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7)화 (77/128)

보고 싶었다. 사실은 일주일이 아니라 스물아홉 해를. 리온 베르크는 심연의 구원자를 찾아 평생을 헤맸다.

새까만 바다. 진득하게 발치에 고인 외로운 늪. 잘라 내고 잘라 내던 검은 고독이 무릎과 어깨를 넘어 어느새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내가 삼킨 눈물이 몸속 어딘가에 쌓이는 것 같다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눈높이까지 차오르면 그때부턴 평생 우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빠져 죽어가던 그의 손을 누군가 잡아당겨 끌어 올렸다. 차갑게 굳은 숨을 토하며 뜨거운 호흡을 받아 마셨다. 전부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녀가 그를 구했고 마침내 숨 쉬게 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대신 울어 줄까요?”

기적이자 구원이었다. 그만을 바라봐 준 최초의 신이었다.

그러나 리온은 성전 속 어리석은 제자가 그러했듯 유일한 신을 헐값에 팔아넘겼다. 감히. 사금 가루를 멋대로 재단하고 모래와 함께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잃어버렸다. 찾지 못했다. 그사이 가면은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불꽃이 사라진 깊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감싸 쥐고 외로이 사랑을 깨달았다. 저지른 짓을 되돌리고 싶다고 후회했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어.”

그를 괴롭히는 감정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만큼 달콤하거나 아름답지 못했다.

단지 비참하리만치 투명했다. 숨길 수 있으리란 오만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사실은 보고 싶다는 말보단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가 치기 어린 열아홉 소년이었다면 진작에 뱉고 말았을 진심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가 신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곧 최전선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리온이 오늘 밤에 죽는다면 불같은 감정은 그녀에게 낙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온은 하고 싶은 말 대신 다시 한번 고백했다.

“그래, 나는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다는 말은 비극이다. 그 말은 분명 그리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연인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새빨간 눈동자가 바람 앞의 불꽃처럼 일렁였다. 리온은 그 사소한 표정의 변화를 갈급한 눈으로 좇았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망막에 새기고 기억에 담아 두고 싶었다. 그게 화가 난 기색이든 불쾌함의 표현이든 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 떠올릴 얼굴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순간 동요를 보였던 베로니카는 이내 뭔가를 억누르듯 감정을 삼켜 냈다. 화내거나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되묻는 대신 그녀는 까마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반응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그녀의 대답이었다. 흔들리고 휘둘리는 일에 지쳐서 화도 내지 않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대하지 않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 낮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자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땐 내 죽음을 바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래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리온은 제가 지껄였던 거짓말이 그대로 돌아와 심장에 박히는 꼴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차라리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찾아가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염치 없다는 건 알아.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리온은 낮은 어조로 이어 말했다.

“옆에 있게만 해 줘.”

시선을 붙잡아 돌리고 싶다. 그러나 함부로 만지지 말라던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통제했다. 리온은 달라지기 원했다. 노력하고 싶었다. 침대를 짚었던 손은 시트를 느리게 움켜쥐었다.

“네게 뭔가를 원해서 이러는 게 아냐. 다시 좋아해 달라고 하지도 않아. 오히려 미친 듯이 싫어해도 상관없어. 아픈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날 때리든, 똑같이 상처 주든, 무슨 짓을 하든지 그냥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만.”

“…….”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

원한다면 어떠한 죗값이라도 치를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발치를 핥으라고 해도, 고통스러운 폭주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반복하라고 해도 기꺼이 감내할 생각이었다. 단지, 그녀가 옆에 있게만 해 준다면. 어차피 그의 생은 길지 않을 테니.

영원할 것 같던 침묵이 깨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애초에 내가 싫다고 대답하면 들어주긴 할 건가요?”

작고 또렷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꿰뚫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베로니카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기 위해선 내 말에 힘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나가라고 하면, 다른 말 얹지 않고 당장 들을 자신은 있어요?”

허를 찔린 듯 시커먼 침묵이 흘렀다. 리온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그녀의 물음을 되새겼다.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가슴 한구석이 선득해진 후에야 불편한 진실이 한기가 되어 전신을 휘감았다.

이기적으로 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녀에겐 이런 애원조차 이기적인 짓이었다.

정말 모든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그녀를 먼저 완전히 존중해야 했다. 그녀가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해도. 죽을 때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맴돌아야 한다 해도.

“네가 원한다면.”

한참 만에 나온 대답에 베로니카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리온은 픽 웃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왜 웃어요?”

“말하자마자 후회돼서.”

솔직히 대답하자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대화가 사라진 두 사람 사이로 빗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멍하니 창문을 보던 베로니카가 불쑥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바닷게가 담긴 통은 뚜껑을 닫을 필요가 없는 거 알아요?”

“…뭐?”

“게들이 올라가려는 상대를 서로 끌어내리거든요. 그래서 뚜껑을 닫아 둘 필요가 없어요.”

“…….”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바닥에 떨어진 인간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번쩍하며 방 안이 훤해졌다. 리온은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쿠구구궁, 뒤늦게 소리가 찾아들며 사위가 어두워졌을 때 그녀의 입술은 이미 그에게 맞닿아 있었다. 리온은 눈도 감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당신을 망가뜨리고 싶어요.”

입술을 떼어 낸 베로니카가 지척에서 속삭였다.

“신께서도 치를 떨며 버리실 만큼 타락했으면 좋겠어요.”

한 번 들었던 말이다. 산사태로 도망치던 때. 그녀가 그에게 이름을 가르쳐 준 날. 리온은 그때 그녀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생각해 보니까 당신은 아무것도 잃은 게 없잖아요.”

방어구가 하나씩 풀려 바닥에 덜그럭 떨어졌다. 리온은 반사적으로 막으려다 다음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베로니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사실은 지난 일주일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 같기도 해요. 나, 배도 안 고팠던 데다가 저녁 먹은 것도 다 게워 냈거든요.”

“…….”

“지금껏 잠도 못 잔 데다가 환상도 보이지 않아요. 유인할 때 하던 것처럼 안의 눈꺼풀을 뜨는 일도 안 돼요. 뭔가 이상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비를 맞은 것처럼 오들오들 떨렸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정말이지 꼭 평범한 바하무트가 된 기분이에요.”

그녀는 공포에 질려서 중얼거렸다. 마침내 리온은 더 견디지 못하고 가느다란 어깨를 당겨 안았다. 함부로 만져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냥 뒀다간 비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았다.

쉬이, 괜찮아. 달래듯 말하며 으스러져라 끌어안자 익숙하게 목을 휘감아 오는 팔은 어둠 속에서 더 자극적이었다. 틈 하나 없이 몸이 바싹 밀착했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났다. 갈증엔 끝이 없다. 단 한 번만 보고 가겠다 하던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온기를 나누고 싶은 욕망으로 뒤바뀐다.

“내가 정말 바하무트가 됐다면, 나를 안는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짓는 거겠죠.”

베로니카가 음울하게 속삭였다. 확실히. 마귀와 동침하는 타락은 신조차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안아 주세요. 그리고 우리 다신 보지 말아요.”

잔혹한 매혹이 귓가에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리온은 떨리는 등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같이 지옥에 가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그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던 신념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엇을 바쳐도 사랑은 대가로 받아 가지 못할 것이다. 말도 안 되게 불합리한 거래 조건이었지만 리온은 제가 거부하지 못할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헌신과 무자비한 희생.

그의 손이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듯 움켜쥐었다. 고개를 기울여 목덜미에 입을 맞추다가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로 파고들었다. 고인 타액이 술처럼 달았다. 가지런한 치열을 부드럽게 훑다가 혀로 입천장을 꾹꾹 누르며 반응을 유도했다. 읏, 마침내 도톰한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흐른 순간 그는 거칠게 돌변해 혀뿌리를 휘감고 사납게 빨았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깊이, 더 깊이. 목구멍에 닿을 듯이 혀를 밀어 넣었다. 질척한 소리가 멎을 때마다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얇은 흰색 슈미즈 속으로 파고든 커다란 손이 살결을 세게 쥐었다. 아, 아.

늘 생각하지만 이 행위는 살인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 죽고 싶어지는 가학성의 측면에서.

솨아아, 창밖에는 질척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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