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70)화 (70/128)

최초의 바하무트.

숨 막히는 고요가 흘렀다. 리온은 시선을 내려 그것의 손을 바라봤다.

예상대로 아포칼립시스와 똑같이 생긴 검이 눈부신 광휘를 발했다. 두 개의 신검 중 하나인 헤네시스다. 성벽의 경계를 부순 것도 아마 저 검이리라.

“하.”

리온은 서늘하게 웃었다. 입술을 늘이고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앉은 그의 앞까지 고개를 기울인 바하무트에게 기꺼이 눈을 맞췄다. 교회에서의 재회라니, 누군가 설계한 장난 같다.

교회의 붉은 융단 위, 리온은 여자와 마귀 사이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벌써 세 번짼데 기억은 하나?”

머리통도 입도 달려 있었지만 바하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당초 기대도 안 했던 리온은 검을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하무트와 같은 검을 쥔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죽이러 갈 필요 없이 내려와 줘서 고맙게 됐군.”

두 개의 신검.

맞대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메클렌부르크는 그의 친부이자 상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든 기회만 있다면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께서 누굴 더 사랑하시는지 궁금해지는군.”

신은 검 하나를 향해서만 자비의 눈을 뜨신다. 예로부터 결투가 신의 뜻이라 여겨진 이유였다.

캉, 불시에 휘두른 아포칼립시스가 쌍둥이 검과 부딪혀 날카롭게 울었다. 공기의 파동이 두 검을 중심으로 둥글게 뻗어 나갔다. 망토와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리고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요란하게 깨졌다.

리온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파지법부터 베기까지 검을 인간처럼 다룬다. 아니, 정확히는….

리온의 시선이 흘긋 뒤편에 누운 여자를 향했다. 동화의 영향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녀의 검술은 기본기에 충실했다. 조금만 복잡해져도, 군더더기 어린 동작에는 빈틈이 생긴다.

캉, 카강, 미친 듯이 부딪는 검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속도를 높였다. 몰아붙였다. 틈이 보였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날붙이를 강하게 쳐올리고 복부에 검끝을 꽂아 넣었다. 예상대로 바하무트는 피할 틈을 놓쳤다. 가죽을 뚫는 느낌이 선연하게 팔로 전해졌다.

“아, 읏….”

그 순간이었다. 여자가 작게 신음을 흘린 것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주 작았는데도 벽력처럼 크고 아프게 심장을 뒤흔들었다. 리온이 흠칫 몸을 굳힌 사이 붉은 눈동자가 도륵 아래를 향했다. 제기랄.

뒤늦게 복부에 박힌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깊이 박힌 날이 시간을 잡아먹었다. 굵고 징그러운 다리가 옆구리로 올라오는 순간 마침내 검이 뽑혀 나왔다. 세찬 격통과 함께 날아간 리온은 교회 장의자에 처박혔다.

“큭. 콜록.”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바닥에 사납게 뱉어냈다. 리온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역한 비린내와 익숙한 고통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티란의 모래사막처럼 보였다. 죽어 버린 동료들의 시체 대신 모래바람이 부는 사구 위에는 여자가 누워 있다.

교회에 바쳐지는 순결한 제물처럼.

눈을 감고 신음하는 여자를 보자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가 전투에 휘말리도록 둘 수는 없다. 거리를 둬야 한다.

아니, 그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바하무트가 죽으면 여자도 죽을 텐데. 죽 알면서 싸움에 임하지 않았던가.

“억울하면 해명해 봐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인 적 없다고. 최초의 바하무트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고.”

서러운 미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알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적을 위한 수단. 대의를 위한 희생. 하지만.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디딘 순간이었다.

복부에서 피를 주룩주룩 흘리던 바하무트가 돌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숭배하듯 높이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젖히고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리고….

심장이 멎었다. 사고가 정지했다. 리온은 뒤늦게 땅을 박찼다. 동시에 그때까지 잠잠하던 바하무트 떼가 난입해 쏟아졌다. 부서진 문과 깨진 창문으로 수백 마리가 강물처럼 범람했다. 리온은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거침없이 베어 냈다.

모든 세상이 색을 잃고 여자를 먹는 바하무트의 모습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직까지 목을 젖히고 있는 그것은 검까지 내려놓고 양손으로 여자를 눌러 넣고 있었다. 바하무트의 식사라면 수천 번은 더 봤다. 그러나 머리통을 뜯어 먹는 행위보다 통째로 욱여넣는 장면이 수천 배는 더 자극적이었다.

여자의 늘어뜨린 팔이, 흔들리는 얼굴이 분홍색 점막 속으로 짓눌려 사라졌다. 바하무트가 침을 삼키듯 목을 일렁이자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아가미가 뻐끔거렸다. 꿀꺽, 마침내 그것이 고개를 내린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버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완전히 돌아 버린 눈에서 날 선 광기가 번득였다. 망가뜨리고 싶다는 여자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망가진 채로 날뛰었다.

검을 횡으로 그을 때마다 수십 마리의 피가 튀었다. 붉고 진득한 핏물과 살점이 갑옷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정된 죽음조차 무섭지 않다는 듯 달려들었다. 앞뒤와 양옆으로 몰려왔다. 시야를 덮는 괴물 떼 사이에서 리온이 본 ‘그것’의 마지막 얼굴은, 찢어져 잇몸까지 드러난 입술과 이빨, 새빨갛게 뛰는 두 개의 눈동자.

죽어, 죽어, 죽어버려.

***

저벅, 그그극, 저벅. 그그극.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얀 바위 위로 핏자국이 찍혔다. 장검은 발자국 사이사이로 끌리는 소리를 냈고 팔은 늘어뜨려진 채 흔들거렸다.

팔은 처참하게 부러졌고 늑골도 몇 대쯤 나갔다. 자잘한 부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중 가장 끔찍한 것은 생명력을 끌어다 쓴 대가로 몸이 감당하고 있는 통증이었다. 내장이 녹고 뼈가 뭉개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리온은 제가 갖다 쓴 생명력을 가늠했다. 마흔까지는 살 거라 예상했는데, 아마 이런 식이면 앞으로 3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기침을 하자 피가 덩어리째 튀어나왔다. 리온은 몸을 굽히고 땅을 짚었다. 입가에서 피가 진득하게 늘어졌다 끊어졌다. 이 정도의 폭주는 티란 이후로 처음이다.

그가 떠나온 교회부터 그 인근까지 바하무트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구르고 있었다. 적어도 수백, 또는 그 이상. 그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잔혹한 몰살이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피로 얼룩진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졌다. 선명한 건 오로지 식사의 순간뿐. 리온은 바하무트가 들어오기 전으로 기억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또 되돌렸다. 여자를 안았어야 했다. 아니, 여자를 신경 쓰지 말고 도륙했어야 했다.

아니, 전부 틀렸다. 그냥 그녀를 데리고 도주를 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갈 수 있지? 광야? 바다?

처음부터 죽기로 되어 있었는데. 설마 평화로운 동행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었나? 감히 끝이 미뤄지기를 바랐나?

“하하.”

모순을 발견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린 리온은 뚝뚝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피는 고이고 고여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비치는 얼굴이 빨간 이유가 진득한 피가 엉겨 붙어서인지 단지 피 웅덩이가 붉기 때문인지 불확실했다.

여자가 죽었다. 눈앞에서 먹혔다.

이제 그를 위해 울어 줄 인간도, 좋아한다고 속삭일 존재도 없다. 작은 품에 그를 안은 채 괜찮다고 달래 줄 온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피 웅덩이 앞에 발 여러 개가 보여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티란에서 잃어버린 동료들이 어김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위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때 그의 생각에 반박하듯 몸속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역류했다. 리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여자의 목소리인 건 확실한데 시기를 특정할 수 없었다. 언제지. 언제 저런 말을 들었지.

“나는 가끔 누군가 그렇게 말해 줬으면 했어요. 괜찮다고, 살아남은 걸로도 충분하다고요.”

아, 그날이다. 황녀가 준 약을 먹고 여자와 맞닥뜨린 날.

끊어진 기억의 중간중간에 티란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털어놓은 게 분명했다. 오로지 싫어한다는 말만이 머리에 박혀 있는데, 여자는 모진 말을 뱉으면서도 그토록 다정하게 굴었던 모양이다. 그를 안고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세상 누구도 해 주지 않은 일을.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난 살고 싶었어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남아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어요. 나는, 난 다 끝나고 나면 당신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바보처럼.”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리온이 픽 웃으며 혼잣말했다. 웃을 때마다 치켜 올라간 입술 끝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떨어졌다.

“죽을 때까지 잊지 마요. 내 이름도. 나는 죽기 싫어했다는 사실도.”

여자는 그걸 복수랍시고 내뱉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온은 이름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나 필요하다. 그에게 그녀는 유일한 여자였다. 원죄와 구원은 같은 여자에게 붙은 다른 이름이었다. 리온은 여자의 붉은 눈을 닮은 핏속에서 마침내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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