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등은 침대에 닿았다. 아, 읏. 각도를 달리해 겹쳐오는 입술 사이로 야릇한 소리가 뚝뚝 떨어졌다. 베로니카는 왜 제가 그런 민망한 소리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건데. 혀와 입술이 빨려서 얼얼한데 왜.
큰일이다. 고통과 쾌락이 구분되지 않는다.
팔로 침대를 짚은 남자가 이내 입술을 떼어 냈다. 헐떡이며 몰아쉬는 숨결 사이로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
그 순간 맨살로 올라온 차가운 손이 둥근 살결을 아프게 쥐었다.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리온은 그런 그녀를 빤히 보면서 주무르는 악력을 풀지 않았다. 아, 들켜 버린 거다. 입을 맞출 때부터, 아픔과 쾌락의 동일한 반응을.
싫어, 보지 마.
“고개 돌리지 마.”
피하려던 턱이 붙잡히고 벌어진 입술로 그의 손가락 두어 개가 밀려들었다. 눈꼬리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붙잡혀 무력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침입자는 혀를 문지르고 입 안의 말랑이는 살과 치열을 모조리 훑으며 탐식했다. 깊숙이 휘젓는 손은 어떤 암시처럼 노골적이었다.
질척한 소리가 빗소리와도 닮았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러다 파도에 휩쓸리듯 의식이 나가는 게 두려워진 베로니카는 혀를 서투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깨물고 핥자 리온이 짙어진 눈으로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깊이 팬 미간이 마음에 들었다. 완전히 돌아 버린 눈이 나쁘지 않았다. 더, 더 깊이. 지금 우리가 성전 안에 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있도록.
“아….”
말이 되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가 목구멍을 타넘은 순간 리온이 손을 빼며 말려 올라간 슈미즈 아래로 고개를 묻었다. 볼이 패도록 그녀를 탐하는 남자의 얼굴은 그 모습 자체로 극도의 자극이었다. 베로니카는 기이한 배덕감을 이기지 못해 붉은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 정도로 이상하고 간지럽다. 그런 식의 순진한 표현 뒤에는 얼마나 적나라한 욕망이 숨어 있는지.
“너한테선 눈 같은 맛이 나. 어렸을 때 한번쯤 입에 넣어보는 갓 내린 눈.”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투둑투둑 비가 떨어지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섭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괴수가 날뛰는 것처럼 온 세상이 요동쳤는데.
“벗겨 줄 테니까 팔 들어 봐.”
옷을 벗는 건 당연히 베로니카 쪽이 더 빨랐다. 애초에 그녀가 건드린 방어구는 건틀릿과 완갑 정도라 리온은 뒤늦게 상체를 일으켜 덜 벗은 갑옷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시선은 하얗게 드러난 살결에 뚫어지게 고정한 채로. 달뜨는 열감에 베로니카는 옆에 있는 이불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그렇게 보지 마요.”
“아, 미안. 여자 몸을 보는 건 처음이라.”
“처음? 그럼 황족은 옷을 입고 밤을 보낸다는 말이 진짜예요?”
“모르겠는데. 설마 아직도 내가 황녀와 뒹굴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그 여자뿐만 아니라 누굴 안는 건 네가 처음이야.”
리온은 오해받는 게 싫은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도 그랬었지. 진짜일까 생각하다가 베로니카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뭐 어때.
“거짓말이어도 별로 신경 안 써요.”
잘생긴 미간에 단숨에 금이 갔다. 마침내 갑옷 안에 받쳐 입은 검은색 언더 아머까지 양팔을 교차해 올려 넘긴 그가 자연스럽게 침대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난 신경 쓰이는데.”
희미한 음영이 남성적인 상체 곳곳에 기어들었다. 베로니카는 넓고 각진 어깨와 그 아래로 내려오는 근육을 저도 모르게 눈으로 더듬었다. 오래된 흉터가 군데군데 보였다.
“뭐가 신경 쓰여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가 뭘 했는지. 호흡만 섞었는지 아니면 더한 것도 했는지. 네가 좋았는지 싫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신경 쓰여.”
질투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남자는 수치를 몰랐다. 사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부끄러움 같은 건 아예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솔직하게 사람의 넋을 빼놓았다.
“뭐든 간에 아무랑도 안 했어요.”
“아, 이번엔 내가 네 말버릇을 빌릴 차롄가?”
리온이 그녀를 가린 이불을 걷어내며 씩 웃었다.
“거짓말.”
남성적이고 야만적인 체취가 전신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서늘한 피부가 밀착하자 솜털이 일어나며 몸에 있는지도 몰랐던 말초적인 신경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극과 안정이 혼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베로니카는 본능처럼 제 몸을 덮은 남자에게 팔을 뻗었다.
“정말이에요. 나도 죽는 줄 알았는데. 성력 없이도 몸이 적응했어요. 어쩌면 그때부터 동화가 차근차근 진행된 건지도 몰라요.”
당신이 떠난 그날부터.
다시 말해 그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동화도 진행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물론 그랬다면 바하무트의 이상한 힘도 다루지 못했을 거고 황궁에서의 결투나 미끼 작전도 엉망이 되었겠지만.
리온의 낯빛이 굳었다. 베로니카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아요. 성력 얘기 말고, 당신이 다른 여자 안아본 적 없다는 말.”
의구심이 드는 일이었다. 만약 이게 그의 첫 경험이라면, 왜 이제 와서 선을 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념을 버려서까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단 말인가? 그에게 안아 달라고 했을 땐 당연히 그의 신념이 이미 무너진 상태인 줄 알았다. ‘더’ 타락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지 애초에 처음일 거라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황녀와 밤을 보냈다고 믿었다.
왜?
재회하고부터 그는 유독 다르게 굴고 있었다. 그녀가 금방 사라질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초조하게 제 감정을 털어놓았다.
“안 믿어도 상관은 없는데. 긴장한 것만 봐도 진실성은 있지 않아?”
“긴장했어요?”
“응.”
“왜요?”
“널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아픈 건 아까 키스하면서 만졌을 때도 아팠는데.”
리온은 당황했는지 아, 하고 잠시간 침묵했다.
“미안.”
“안 미안해도 돼요. 어차피 아프고 싶어서 안아 달라고 한 거니까.”
수려한 얼굴이 설핏 굳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내리깔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플 때는 빗소리도 잘 안 들려서 좋아요. 그러니까 아까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아도 돼요.”
“…….”
“남은 시간도 별로 없잖아요.”
괜히 전희에 공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처음이지만 베로니카도 남녀 관계에 대한 기본 지식은 있었다. 원래 거리에서 자란 평민 소녀들이야말로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높은 신분의 아가씨들보다 나은 법이다. 듣기론 귀족들은 세상 잡다한 교육을 다 시키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금기시한다고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처음은 다 똑같이 아프대요.”
“그래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지면 언제든 말해. 곧장 그만둘 테니까.”
낮은 목소리가 무심하게 휘감겼다. 언제나 그렇다. 남자는 무심하게 다정했다.
“넣었을 때도요?”
“…생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오네, 자꾸.”
“어디서 들었는데 남자들은 시작하고 나면 못 그만둔 대요.”
“왜? 개처럼 붙기라도 한대?”
픽 비웃은 리온이 이마와 콧대에 입을 맞추고 내려와 입술에도 짧게 키스했다. 튀어나온 쇄골을 지분거리며 손을 능숙하게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가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이가 차면 누구나 이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걸까.
아, 그 또한 평민 출신이니 여기저기서 자라며 들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하지만 수도원에서 자랐을 텐데. 생각이 두서없이 흐르는 동안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아….”
한 번도 타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그가 파고들었다. 신경을 뭉개는 듯한 예민한 감각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리온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싫다, 그는 견딜 수 없어지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진실로 견딜 수 없는 건 그의 다정함이다. 마치 애정이 담긴 듯한 배려. 하지만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니라 추락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해요, 제발. 그런 거 해 주지 말고 바로 하면 안 돼요?”
베로니카는 흐느끼듯 애원했다. 똑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멋대로 흔들렸다.
싫어. 좋은 기분이 드는 게 싫어.
“베로니카.”
“그냥 망가뜨리라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선이 진창처럼 뒤얽혔다. 그가 처음으로 부른 이름이었다.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망가뜨려요. 리온의 표정이 뒤틀렸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인간은 상처 주면서도 상처를 받게 되는 걸까. 사실은 우리도 바하무트처럼 한 몸으로 태어난 걸까, 하고.
***
모든 게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추적추적한 빗소리. 침대가 덜컹거리는 소리.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버둥거리며 스치는 시트 소리. 짓누르고, 압박하고, 신경이 흐물흐물 녹아 정신없이 출렁이는. 삐걱, 삐걱. 삐걱.
아파, 이상해. 제발.
잦아들었던 비는 다시 거칠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광포한 바람에 창이 덜컹덜컹 흔들리고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넋을 놓고 있다가도 소리를 들으면 현실감이 돌아왔다.
교회에서 몸을 섞고 있다. 신의 집에서 그의 아들을 탐하고 있다. 나지막한 신음만으로 그의 고뇌가 피부로 와닿았다. 그를 타락시켰다는 데 대해 엄청난 희열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몸서리쳐지게 슬펐다.
베로니카는 축 처진 몸을 엎드렸다. 깡마른 등으로 곧장 입술이 닿아 왔다. 리온은 부서진 인형을 앞에 둔 소년처럼 그녀의 등을 찬찬히 더듬어 훑어내렸다. 아니, 정확히는 등이 아니라 영광의 흉터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가 버리고 간 곳에서 그녀가 입은 상처. 신의 대리인이 명령하고 신의 기사가 채찍을 휘둘렀으니 영광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도 모자람이 없다.
“미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 위로 떨어졌다. 미안해. 벌써 수십 번, 그의 사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부 제 잘못이라고. 두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바보 같다. 그렇게 말 안 해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그의 말이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서글픔은 조금씩 옅어지는 게, 마음은 물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영원히 비가 내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