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력 1522년 4월 15일.
화이트랜드, 체사니아, 탄비아 그리고 카이젠미어 내 여러 도시에서 서신이 날아왔다.
각기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동일했다.
‘버티던 전선이 무너졌으며, 그에 따른 지원을 요청한다.’
“교회법에 구애받지 않는 루에가와 롬 군도에서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비슷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타원형 탁자의 상석에 앉은 필립이 말했다. 빙 둘러앉은 기사단의 중역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다음에 나올 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하무트는 마지막 총공세에 들어간 겁니다.”
우르릉, 솨아아-.
기사단의 일원이 아니기에 탁자에 앉지 못한 리온은 창가를 등지고 서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밤하늘은 번개로 하얗게 번득였다. 봄비라기엔 전례 없는 뇌우였다.
“반 시간 전, 카르트에서도 바하무트의 접근이 확인되었습니다. 추정 최소 5만이며 이는 동서남북 전방위를 포함합니다.”
“제기랄, 아주 작정을 했군.”
끔찍한 숫자에 탁자에는 탄식이 흩어졌다.
이런 날씨엔 성벽의 대포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불화살을 쏠 수도 없고 갑옷과 무기는 젖은 솜처럼 몇 배나 무거워진다. 인간의 전투에는 최악인 셈이다.
그러니 마치 하늘이 바하무트를 돕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말은 안 해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십 수 개의 도시가 붕괴했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전세가 기울 수는 없었다. 신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은.
“작전에 대해서는 황실 군대와 의논을 끝마쳤습니다.”
기사들의 동요를 무시한 채 필립이 설명을 계속했다.
“성력이 없는 일반 병사는 동화될 수 있으니 전면에 세우지 않습니다. 최전선에 서서 성도를 지키는 건 자랑스러운 신의 기사들이 될 것입니다.”
술렁이던 방 안이 적막으로 일변했다. 전원 출전. 최전선. 이 자리에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이다. 죽음이 목전에 있다. 어쩌면 여기 앉은 모두가,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도 전원 출전에 동의하셨습니다. 아직 서임 받지 못한 견습 기사들이 교황 성하를 수호하며 시민들의 안위를 살피는 임무를 이어받을 겁니다.”
눅눅한 공기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리온은 왜 메클렌부르크가 제 후임으로 필립을 세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처럼 메마르고 냉정한 인간만이 폭우를 무시하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다. 젊은 기사는 그야말로 귀족에게 기대되는 의연한 품위를 지닌 자였다.
“다행인 점은 두 자루의 신검이 다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무너진 성벽 쪽만 신경 쓰면 충분합니다. 천년 간 쌓인 성력이 있는 한 그것들은 동, 서, 남쪽의 어느 성벽도 기어오르지 못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필립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리온은 자신에게 닿아오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더불어 신검에 대해서도 성하의 명이 있었습니다만, 베르크 경. 동화자를 잘 아는 경의 판단으로는 어떻습니까. 그녀를 다시 전장에 세워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동화자가 인간의 편인지 바하무트의 편인지, 그녀를 잘 아는 입장에서 말해 보라는 뜻이다.
메마른 눈. 하지만 그 아래에는 승리에 대한 탐욕이 넘쳐난다. 리온은 필립이 베로니카를 또다시 미끼로 활용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럴 만도 했다.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토벌전의 경험은 필립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으리라.
사실 대답은 간단했다. 무장이 무색하리만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교황청 앞 계단에서 봤을 때부터, 리온은 베로니카가 그가 알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동화자는 위험합니다.”
죽 침묵을 지키던 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을 고했다.
모이는 시선. 불편한 존대. 예의 차려 말하는 건 오랜만이다.
“등을 맡기기엔 불안한 상대입니다.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두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자는 신검을 몰랐다. 주변의 생명을 살해하고 주인까지 잡아먹는 그 게걸스러운 힘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변명 뒤에 숨은 진실이 다시는 그녀를 위험 앞에 세우지 않겠다는 결심이라 해도.
“곤란하게 됐군요. 성하께서는 ‘승리의 자리에 신의 검이 있으리라’는 오랜 기록을 인용하시며 적어도 신검 하나는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만.”
필립이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솨아아-.
빗소리가 커지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두 기사의 소리 없는 대치에 누구도 쉬이 끼어들지 못했다.
얼마 전에 폭주를 겪었던 리온은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더 밀어붙이면 목숨에 위험이 된다는 사실을 교황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간 규율을 몇 번이나 어겼든 리온은 부정할 여지 없이 교회의 충직한 종이었다. 그러니 교황의 말은 그가 아니라 동화자를 전장에 내보내라는 명령이었다.
“베르크 경.”
“제가 대신 나가겠습니다.”
필립이 교황의 뜻을 설명하려는 찰나, 리온이 말을 잘라 내며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든 신검이 전장에 있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번쩍, 그의 뜻에 동의하듯 방 안이 하얗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놀란 눈길이 쏟아지는 가운데 조용한 방에 우르릉, 하고 뒤늦은 천둥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
솨아아, 한차례 천둥 번개가 지나가자 장대비가 질세라 목청을 높였다. 비 오는 밤은 무섭도록 시끄럽다. 베로니카는 귀를 틀어막은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리온이 급하게 떠나간 직후 그녀는 안내를 따라 새 방으로 이동했다. 밖에는 리온을 대신해 십여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그녀를 지키고 서 있었다.
오스카가 잠시 들러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더라면 저녁은 아주아주 길었을 것이다. 오스카는 한나의 안부와 이재민의 구조, 구휼에 힘쓰는 카르트의 근황 따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괜찮을 것 같았다. 일주일의 기억은 사라졌어도 다친 데 하나 없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몰락한 탄비아는 어차피 아슬아슬하던 남쪽의 나라였다.
괜찮을 거야. 다 괜찮아.
그러나 저녁 식사를 끝내고 홀로 잠자리에 들자 불안은 다시금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눈만 감아도 새들의 날갯짓이 불길한 예감처럼 퍼덕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리온은 감시마저 내팽개치고 어디로 간 걸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이유가 단지 비가 싫어서라고 믿고 싶었다. 베로니카는 천둥 치는 날씨를 평생토록 싫어했다. 어린애 같아도 어쩔 수 없었다.
비바람 부는 밤이면 베이른의 바다는 이름 모를 괴수처럼 무섭게 포효했다. 아버지는 항상 집에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언제나 베로니카는 홀로 침대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고. 이불을 덮어쓰고 숨을 참고. 어린 베로니카는 참던 숨을 내뱉으면 괴수가 혼자 있는 자신을 눈치챌 거라고 믿었다. 그러면 비명이 먹히는 천둥소리에 맞춰, 집 문을 열고 들어올 거라고.
우르릉, 덜그럭.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로 파고든 건 그때였다. 씻어서 젖은 머리칼이 서늘하게 곤두섰다. 바깥의 병사가 막아서는 소리도 없었는데. 뭐지. 귀를 기울여도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불안감이 짙어졌다.
결국 참지 못한 베로니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곤 이불을 홱 열어젖혔다. 침대 바로 옆에는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놀란 비명이 터졌다. 서둘러 입을 막은 커다란 손이 아니었다면 소리는 한참 이어졌을 것이다.
“깨어 있을 줄 몰랐는데.”
당황했는지 리온이 인상을 가볍게 찌푸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베로니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손을 밀어내며 버럭 화를 냈다.
“왜 발소리도 안 내고 다가와요? 오해했잖아요.”
“아,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었어?”
그게 아니라 괴물인 줄 알았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그는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장난을 걸어올 것이다.
능청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 게 싫어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다시 마주치기 싫다고 했는데. 제 의견은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고집스레 고개를 돌리자 옆얼굴로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축축한 공기 속에서 먼저 화두를 던진 건 리온이었다.
“바하무트의 접근이 포착됐어. 당장 한두 시간 후면 방벽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거야.”
뜻밖의 이야기에 베로니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흘끗 눈동자를 굴리자 은색 갑옷이 어둠 속에서도 번득였다.
“그래서 무장을 갖추라고 말해 주러 온 건가요?”
“아니. 오늘은 쉬어.”
“그럼 왜 왔어요?”
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베로니카가 한 번 더 물어야 하나 고민할 때쯤 대답했다.
“신검에 대해 경고하려고.”
“경고요?”
“낮에 벌인 전투에선 한계까지 검을 휘두른 것 같더군. 저건 아무 대가 없이 힘을 안겨 주는 기적이 아냐. 베푼 만큼 생명력을 앗아 가는 무기지.”
생명을 앗아 간다고?
놀라서 귀가 트였다.
리온은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차근차근 주지시켰다. 이상하게 힘이 솟아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나 늘어난 검 실력은 그녀의 힘이 아니라는 것 등등. 주의가 빼앗긴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그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빗소리도 잊었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친 건 그 순간이었다. 리온이 뚝 설명을 멈추더니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홀린 듯 보다가 픽 웃고는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였다.
“아, 미안. 사실 다 핑곗거리야.”
“네?”
“나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어.”
귀를 의심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리 내어 웃던 리온이 그녀가 반했던 그 소년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네가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