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있던 기간이다. 망자를 보내는 애도의 마지막 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일 전, 리온은 바하무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여자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리고 그녀를 잡아먹은 바하무트는,
“뭘 들고 있었다고?”
리온이 질문했다. 하인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여러 번 말했잖나. 동화자는 헤네시스를 들고 나타났네. 그런 검이 하나 더 있을 턱이 없지. 젠장맞을, 세 자루였다면 나도 하나쯤 욕심냈을 거라고.”
“위조품일 가능성도 있을 텐데.”
“진심인가? 신검에 새겨진 사자의 갈기 개수까지 아는 내가 가품도 구별해 내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건가?”
“갈기가 몇 갠데?”
“열여섯.”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픽 웃은 리온은 갑옷을 걸치고 검대를 찼다. 장기는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일주일간의 재생 덕분에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았다. 한구석에서 지켜보는 오스카는 상황을 따라가느라 벅찬 표정이었다.
“이게 다 무슨 얘깁니까? 분명히 슈바르츠발트 양은 죽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래서 무장을 하고 있잖아.”
리온은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죽은 인간이 바하무트가 들고 있던 검을 들고 나타났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런 존재가 인간일 확률이 얼마나 되지?”
“…바하무트가 그녀의 모습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스카가 역겨움으로 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검을 꽂던 리온의 손길이 잠시 굳었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굳이 먹은 인간을 토해 내서 검까지 들려 보냈다는 생각보단 합리적이야. 실제로 대륙 남부에서는 먹는 행위를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의식이라 믿지. 바하무트가 남부의 풍습을 익혔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오스카가 반론 제기를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하인스가 한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아냐, 다른 건 몰라도 동화자는 인간일 걸세. 이건 직접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 볼 생각이었네만…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녀는 바하무트 떼를 죽였다고.”
뜻밖의 이야기에 리온의 눈가에 흥미가 스쳤다. 묻는 듯한 시선을 던지자 하인스가 설명을 이었다.
“방벽으로의 피난민 행렬 앞에 갑자기 바하무트 떼가 나타났던 모양이야. 자네가 날뛴 이후론 잠잠했으니 지키던 기사의 수는 많지 않았네. 애써 봤겠지만 워낙 수가 적다 보니 오래 버티지 못했고… 피해가 시민들에게 확산되려는 찰나에 여자가 등장해 괴물들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더군. 신의 기적처럼 보이는 솜씨로 말이야.”
예상도 못 한 전개에 리온도 오스카도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바하무트가 바하무트를 학살하는 전례는 본 적이 없다.
“직접 만나 보는 게 빠르겠군.”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세 사람은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리온이 불쑥 질문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피난민의 숫자는? 많았나?”
“많은 정도가 아니야. 머지않아 카르트 내에 그녀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질 걸세.”
가냘픈 여자가 기사들도 막지 못한 바하무트를 도륙했다. 편견은 대비될 때 더욱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녀는 편지에서 자신이 서사시의 주인공은 될 수 없을 거라 말했지만, 이제는 또 모르는 일이다. 평민 출신의 동화자는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온은 무심코 자신이 그것을 바라고 있음을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기대해선 안 된다. 이 모두는 영리한 바하무트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또는 동화자 자체가 제3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리온은 실망을 대비한 채 성큼성큼 교황청의 입구로 걸어갔다.
열을 맞춰 올라오던 기사들과 맞닥뜨린 건 내려가는 흰 계단에서였다. 하인스에게 곧장 경례를 붙인 기사들이 물러나자 흰 갑옷과 대비되는 검은 빛이 설핏 시야로 흘러들었다. 아름다운 밤의 파편에 리온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계단만 보고 있던 여자도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리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위와 아래서 각자 서로의 시선에 붙들렸다.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 벌어지는 입술.
마침내 그녀와 마주 본 순간 그는 버석,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심연이 까맣게 부서져 흩어졌다. 뜨거운 불꽃에 녹은 파편은 발치에서 녹아 아늑한 늪을 만들었다.
베로니카 슈바르츠발트.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던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
“기억이 안 나요.”
베로니카는 힘주어 말했다. 같은 말을 스무 번쯤 반복한 것 같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마지막 기억은 베르크 경과 함께 그것들을 유인하던 때였어요. 검을 휘두르다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했고, 거기서 의식은 끊어졌어요. 그 이후로 다시 눈을 떴을 땐 원래의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고요. 손에는 오스카의 검 대신 신검이 들려 있었어요.”
“의식이 끊어지기 전에 봤던 환상을 다시 묘사해 보십시오.”
필립이 건조하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베로니카는 입이 아프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반가움을 만면에 드러냈던 오스카를 제외하면 모두가 그녀를 괴물 보듯 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오스카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죽었다고 보고했다는 리온을 흘긋 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바뀌지 않아요. 저는 저를 봤어요. 시야 닿는 데까지 제가 빽빽하게 차 있어서 비명을 지르다가 같이 녹아내렸어요. 그 후로는 기억이 없어요. 검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가져가셔도 좋아요. 원래 제 것도 아닌걸요.”
지쳐서 내뱉은 말이었는데 검 이야기에 기사들의 시선은 한층 차갑게 얼어붙었다. 필립은 한참 간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려고 해도 회수할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가져갈 수 없다고? 왜?
베로니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검은 교회의 보물이 아닌가.
“왜죠?”
“이 검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주인이 있는 신검은 다른 사람의 손에선 식칼 정도의 기능만 겨우 수행할 뿐입니다.”
“양도도 못 하나요?”
“당신이 죽으면 새 주인을 고르긴 할 겁니다. 다시 말해 이번 일로 메클렌부르크 경의 죽음이 증명된 셈이기도 합니다. 온 피난민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영웅의 죽음에 민심이 술렁이리란 뜻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귀에는 온 피난민이 그녀를 목격했으니 쉽게 죽일 수도 없게 됐다는 아쉬움처럼 들렸다.
필립은 장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신검을 들게 된 이상 책임을 다하십시오. 성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까지 당신의 처분은 보류될 겁니다.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고, 피난민을 구한 공로도 인정하긴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동안 카르트의 수호를 위한 전투에는 반드시 참여하고 뭐라도 기억나는 게 있으면 즉시 보고하십시오. 당신의 보호 및 감시는 아포칼립시스를 소유한 베르크 경이 맡게 될 겁니다.”
더는 얻을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필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직한 걸음을 뗀 그는 아, 하고 고개만 돌려 덧붙였다.
“그리고 신성 기사단에는 그 검에 손끝 하나라도 대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수련한 이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흰 망토가 펄럭이며 사라졌다. 필립을 따라 나간 기사들의 말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드문드문 들려왔다.
“부단장님. 정말 저대로 내버려 두실 겁니까?”
“말세구먼, 어쩌다 신검 두 개가 다 기사단 밖으로 넘어갔는지….”
탁, 문이 닫혔다.
대의를 위해서인 척해도 시기는 숨길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탁자 위에 올려진 기다란 검을 바라보았다. 기사라면 누구나 탐낼 명검. 영문을 모르겠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메클렌부르크가 들었던 검인데, 그게 왜 제 손에 있었을까. 기억이 사라진 일주일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걸까. 옷도 몸도 깨끗하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사람들은 능력이 생기면 당연히 의무를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나간 줄 알았는데 방에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리온 베르크. 벽에 기대 서 있던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다시 마주친 순간 그랬던 것처럼.
“네. 놀랍게도 당신을 짓누르는 부담감의 무게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네요.”
베로니카는 으쓱하며 대답했다. 가벼운 몸짓에는 상대가 풍기는 어둡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상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놀랐다기엔 담긴 감정이 짙고 깊었다. 길 잃은 소년이 집을 생각하는 눈빛 같았다.
리온은 베로니카가 바하무트에게 먹히는 걸 봤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죽음을 어느 정도 확신한 셈이다. 도축하기 위해 키운 가축이 살아 돌아온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쓸모에 대한 안도? 아니면 제가 키우던 동물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
그들은 눈싸움을 하듯 한참 동안 서로를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죽길 바랐는데 아니라서 아쉬워요?”
마침내 먼저 입을 연 건 베로니카였다.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그 뚜렷한 동요에 놀라기도 전에 리온이 몸을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
걸음을 뗀 그는 그녀가 앉은 의자로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베로니카의 발목으로 향했다. 헤어지기 전, 한나의 집에서 발목을 고정시켜 준 손수건을 푸는 것 같았다.
밝은 데서 보니 낯이 익은데. 아, 황녀가 무운을 빌며 건넨 손수건인가. 그런데 왜 끄트머리가 그슬렸지?
의아해하던 순간 천을 풀어낸 리온이 가만히 시선을 들었다. 상체를 기울이고 있던 탓에 그가 고개를 들자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길쭉한 눈매와 곧게 뻗은 콧날의 윤곽이 닿을 듯 뚜렷했다. 짙고 부드러운 향기. 그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