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요, 동백꽃은 세 번 핀대요.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서 한 번, 그리고 낙화를 본 사람의 마음에서 한 번. 꽃송이가 온전하게 떨어져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아, 그런데 나는 동백꽃이 불쌍해요. 목이 통째로 뜯기고도 나무에게서 버려진 줄 모르고 피어나잖아요. 왜 웃어요? 또 어린애 취급하려고 그러죠? 하지만 정말인걸요. 나는 그들의 죽음이 가여워요.
***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고급 장식재로 마감된 천장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던 리온은 방벽 너머로 왔음을 상기했다.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군대가 세운 방벽까지 도달한 건, 인근의 바하무트를 모두 쓸어 버리고도 한참 후였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가 저지른 일을 보고했다. 경악하는 신성 기사단에 부상의 치료를 요구했다. 가만둬도 자연 치유는 되겠지만 뼈를 맞추고 고정하는 편이 역시 효율적이었다. 희생을 미덕으로 치는 교회는 너그럽게도 그에게 침상을 제공했다.
죽을 것처럼 피로한데도 고통은 의식을 놓아주지 않았다. 리온은 치료를 받으며 카르트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예상대로 교황과 황제는 산사태가 시작된 즉시 카르트 북부를 버렸다고 했다. 방벽은 건물의 잔해로 급조된 것으로, 중앙의 황궁과 교황청을 수평으로 이어 카르트의 절반을 수호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구조 작업이라면 착착 진행되고 있어. 카르트를 다스리는 세력이 교회와 황궁뿐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지.”
리온을 찾아온 하인스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그의 윤기 사라진 눈동자가 이재민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절망에 빠진 건 맞았지만 이유는 틀렸다. 리온은 재해의 수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오로지 여자만을 생각했다. 구하지 못한 여자. 얼어붙은 노을 속에 박제된 여자.
황혼의 기억과 종소리의 환청이 들리자 리온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카르트를 다스리는 세력이라, 귀족들 말하는 건가?”
“그래. 성도의 귀족 중에는 부패보다 의무를 먼저 배운 자들이 적지 않네. 칼텐제 후작가와 비텔스바흐 백작가를 포함해 겨울 강 이남의 귀족 대다수가 이재민에게 기꺼이 창고를 열고 구휼에 앞장서고 있어.”
하인스는 당당한 귀족의 얼굴로 선행을 말했다.
하긴, 이 기름진 땅이 고작 두 명의 인간에게 달려 있었다면 카이젠미어는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리온은 바하무트의 침입을 대비하며 만났던 여러 믿음직한 귀족과 기사들을 떠올렸다.
인간은 약할지 몰라도 인류는 강하다. 어느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혼자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야기는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혼자서 끝내는 비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인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자네의 공로가 제일 커. 수습 중인 현장에 바하무트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더군. 정말이지 훌륭한 솜씨야, 그런 식의 학살은… 지금 병사들 사이에서 자네의 명성은….”
창밖을 보며 하인스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반쯤 무너져 내린 블라센과 처참한 시내의 모습은 살풍경 그 자체였다.
바하무트는 공포를 모른다. 그러니 잔해를 뒤지던 그들이 모조리 빠져나갔다면 그건 리온이 아니라 베로니카의 공로일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그녀를 찾고 있었다. 머릿속을 엿보는 동화자가 위험하다고 여겼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리온은 제가 떠올린 가정을 거침없이 묵살했다. 신이 인간에게 깃들었다는 기록은 대륙 어느 수도원에서도 보거나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무튼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네. 혹시 뭐 또 궁금하거나 알고 싶은 점은 없나?”
“오스카 베르크의 신변에 대해 듣고 싶은데.”
리온은 의무처럼 운을 뗐다. 물론 오스카나 한나라는 여자의 안위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베로니카라면 알고 싶어 할 문제였다.
“오스카 베르크?”
하인스는 순간 그게 누구냐는 표정을 지었다가 아, 하며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글쎄, 워낙 피난민들이 몰리고 있어서 성하의 근위대 사정까지는 잘 모르겠군. 방벽을 넘어왔는지 알아보겠네.”
“처리할 일도 많을 텐데 이제 가보지 그래.”
하인스는 리온이 대화할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침대맡에 기대앉은 그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을 방해했군. 아, 혼자 누울 수 있나?”
“왜, 같이 눕게?”
“…….”
“나가. 노인네 취급은 사양이야.”
농담 후 픽 웃은 리온은 회복을 강요하는 몇 마디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방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 리온은 숨을 멈추어 고요함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귓가에는 뼈가 붙고 내장의 근육이 회복되는 소리가 벌레 소리처럼 갉작거렸다. 느리게 참았던 숨을 토한 그는 멀쩡한 손을 들어 눈가를 지그시 덮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생각은 다시금 여자에게로 기울었다. 힘없이 흔들리던 목과 점막 속으로 사라지던 얼굴의 반복, 또 반복. 살 수 있었던 수십 가지의 경우를 떠올리고 검토한다. 의미 없는 짓이다. 구하지 못했다. 그의 신념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감정 한 방울 털어놓지 못한 후회가 목을 졸랐다. 입을 다물고 있던 데 대한 벌이라도 받듯 숨이 막혔다.
하다못해 이런 자신을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어야 했다.
눈만 감아도 여관방 앞에서 맨발로 기다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겁도 없이 그에게 부딪혀 왔다. 있는 힘을 다해. 몇 번이고.
뎅, 뎅, 뎅. 가까운 종탑에서 방벽의 개폐를 알리는 종이 울었다. 또 한 무리의 피난민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소리는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라고 했던가. 종소리가 그의 기억을 활짝 열어젖혔다. 검을 처음으로 배우던 여자의 기억, 갑옷을 선물 받고 기쁘게 웃던 얼굴, 그리고.
같이 지내던 짧고도 긴 시간이 심장에 파편처럼 박혔다. 깜깜한 새벽녘의 배웅과 황혼이 지나간 자리의 마중이 생각났다. 그것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낀 관심의 온기였다. 이제야 알았다. 그녀는 가족을 모르는 그에게 가족이 되어 주려고 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은 숨을 나누면서.
그 따뜻함이 기꺼워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다. 제 살이 익는 줄도 모르고, 온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내내 착각했다.
“그렇게 많이 아파요?”
리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침대 옆에 앉은 베로니카가 보였다. 불가능한 일이다. 알면서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로 손을 뻗어 왔다. 떠나지 못하게 손목을 붙잡은 순간,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한 매혹적인 얼굴은 금발에 푸른 눈의 황녀로 바뀌었다. 리온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놓았다.
“눈물 한 방울 모르는 사나운 얼굴로 울고 있으니까 보기 좋네요.”
요한나는 민망한 기색도 없이 생글거렸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리온을 만족스럽게 훑어보았다.
“이 정도로 힘들어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와 볼 걸 그랬군요.”
리온은 무표정으로 돌아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상의 한복판치곤 지나치게 밝은 얼굴이다. 그녀는 마치 카르트가 무너지기를 일찍이 바랐던 인간처럼 굴었다. 비틀린 인성과 엇나간 가학성.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베로니카를 인질로 삼았기에 모르는 척 비위를 맞춰 줬을 뿐. 하지만 카르트는 무너졌고, 그녀의 눈치를 볼 시기는 지났다.
“저보다는 폐하께 가서 위로를 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계승권을 갖지 못하는 황녀는 값비싼 무역 수단이다. 그러나 혼기가 차고도 넘치는 요한나 황녀는 서른이 되도록 황궁을 떠나지 않았다. 이유는 여자가 귀한 카이젠미어 황가에서 고명딸을 아껴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어려운 때에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밤낮으로 ‘총애’를 받은 대가 아니겠습니까.”
요한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은밀한 비밀을 들킨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리온은 입술 끝을 치켜올렸다. 이런 게 고귀한 푸른 피의 진짜 얼굴이었다. 교황과 기사단장은 사생아를 성전에서 키웠고 신실한 황제는 추악한 죄를 범했다.
“감히….”
금기된 과실에 손댔으니 과연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고이면 썩는다. 카르트에는 너무 많은 풍요가 너무 오래 고여 있었다.
“죽이고 싶으십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필요하면 제 검을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리온은 부들부들 떠는 주먹을 보며 태연하게 부추겼다. 황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갑자기 뭔가를 눈치챈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당당한가 했더니, 죽었구나?”
“…….”
“아쉬워. 그년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었어야 했는데.”
이번에 굳은 쪽은 리온이었다. 황녀는 그간의 온화하고 다정한 얼굴이 믿기지 않을 만큼 광기 어린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말이야, 베르크 경, 그 여자의 마지막 소원이 뭐였는지 알고 있어?”
입술이 가까워지자 짙은 장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여자의 새파란 눈이 한계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광야로의 이주. 그걸 황제 폐하의 귀에 속삭여 달라고 내게 부탁하더라고.”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요한나는 더는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커진 눈은 미친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분명히 경고했어. 그때 그 문을 열고 나간 걸 후회하게 될 거라고.”
승리로 부패된 입술이 마지막 말을 고했다.
“카이젠미어는 여기서 끝날 거야. 이 나라는 더 일찍 무너졌어야 했어.”
홱 허리를 세운 황녀의 얼굴은 다시 평소와 같은 빛깔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고 인사했다.
“그럼, 베르크 경의 쾌차를 기원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신께 간구하는 일밖에는 없으니 성전에 나아가 기도부터 드려야겠어요.”
돌아선 황녀는 우아하고 징그러운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시녀는 리온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황녀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파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