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5)화 (75/128)

항상 생각한다.

이 남자의 눈은 올가미와 같다고.

빠져나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얽혀서 상처를 입는다.

“뭐가 미안해요?”

베로니카는 물었다. 리온은 대답이 수백 개는 되는 질문을 받은 표정이었다. 살이 조금 빠졌는지 원래도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턱선은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구하지 못해서.”

리온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토록 말을 고르던 것치곤 간결한 대답에 베로니카는 가만히 그의 말을 되새김했다.

구하지 못해서.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나는 지금도 살아 있어요.”

“그래, 신께 감사할 일이지.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리온은 입매를 비틀어 올렸지만 음성은 바닥없이 가라앉았다. 음울하고 축축한 눈빛은 평소 모든 일에 태연하던 그답지 않았다. 대뜸 사과하는 것도, 이런 식의 진지한 태도도.

시선이 톱니처럼 맞물렸다. 리온은 당장 사라질 뭔가를 보듯 눈을 떼지 못하다가 손수건을 검 손잡이에 묶었다.

저렇게 너덜너덜해졌는데도 간직하려고 하는구나.

아포칼립시스에 새삼스럽게 눈이 가닿은 건 그 순간이었다. 여태껏 같이 여행 다니며 한 번도 눈길 줘 본 적 없는 검은 오늘따라 번득이는 위협처럼 보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걸 부수고 싶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후회했어.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거든.”

혼자라면 검에 손을 뻗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가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동화자가 어떻게 되는지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

“…….”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끌고 와서, 네 감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상처 주고 아프게 해서 미안해.”

베로니카는 멍하니 굳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답지 않다는 말은 취소다.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그다웠다. 뒤늦은 사과, 그럼에도 당당하게 용서를 구하는 말. 정말이지 리온 베르크답다. 그는 항상 그녀를 뻔뻔하게 헤집었다. 조금이라도 정리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물론 이제 그런 식으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찾아보면 길은 있겠지. 동화를 끊어 낼 방법을 찾으면 돼.”

리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그런 방법 같은 건 3년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버릇처럼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손톱이 박혀서 아플 정도로. 차라리 피가 맺힐 정도로.

리온의 시선이 흘긋 떨어진 건 그때였다. 그가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마디가 굵고 거친 손을 얹었다. 베로니카는 익숙한 온기를 느끼고 움찔했다. 손끝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은 머리보다 정직한 대신 적응이 느려서, 그를 좋아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입술을 잘근 씹자 리온이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을 긴장시키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계속 생각했는데.”

베로니카는 동요하는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났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어차피 마지막이 오면 같은 선택을 할 사람이다. 굳이 빈정거리거나 분노를 드러낼 필요도 없다.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땐 내 죽음을 바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래요?”

과거를 떠올리는 말에 남자의 수려한 입매가 굳었다. 그도 그녀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뻗은 손이 마침내 그에게 닿았던 찰나, 노을 지던 구원의 순간을.

비참했다. 불쌍한 기억이었다. 티가 났는지 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슬픈 건 자신인데 그가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당신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원하는 게 뭔지 솔직하게 말해요. 나한테 새로 바라는 거라도 생겼어요?”

베로니카는 커다란 온기 아래 갇혀 있던 손을 빼내며 말했다. 그는 빠져나가는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눈을 다시 마주친 베로니카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인 탓이다.

“이런 걸 원해요?”

코끝이 닿을 듯 확 가까워졌다. 넓고 딱딱한 어깨를 잡아 상체를 지탱했다. 코끝에 스치는 서느런 체취에 서글퍼졌다.

그는 그녀와의 접촉만은 항상 좋아해 왔다. 역겹다고 말했어도 몸만은 어김없이 그녀에게 반응했다. 베로니카는 느리게 일렁이는 울대를 보며 제 예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막상 욕망을 풀어낼 상대가 옆에서 사라지니까 서운했던 것뿐이다. 그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뚫어지게 올려다보던 남자가 입을 연 건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네 용서를 원해.”

베로니카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마치 진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지만 용서를 원한다는 남자의 눈은 제 손으로 엎어 버린 관계를 후회하고 있었다.

전례만 없었다면 순진하게 믿어 버렸을 만큼.

“그래야 다루기 편할 테니까. 기껏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하루쯤 더 다정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하지만 이제는 속지 않는다.

“거짓말쟁이.”

당신에겐 조금의 기대도 품지 않으니까.

“안 믿어요.”

베로니카는 검게 가라앉는 눈동자를 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왜요? 사과하면 바로 받아 줄 줄 알았어요? 당신에겐 내가 그렇게 쉬워 보여요?”

거울처럼 그녀를 담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그렇게 거칠게 휘젓지 않아도 머릿속은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사라진 일주일의 시간, 갑자기 얻은 신검과 늘어난 전투 실력까지.

방을 나가려 걸음을 내딛자 뒤따라 일어난 리온이 팔을 잡았다. 얼마든지 뺄 수 있을 정도로 느슨했지만 베로니카는 불현듯 어떤 장면이 떠올라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약을 먹고 이성을 잃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입 맞추던 남자는 드레스 자락이 가슴 밑으로 끌려 내려간 이후론 다소 사나워졌다.

붙잡힌 손목, 달래는 듯한 소리. 가장 싫은 건 짓누르는 압박감에 달아오르던 자신의 몸이다.

이제 휘둘리는 건 싫어.

떠오르는 잔상을 쫓아내려다 생각보다 세차게 팔을 뿌리쳤다. 격렬한 거부에 놀란 남자는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리온은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팔을 내려뜨렸다. 왠지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나한테 마음대로 손대지 마요.”

상처, 상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감시도 오스카나, 아니면 다른 기사로 붙여 달라고 할 거예요. 산사태가 났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동요를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차분하게 굴려던 계획은 물 건너가고 목소리가 흔들거렸다. 한 발자국씩 뒷걸음질 칠 때였다.

“어려워.”

리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야 베로니카는 그게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번도 네가 쉬웠던 적 없어. 너무 어려워서 솔직하게 말하는 것 외에는 사죄할 방법을 모를 만큼.”

무뚝뚝하게 내뱉는 남자의 얼굴에는 드물게도 혼란이 담겨 있었다. 오직 곧게 뻗어 오는 시선만이 분명했다.

반칙이다. 그는 언제나 자존심 센 또래 남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직설적이었다. 어린애 같지만 어른스러운, 이런 식의 사과를 물리치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으며 쏘아붙였다.

“내가 알 바 아니에요.”

뒤돌아서 외면하려 했다. 그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진작에 그를 뿌리쳤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로 한걸음 내디딘 순간 와장창 창문이 깨지더니 무언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바닥을 구르는 생물을 향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장거리 전서조였다.

“무슨….”

중얼거림은 사납게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커다란 매는 천적에 쫓기기라도 하듯 난동을 부렸다. 도망치다가 잘못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안이 벙벙하게 서 있는데 먼저 침착함을 되찾은 리온이 난리 치는 새의 발에서 서신을 풀었다.

그대로 나가지 않은 건 어째서였을까. 미친 듯 퍼덕거리는 새가 가져온 소식이 궁금해서? 아니면 다시 눈을 떴을 때부터 먹구름 끼어 있던 하늘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본능이 뭔가를 직감했다. 다가올 태풍, 또는 그 비슷한 것.

베로니카는 뭔가에 홀린 듯 유리가 부서진 창가로 다가섰다. 인파로 꽉 찬 광장이 보였다. 아이들이 까르르 뛰어다니던 분수대 앞은 피난민의 수용 장소로 변해 있었다. 천막과 담요가 발 디딜 틈 없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지저분한 사람들이 앉아서 뭔가를 먹었다.

옛날에 평화롭게 빵 부스러기나 쪼던 흰 비둘기들은 사람들 사이를 눈치 없이 구구구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했다.

“탄비아의 수도 레니체 함락. 교회법의 3조 1항에 의거 지원군 요청.”

그때 편지를 읽는 리온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탄비아가 바하무트에게 완전히 함락당했다고? 분명 마지막으로 봤던 환상에선 열심히 싸우고 있었는데. 멍한 생각 사이로 우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질에도 아랑곳 않던 비둘기들이 화드득 날아간 건 그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낙뢰가 무서워서라고 생각했지만 베로니카는 곧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또 한 마리의 매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대성전으로 날아들었다. 각국의 소식은 율법상 대성전에 가장 먼저 전해야 했으므로 피난민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엔 카르트에서 평생을 산 사람조차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엄마!!! 저기 봐! 새가 또 와! 엄청 많아!!!”

찢어지는 아이의 외침이 유독 크게 위층까지 와닿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늘 끝의 점을 향했다. 커지는 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이의 외침이 신의 부름이라도 된 것처럼 십여 마리가 넘는 새 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마치 신이 어느 쪽을 향해 눈을 뜰지 결정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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