없지 않은가.

이런 일엔 예고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사건을 짐작할 만한 단서라든가, 복선이라든가… 그러다 문득 아까 들은 말이 떠올랐다.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두는 거야. 알아서 갈려 나가고 나면 신검은 다른 독실한 기사를 선택할 테지. 그러니 교회 입장에선….”

단서는 헤네시스였던가. 그걸 손에 쥐고 돌아온 순간부터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던가.

“이 여자는 20년 전, 광야의 석상이 머리를 잃었을 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하무트를 이 땅에 불러오기 위해 힘을 키웠습니다. 그 증거가 여기, 머리색과 맞지 않는 불길한 바하무트의 눈입니다. 동화되고도 살아남은 게 아니라 스무 해 동안 인겁을 뒤집어쓰고 정체를 숨겼던 것입니다!”

기가 막혔다. 광야의 석상이 머리를 잃은 건 여름이다. 베로니카는 겨울 태생인데다 잘 생각해 보면 군데군데 말도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도 심문관은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겨질 정도로 격렬하게 가슴을 오르내리며 성토했다.

“성도에 숨어든 이후로는 교황 성하의 안전에서 카르트가 멸망하리라는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전 세계 각국에 있는 바하무트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교황 성하와 퀴힐러 남작, 그리고 데인 경이 증언하였습니다.”

존경받는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자 사람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심문관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이 여인을 피난 행렬에서 마주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공로는 단지 제 죄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신성 기사단의 단장 메클렌부르크 경을 살해하고 신검을 훔쳤습니다.”

허, 하고 놀라는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제게 하나둘 옮겨오는 적의 어린 시선 속에서 베로니카는 한마디 변명조차 내뱉지 못했다. 말한들 들리기나 할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실감이 없었다. 오랜만에 악몽이 떠올랐다. 어딜 봐도 따라오는 눈. 그 눈.

“그러므로 성직자 살해죄, 이단 숭배죄, 시민 선동죄를 물어 화형에 처할 것을 주장합니다! 마귀를 태우면 이 모든 재앙과 고통도 곧장 끝날 것입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처음부터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음을. 이들에게는 그저 시민들을 달랠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다.

복선이나 단서 따위 있었을 리 없다. 누군가 오늘 새벽에 황급히 떠올린 계책이었을 테니.

“제 말이 진실이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신께 벌을 받아도 좋습니다!”

판관과 교황이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질질 끌려가 나무에 몸이 칭칭 감기는 것만으로 명백해진다.

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신의 아들을 끌어내려 같이 나락에 떨어진 죄. 듣기론 이런 때 군중은 달걀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다는데 수척한 피난민들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지쳐 보였다.

이상하게 반항할 마음 대신 간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리온은 이 모두를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안아 준 걸까? 모르겠다. 그저 모든 게 어지럽고 피곤하다. 생각이 길었다.

“정화의 불꽃을!”

횃불을 든 병사가 다가왔다. 베로니카는 눈을 감았다. 소리가 들렸다, 와득.

와득?

“꺄아아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베로니카는 감고 있던 눈을 본능처럼 치켜올렸다. 그리고 벌을 받아도 좋다던 심문관이 목이 뜯긴 채 바닥에 뒹구는 꼴을 목격했다. 쾅, 쾅, 이윽고 뒤편의 대성전 지붕에서부터 바하무트들이 뛰어내렸다. 몇 마리는 지붕 위의 사도 조각상과 함께 서 있었다. 부우우, 그들이 나팔을 불었다. 얼굴에 있는 입을 이용해서. 마치 인간처럼.

부우우, 그건 귀환 나팔이 아니었다. 인간을 흉내 낸 개전 나팔이었다. 군중은 순식간에 혼비백산했다. 비명과 고함과 살육의 소리가 들렸다. 피가 튄다. 사람이 죽는다.

어떻게 머리가 생겼지? 어떻게 새로 세운 방벽이 아니라 뒤쪽의 견고한 성벽으로부터 온 거지? 성벽이 뚫린 건가? 어떻게? 천 년간 쌓인 성력이 신의 민족을 지키기로 되어 있잖아?

“밧줄 풀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베로니카는 멍청하게 횃불을 들고 굳어 있는 기사에게 발길질했다. 그녀의 손을 묶었던 견습 기사였다.

“이거 풀라고!!!”

픽 픽 쓰러지는 병사들을 입을 벌리고 보던 그는 뒷걸음질 치며 횃불을 떨어뜨렸다. 화가 났다. 피곤한 슬픔으로 피가 끓어올랐다. 여긴 아셀도르프가 아냐. 손발이 묶였다고 무력하게 있지는 않을 거야.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할 거라고!

팍, 소리가 나며 견습 기사를 덮쳤던 바하무트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그 순간 카르트 역사상 가장 많은 목격자를 가질 이적이 일어났다. 아,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켜지는 불꽃 같았노라고, 어느 생존자는 증언했다. 광장 안에 있는 수백 마리 바하무트의 머리통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대기에 짓눌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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