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9)화 (79/128)

이상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벗는 것보다 입는 게 훨씬 오래 걸려야 하는 거 아닌가.

베로니카는 이불 아래 노곤한 몸을 웅크린 채 눈 깜짝할 사이에 갑옷을 착용하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몸을 감싸던 온기 하나가 빠져나갔다고 으슬으슬 추웠다. 빈틈없이 안아 주던 단단한 팔과 얼굴을 묻었던 어깨를 떠올리다가 어쩌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바하무트는 감기도 안 걸리려나.

별 근거도 없는 생각을 하며 나갈 채비를 마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돌아서서 저 문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신 그녀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원하던 바였다. 리온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신념을 빼앗고, 무너뜨리고, 타락시키고, 더는 자신을 흔들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일.

그토록 바라던 소원을 이루는 중인데 우울했다. 몸의 일부를 떼어 놓는 것처럼 아팠다. 울어서 잔뜩 부어오른 눈을 비비는데 리온이 침대 옆으로 몸을 숙였다.

“베로니카.”

“…….”

“가기 전에 부탁이 있는데.”

낮은 목소리가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떨어졌다.

“다 끝나고 한 번만 더 만나러 와도 돼?”

그가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 줄 것도 있고.”

잠긴 목소리는 다정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부탁이었다. 멍하고 흐릿하던 베로니카의 동공에 천천히 빛이 돌아왔다.

한 번만 더. 머릿속에 그 말만이 유혹적으로 박혔다.

“싫어?”

그렇게 묻는 남자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항상 쓰고 있던 태연하고 느른한 가면은 어디다 벗어 던진 건지, 그는 광야에서 엿보았던 텅 빈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시릴 정도로 외롭고 고독해 보였다. 베로니카는 그 속에서 절박함과 초조함을 발견하고 심장이 철렁했다. 이전에 그녀가 그를 향해 느끼던 무력감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싫다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 나는 관계였다.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결정권이 제 손아귀에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감정의 우위를 점한다는 건.

아무 대답도 주지 않자 리온은 묵묵히 기다리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동그란 이마부터 눈썹, 콧대, 입술과 턱, 그리고 다시 보드라운 볼.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매만지는 손길이 졸음이 올 정도로 짙고 느릿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예 떠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이 들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그는 전쟁도 바하무트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녀의 옆에 남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런 걸까? 원래 남자들은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이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듯이 구는 걸까?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구석구석 달아올라 아릿해졌다. 그러니까, 발등부터 종아리와 허벅지, 납작한 배와 귀 끝까지, 전신이 아팠다.

“억지로 강요해서 힘들게 할 생각은 없어. 다만 지금 약속받는다면….”

기다렸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리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눈이 천천히 내려와 부어오른 입술 위를 배회했다. 착각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남자들이 흔히 느끼는 배설 충동이 아니라 애정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우리는, 당신은, 오늘 밤의 일은.

뎅, 뎅, 뎅, 그 순간 밖에서 구원처럼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 다 소리 내지 않고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 베로니카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뗐다.

“가요, 이제. 가야 하잖아요.”

베로니카는 이불 속에서 빼낸 손으로 그의 팔을 밀어냈다. 가라는 말은 분명 그의 부탁에 대한 대답이 되고도 남았다. 똑바로 내리꽂히는 눈빛이 치사할 정도로 뚜렷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베로니카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속지 않아, 다시는 기대하지 않아. 쉽게 넘어갔다간 또 상처받고 만다. 검은 방에서 홀로 우는 일은 지긋지긋하다.

“힘들게 하기 싫다면서요. 내 선택을 존중한다더니 아니었나 봐요. 가요. 이제 당신은 필요 없어요.”

차갑게 내뱉곤 눈을 질끈 감았다. 종소리가 채근하듯 아까보다 길게 울려 퍼졌지만 리온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중간에 고개를 숙이는 기척이 들렸다. 호흡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그러나 끝끝내 입술은 닿지 못하고 멀어졌다. 손끝이 저릿하게 아파서 꽉 쥐었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쏟아 냈다.

발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본 마지막은 몸을 일으켜 세우는 리온의 손이었다. 아직 건틀릿을 끼지 않은, 화상 자국이 있는 손.

실은 계속 묻고 싶었다. 어디서 얻은 흉터냐고. 카르트에 오기 전까지 팔에 그런 화상은 없지 않았냐고.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기다리던 남자는 고집스러운 외면에 결국 무겁게 돌아섰다. 쿵,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시끄러운 적막이 찾아들었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발작적으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새하얀 나신을 가릴 생각도 않고 떨어지는 시트를 밟으며 어느새 비가 그친 바깥을 내다보았다. 밖으로 나올 사람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다리 사이로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리온은 여자를 안았다. 신의 성소에서. 사제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타락을 탐닉했다.

평생 신의 기사였기에 그 죄의 무게는 아는 것보다 더 무거웠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인지한 상태로 몸을 섞었다. 그는 신념을 포기했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저 버렸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오면서 점차 드러나는 신상은 죄인 된 아들을 탓하듯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리온은 십자가에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생모가 지어 준 첫 번째 이름은 노아. 그 뜻은 신이 내린 휴식이다. 맞는 이름이 아니었음은 이로써 분명해졌다. 이 생에서도 죽어서도 그에게 낙원의 휴식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전의 오르간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의 부속가가 한창이었고 대성전 안은 기도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이 신성한 공간의 위에서, 그는 마귀에 동화된 여자와 체액을 섞었다. 독실한 기도가 실려 올라간 끝에서 가장 은밀하고 세속적인 행위를 나누었다. 후회는 없었다. 다시 시간을 돌려도 그는 그녀의 요구를 행할 것이다. 그러니 회개는 불가능하리라.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자 흰 갑옷의 기사가 다가왔다.

“부단장님으로부터의 정중앙의 방벽을 맡으라는 전언입니다. ‘책임지고 단 한 마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무시한 채 리온은 그대로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로는 웅장한 레퀴엠이 낮게 깔렸다.

Dies iræ, dies illa,

진노의 날, 바로 그날,

solvet sæclum in favilla,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

성전을 가로지르는 동안 찬송과 여자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함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붉은 카펫은 발갛게 일어난 여자의 눈가처럼 보였고 비에 젖은 광장은 아파서 뚝뚝 흘리던 눈물을 상기시켰다.

마음 같아선 아침까지 같이 있고 싶었다. 아니, 아침이 아니라 더 오래라도. 몇 번의 밤이라도 좋았다. 그렇게 일만 치르고 무책임하게 자리를 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리온은 뼈아픈 진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원치 않았다.

Juste judex ultionis

정의로운 복수의 재판관이여

Donum fac remissionis

저에게 용서의 선물을 주소서

Ante diem rationis.

응보가 이루어질 그날이 오기 전에.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서로를 부수고 망가뜨리는 것 외에는. 단지 죄를 짓고 떠나기를, 타락과 붕괴와 무너짐을 소망했다. 리온에겐 무릎 꿇고 빌 자격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정에 대한 존중은 그야말로 잔혹한 형벌이었다.

리온은 다른 죄지은 인간들처럼 단순하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그것마저 금지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납게 뛰어대는 심장을 강제로 뜯어내 짓밟는 것과 같았다. 비참했다. 감히 내뱉지도 못한 감정은 처참하게 고여 그의 가슴에서 썩어 갔다.

Oro supplex et acclinis,

낮게 꿇어 엎드리고,

Cor contritum quasi cinis,

마음은 뉘우쳐 잿더미와 같으니,

기다리고 있던 검은 군마에 올라타자 히히힝 소리와 함께 말이 땅을 박찼다. 리온은 광장을 넘어서 열쇠 대로를 내달렸다. 병사들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처럼 길을 열어 주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 묻힌 울퉁불퉁한 방벽이 보였다.

다른 병사들은 일정 범위 내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리온의 폭주에 휘말리면 개죽음이기 때문이다. 혼자 싸우는 데는 그도 이의가 없었다. 다만, 위화감만은 방벽에 다가갈수록 선명해졌다. 거대한 수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데 반해 어둠 속에서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본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번득이는 게 바하무트의 눈동자. 그러니 이런 암흑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리온은 검을 뽑아 들고 가장 높은 방벽에 서서 기다렸다. 비가 그친 새벽 공기가 칼날처럼 시리게 스쳤다. 뒤에는 도시의 불빛이, 앞에는 밤보다 더 어두운 심연이 도사렸다.

Lacrimosa dies illa

눈물 흘릴 그날

Qua resurget ex favilla

잿더미로부터 일어나

Judicandus homo reus.

심판받을 죄인들.

예언처럼 울리던 머릿속의 레퀴엠도 끝나가고 있었다. 바닥이 덜그럭 덜그럭 거리는 진동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리온은 검을 늘어뜨리듯 든 채 품에 안겼던 작은 온기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 내리던 여관, 단둘뿐인 광야, 대신전, 카르트를 순서대로 추억했다. 그녀는 어둠 속의 불꽃이 되어 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바라지 않는 편이 낫다. 불꽃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태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여자에겐 눈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아무리 추운 세상에서도 강하게 피어나는. 불꽃은 가까이할수록 다만 독이 되는.

Pie Jesu Domine,

자비로운 주여,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베푸소서.

“Amen.(아멘)”

마침내 어둠 속에서 거미 떼처럼 무언가 튀어 올랐다. 돌 더미를 타고 기어오른 생명체를 본 리온은 찰나 얼어붙었다. 그들에게는 ‘머리’가 돋아나 있었다. 아직은 눈도 뜨지 못한, 그러나 태아의 그것을 닮은 머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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