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2)화 (72/128)

광야로의 이주, 여자의 마지막 소원.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래도 어려웠을 바람은 황녀가 훼방 놓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리온은 피로에 휩싸여 앞으로 카르트에 일어날 전쟁과 혼란을 예상했다. 눈은 어둠이 내리는 창밖을 향했다. 본다기보다 그저 눈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리온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강제로 재생하는 신체만 고문당하는 것처럼 경직과 이완을 반복하며 아직 살아 있음을 주장했다.

바깥에서는 울부짖는 절규와 사제의 기도 소리가 한창이었다. 묘지에서 드리는 축성 기도가 분명했다.

율법에 따르면 영혼이 남아 있는 시체는 죽은 지 하루 안에 땅에 묻히거나 불태워져야 한다.

시체를 모두 수습해야 했다면 곤란했겠지만,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시체는 이미 바위 더미에 깔려서 자연스럽게 땅에 묻힌 상태였다. 축성 기도를 받은 유가족은 이제 7일간의 애도 기간을 가질 것이다. 7일. 길어 보여도 소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기엔 짧은 기간이다.

비극적인 풍경은 그에게 익숙했다. 막 기사가 되어 전장에서 구를 때는 눈이 닿는 곳마다 죽음이 있었다. 직접 장례를 주관한 경험도 수두룩했다. 그런데도 오늘은 애도의 소리가 못 견디게 시끄러웠다.

그는 땅에 묻히지도, 태워지지도 못한 여자를 떠올렸다.

짐승처럼 먹혀 버린 여자. 그 여자는 누가 애도하지?

그가 알기로 베로니카에게는 남은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베이른은 불탔고 카르트는 무너졌다.

남은 사람이라곤 아마 그를 제외하면 생사 불분명한 오스카와 한나라는 여자뿐이다.

한 인간이 죽었는데 아무도 모른다. 알릴 사람도 없다. 더없이 고독하고 쓸쓸했다. 밝고 눈부신 여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똑똑, 그때 사념을 깨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저녁 식사를 가져온 수녀라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끼이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대답 없는 방의 주인이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리온은 상대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이 방을 나간 요한나의 시녀였다.

“아, 그게, 저기.”

“무슨 용건입니까?”

말이 길어지지 않게 잘라 물었다. 시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우물쭈물했다.

“방이 비어 있으면 그냥 두고 가려고 했는데….”

가만 보니 뭔가를 들고 있었다. 리온의 시선이 손으로 내려가자 드디어 그녀가 결심한 듯이 빠르게 말했다.

“동화자가 남기고 간 물건이에요. 침실을 관리하던 하녀가 발견했어요.”

동화자. 침묵하던 리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요한나의 함정이라는 의심을 읽었는지 시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당연히 황녀 전하께 갖다 드리려고 했지만, 살펴본 내용물이 편지인 데다 받는 이도 정확히 적혀 있었거든요.”

들을수록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요한나가 알면 길길이 날뛸 것이다. 충성스러운 개가 주인을 앞에 두고 생판 남에게 가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격이었다. 리온은 물끄러미 시녀를 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그게 동화자가 남긴 물건이라고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증명할 도리는 없지만, 그게.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까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짐작하시다시피 요한나 전하께서는 동화자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고….”

시녀는 난장판이 된 카르트의 풍경을 넘겨다보다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을 마쳤다.

“단지 명령이라 해도 저 또한 그 일에 동참했으니 뉘우치고 회개하고 싶습니다. 어제 마지막 날이 가까웠다는 성전의 구절을 우연히 접하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드디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에게도 죽음이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회개가 늦다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리온은 알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 예의로 알려 주십시오.”

시녀는 귀족답지 않게 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요한나의 아래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처럼 보였다. 고요한 분노를 감지하는 본능. 그녀는 왜인지 창백해져 고개를 젓고는 편지만을 내밀었다.

리온은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는 베로니카가 황궁에 들어간 뒤의 일은 잘 몰랐다.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을 봤던 게 전부다. 교황청에서와 같은 일을 황궁에 가서도 겪었던가.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결국 황녀를 알게 한 사람은 리온이었다. 그녀의 고난은 전부 그에게서 시작했다.

편지를 받아들자 시녀는 고개를 까딱하곤 발 빠르게 돌아섰다. 붙잡혀 다시 추궁당할까 겁나는 눈치였다. 무심하게 닫히는 문을 보던 리온은 느리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베로니카가 편지를 남겼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구겨진 양피지를 펼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친애하지 않는 리온 베르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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