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3)화 (73/128)

붕괴한 블라센의 깊은 골짜기, 이름 모를 굴.

아가미가 달린 생물이 어기적거리며 검은 굴 안으로 들어간다. 인간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거대한 몸을 구부려 네발로 기는 형상이다. 그것은 어둠을 한창 헤치다가, 빛이 한 줄기 들어오는 지점에 멈춰서 구역질을 시작한다. 욱, 욱, 성대가 아니라 내장과 식도가 꿀렁이며 내는 소리다.

욱, 욱. 한참 간의 시도 끝에 질척한 침과 함께 여자 하나가 튀어나온다. 검은 머리에 하얀 얼굴. 여자가 콜록거리며 신음한다. 귀가 없는 바하무트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러나 뒤척이는 몸짓을 보고 만족한다. 그것은 마침내 신을 훔쳤음을 안다.

***

어릴 적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다.

“베니. 너는 꿈꾸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단다. 세상에 너처럼 특별한 아이는 없다는 걸 꼭 기억하렴.”

정말로? 그럼 내 친구들은? 걔네는 평범해?

“아니, 친구들도 특별하지. 으음, 세상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대로 특별하고 소중한 거야.”

뭐야, 그게 무슨 특별이야. 엄마는 특별의 뜻도 모르지?

귀엽고 건방진 아이의 말에 엄마는 웃었을까, 아니면 더 설명하려고 들었을까.

어느 쪽이든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감을 채워 주기 위한 주문이었다는 걸 안다.

특별해. 소중해. 너는 너 자체로 아름다워.

하지만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밝은 별과 어두운 별로 나뉘지 않던가. 우리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세상은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특별하다.

우리는 위층에 있는 사람을 동경하고 질투하는 동시에 아래층에 있는 사람을 동정하고 무시한다. 쟤보단 낫다고 비교하면서 위안 삼고 행복해한다.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나’는 아니다. ‘내’ 일처럼 기뻐해 주는 건 불가능하다.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낀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아는 인간의 비극이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도달해야 위층에서 보는 세상이 궁금하지도, 그 세상이 별거 아니라고 깎아내릴 일도 없을까? 같은 층에 사는 친구만을 사귀고, 마음이 힘들어 억지로 아래를 내려다볼 필요도 없어질까?

차라리 모두 같았다면 좋을 텐데. 차라리 다 같이 탑의 꼭대기 층에 있었더라면.

그럼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목소리가 대답하는 순간 일렬로 나열된 탑들이 기우뚱, 기울더니 바닥으로 넘어져 버렸다. 모두가 꼭대기 층에 살던 탑에서는 아무도 탈출하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눈을 떴다.

“아….”

배가 묵직하게 아려 왔다. 혹시 상처를 입었나 더듬어 보려던 그녀는 팔을 들다 멈칫했다.

두근, 두근.

눈앞에 커다란 눈이 있었다. 숨을 멈춘 베로니카는 팔을 베고 옆으로 누운 생명체를 마주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똑같은 자세. 좌우 반전만 되었을 뿐 손끝 하나 다르지 않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것은 털이 하나도 없다는 점, 귀 대신 아가미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제법 인간을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징그러웠다.

“…….”

베로니카는 예민한 짐승을 대하듯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배를 매만지자 바하무트는 똑같이 손을 들어 그녀의 행동을 따라 했다.

피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손바닥을 확인하는 그녀처럼 바하무트도 제 손바닥을 확인했다. 그로테스크해서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완전히 동화되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얼굴을, 영혼을 줘.

그들은 개개의 자아를 얻기 원한다. 달라지기 원한다. 숨통을 조르는 긴장 끝에 베로니카는 용기 내어 심호흡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지 알아. 너희의 생각은 전부 읽었어.”

간신히 운을 뗀 목소리가 동굴에 왕왕 울렸다. 베로니카는 똑바로 보기 무서워서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너희는 내 머리에 ‘신’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아마 블라센 산에서 행동을 통제당했을 때 확신했을 거야.”

베로니카는 그것이 리온이 아니라 메클렌부르크를 노리도록 만들었다. 다른 인간들은 이루지 못한 완전한 동화를 머리가 터지지 않고 해냈다. 성력 없는 생존, 대기를 다루는 능력, 눈꺼풀 속의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하며 마음대로 바하무트의 시야를 통제했다.

전부 그녀 안에 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믿을 수 없게도. 하지만 추측해 온 일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가능하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진리 앞에 논리를 들이미는 격이었다.

“이 땅의 생물들처럼 되기를 원하는 거야?”

베로니카는 슬프게 질문했다. 공기 중엔 그녀도 잘 아는 바다 비린내가 감돌았다. 세상 밖에서 온 미지의 생물. 바다에 적응하고 땅으로 올라와 하늘의 신을 찾는 바하무트.

그것은 진정 어린 시절의 베로니카가 찾던 특별한 존재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 베로니카는 왜인지 그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가족과 친구를 죽인 원수인데도 가여운 마음이 든다. 외롭고 외롭고 외로운 생물이, 이 세상과 연결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식인 식(食)을 통해서, 하지만.

“난 널 도울 수 없어. 미안해.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모를뿐더러 내 안에 뭐가 잠들어 있든 나는 인간이야. 신 같은 건 몰라. 나는 나일 뿐이야.”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알아듣지 못한 걸까. 그것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 징그러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힐끔거리던 베로니카는 눈이 마주친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심연 같은 검은 동공과 불길 같은 붉은 홍채. 그것의 맥박.

두근, 두근, 두근.

한밤중에 타오르는 모닥불을 볼 때처럼 멍해졌다. 베로니카는 시간이 흐르는 감각도 잊은 채 정신없이 아름다운 불꽃 속에 빠져들었다. 부나방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길 때와 같은 안정이 피어올랐다. 얼마 만이지, 이렇게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이 풀어지는 게.

원래 속한 자리에 돌아온 듯 편안했다.

호흡과 맥박이 일치하자 긴장과 경계가 점차 자취를 감췄다. 햇빛이 비치던 동굴이 붉게 물들고 처음 동화될 때처럼 눈앞에 주마등이 스쳤다. 주로 베이른이 무너지고부터 겪었던 고난들이었다. 목에 칼을 들이밀던 리온, 보내 주지 않으려 하던 여관 투숙객들, 광야의 강도, 그녀를 인간 취급 안 하던 교황, 흐리멍덩한 황제, 잔인한 황녀.

베로니카는 마음 한구석의 불안, 그러니까 리온과는 어떻게 헤어진 것이며 한나와 오스카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하는 의문들을 잊어버렸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추악한 인간의 종말.

주위를 훑던 눈이 햇빛 비치는 구석에서 정지했다. 자루에 사자가 그려진 신검, 메클렌부르크의 유품이다.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보검은 마치 잡아 달라는 것처럼 반짝였다. 베로니카는 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저도 모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뻗었다.

***

“통째로 먹혔다니… 지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얗게 질린 오스카에게 리온은 더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자신과 한나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찾아왔다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죽었다니. 하, 무슨 말이라도 더 해보십시오. 앞뒤 상황이라든가….”

“바하무트에게 먹혀서 죽었어. 그게 다야. 내가 아는 한 어떤 말도 더는 의미가 없어.”

리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말문이 막혔는지 멍한 표정을 짓던 오스카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검만 들려 보냈던 건 당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

“잔해 위에 남은 학살의 흔적을 봤습니다. 화려하더군요. 그토록 날뛰면서 여자 하나 구하지 못했단 겁니까? 그러고도 당신이 신의 사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눈이 시뻘게진 오스카는 흥분해서 다그치다 멈칫했다. 문득 일의 순서를 깨달은 것이다.

리온은 학살을 저지르고서도 그녀를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녀를 구하지 못해서 땅에 피를 칠했다.

“젠장, 젠장…!”

울분을 갈무리하지 못한 오스카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쭈그리고 앉았다.

“어째서… 신께서는 무구한 이들만을 그렇게….”

리온은 바짝 야윈 오스카의 검은 상복을 무감하게 응시했다. 가족의 죽음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 온 도시가 가족과 친구를 잃었다. 이러한 상실감은 당연한 것이다. 아주 당연한.

“슈바르츠발트 양의 감정은 알았습니까?”

상념을 뚫고 오스카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리온은 조용히 시선을 마주쳤다. 거기서 무엇을 읽었는지 그는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인합니다. 당신은.”

“좋아해요.”

여자와 오스카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리온은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검은 복도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자주 당신을 찾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서 계속 기다렸어요.”

“그런데도 끝까지 보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직접 찾아갈 때까지 말입니다.”

가시 돋친 말에 리온은 아무런 변명도 내놓지 않았다. 오스카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오만을 부린 덕에 그는 지금 공허의 바다에 홀로 가라앉고 있었다. 불꽃 한 송이 없이.

리온은 문득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베이른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는 신까지 배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배반하고야 말 것이다. 그날 구원을 얻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였기 때문이다.

“이봐, 심각한 분위기에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말이야. 봐야 할 게 좀 있는데.”

열린 문으로 하인스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귀족답지 않은 성마른 태도에 리온은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차갑고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하인스는 두 쌍의 눈길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동화자를 찾았어. 그 여자가 맞는지 확인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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