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9)화 (69/128)

“한나와 아이를 위해서 기도할게요. 마음이 급해도 침착하게 움직여요. 돌 틈을 조심하고요.”

한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일부러 아이의 이름을 함께 언급하자 말라붙었던 한나의 눈가에 빛이 돌아왔다. 베로니카는 굳은 입가의 근육을 애써 올려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이려던 때였다.

“베로니카.”

하도 울어 꽉 잠긴 목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한나가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말했다.

“아까, 정말 고마웠어요.”

“…….”

“안아 줘서.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줘서.”

“…아니요. 별거 아닌걸요.”

“태어날 아이는,”

한나가 목이 메는지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남자아이면 펠릭스, 여자아이면 베로니카라고 지을까 해요.”

“…….”

“어느 쪽이든 행복한 삶을 살 테니까요.”

베로니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감동이라는 진부한 말로는 부족한, 뜨거운 격통이 가슴에 치받쳤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셀도르프에서 보았던 여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감사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 또한 아직은 없었다.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계획은 대충 들은 상태였다. 한나와 오스카는 그들이 나가고 주변이 안전해지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베로니카는 양손에 장검과 단검을 들고 있다는 신의 형상을 다시 떠올렸다. 신께서는 더 작고 약한 검을 향해 눈을 뜨신다. 만약 두 갈래로 갈라지는 무리 중 한쪽만 신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면, 한나와 오스카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꼭 다시 만나요.”

다짐하듯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리온이 먼저 돌을 밟고 올라가는 사이 베로니카는 고개를 젖혀 구멍 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공기가 서늘했다. 먼 동쪽에서부터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발목 때문에 속도가 느릴지도 몰라요. 미리 사과할게요.”

잡아 주려 팔을 뻗는 리온에게 말했다. 그가 그녀를 안듯이 당겨 올리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다 귀찮아지면 들쳐 업고 뛸 거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와요?”

“농담으로 들려?”

그녀를 바위에 내려 준 남자는 별다른 기미도 없이 곧바로 발검했다. 베로니카는 서걱, 코앞까지 달려왔던 바하무트의 몸뚱이가 대각선으로 잘려 나가는 모습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적이 접근하는 와중에 태평하게 그녀를 끌어 올려 주고 있었단 말인가.

“시작부터 이러면 조용히 못 가잖아요.”

“애당초 계획이 유인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래도 여기선 최대한 멀어진 뒤에 실행할 계획이었다고요.”

툴툴거리던 베로니카는 눈알을 도륵 굴리던 바하무트 하나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등줄기가 굳으며 손이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 들었다. 오스카의 검은 그녀에겐 무거웠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심장을 부숴. 그거 하나만 생각해.”

등을 맞대고 선 남자가 조언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친 바하무트가 우뚝 멈춰 섰다가, 갑자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베로니카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몸은 사특한 머리에 비하면 훨씬 정직했다. 몇백 번이고 연습했던 대로. 춤추듯이 팔다리가 움직였다.

과연 정말로, 성력이나 검기 없이도 공격이 먹힐까. 그들이 몸에 두른 대기를 꿰뚫을 수 있을까.

시간을 잡아 늘인 것처럼 검과 바하무트의 궤적이 느리게 펼쳐졌다. 닿기 직전, 수면처럼 공기에 파문이 일며 검 끝이 파동의 중앙을 관통해 들어갔다. 버석, 빨간 눈동자에 검이 꽂히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며 세상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누가 가르쳐 줬는지 자세가 완벽하네.”

지켜보던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는 숨을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독학했어요. 근데 어디로 갈 거예요?”

“…너무 외곽으로 나가도 돌아오기 귀찮아져. 저기 교회 보여?”

“문 열린 곳이요? 보여요.”

“달려, 그럼.”

대화는 짧았다. 흩어져 있던 바하무트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두 인간을 향해 하나둘 눈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섯 걸음에 한 번씩은 그것들이 덤벼들었다. 오는 방향에 따라 누가 처리하냐가 갈렸다. 대부분의 경우 리온이 검을 휘둘렀지만 베로니카도 쉰다는 느낌은 없었다.

서걱, 서걱, 베고 자르고 관통하고. 바짝 조인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베로니카는 한나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토벌에 나갔을 때처럼.

봐. 너희를 훔쳐보던 인간이 여기 있어. 그토록 찾던 존재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어.

그것은 예상보다도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래에서 생존자를 찾던 개체들까지도 돌 더미를 후드득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선이 한데 모였다. 그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홍채가 늘었다 줄었다 하며 맥동했다. 마치 처음 동화될 때 같기도 했다. 그들이 일시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피가 폭발적으로 끓었다. 연결되어 있어서인지 그들의 동작이 한 수 앞서 읽혔다. 피. 살인. 허기. 갈증. 머릿속이 뒤죽박죽 곤죽이 되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어느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멈추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의식이 흐려졌다. 기존에 논의했던 교회로 향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세상이 피를 뒤집어썼다. 파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명암 차이만 있을 뿐 온통 붉었다.

“뭐야… 세상이 다 빨개요…. 당신도 이래요?”

베로니카는 뒤를 돌아봤다가 당황했다. 말을 건 상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혼자였다.

“리온!”

어디에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앞을 본 베로니카는 비명을 질렀다. 바로 코앞에 붉은 눈을 빛내는 그녀 자신이 서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공포였다. 기괴한 괴물보다도 자기 자신의 얼굴에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는 건 왜일까. 유일성을 위협당했기 때문일까.

검을 휘두르자 묵직한 소리가 나며 그녀의 목이 날아갔다.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시체는 쓰러졌다. 제 시체를 직접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기하고 잔인한 느낌을 주었다. 베로니카는 검을 떨어뜨리고 뒷걸음질 치다가 무언가에 등이 부딪혔다.

“리온?”

황급히 돌아선 베로니카는 입을 크게 벌렸다. 부딪힌 건 또 자신이었다. 앞, 뒤, 좌, 우. 또 다른 ‘베로니카’들이 시선이 닿는 데까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자 그들이 따라 입을 벌리고 소리 질렀다. 옆으로 분열해 늘어나다가 몸이 눌릴 정도로 꽉 찼다. 숨이 막혔다.

눌려서 압박감에 괴로워하다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렸다. 모두가 붉은 핏물이 되어 발치에 흘러내렸다.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

얼굴. 영혼. 우리에게도 줘.

완전한 동화였다. 베로니카는 그들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이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인간의 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해답은 그들에게 있었으므로. 그들의 처절한 갈증을 느끼며 베로니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고통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 너희는. 너희는.

피의 용암 속으로 몸이 가라앉았다.

***

“시간은 충분히 끌었어. 그만 멈춰.”

리온이 그녀의 이상을 눈치챈 건 목적지로 한 교회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듣기는커녕 갑자기 검을 요란하게 떨어뜨리고 웅크려 앉았다. 덜덜 떨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눈사태처럼 덮쳐 오는 바하무트를 크게 베어 내고 여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심장처럼 맥동하는 눈이 보였다. 그녀는 크게 벌린 눈을 깜빡하지도 않은 채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곳, 먼 곳으로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이 눈을 알고 있었다. 동화가 진행될 때의 폭주한 눈이다. 역시 이딴 계획은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리온은 여자를 어깨에 들쳐메고 나머지 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바하무트를 거침없이 학살하며 교회로 발을 들였다.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기기긱 소리를 내며 커다란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다닥다닥 들러붙는 몸뚱이들이 보였다. 외곽의 교회치곤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이런 식으론 대성전조차 오래 버티지 못한다.

리온은 익숙하게 여자의 입술을 벌리고 호흡을 밀어 넣었다. 토벌전의 불길 속에서도 같은 일을 했었다. 그때와의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인형처럼 미동 없는 여자에게선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과 입을 벌린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쾅, 쾅, 그러는 사이에도 문에 부딪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마요. 내 이름도. 나는 죽기 싫어했다는 사실도.”

심장을 파고드는 강렬한 예감에 리온은 차갑게 뇌까렸다.

“죽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사실 입맞춤은 성력을 전달하는 가장 얕은 수단에 불과하다. 리온은 무엇을 해야 그녀를 살릴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제의 가장 큰 타락.

쾅쾅 발을 굴리는 마귀의 관중 속에서 그는 그녀의 옷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단순한 신념의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전의 일들은 잊어라. 네 이름은 오늘부터….”

“제사장의 4계명. 그중 첫 번째 계명은 창조가 신의 손으로만 행해진다 하였으니.”

“그리하여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를 ‘베르크’라 부르기로 한다.”

“빌어먹을.”

리온은 꽉 쥔 주먹을 그녀의 머리 옆으로 내리쳤다.

쾅, 하고 교회의 문이 굉음을 내며 부서진 건 그때였다. 뒤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 위로 드리웠다. 그것은 인간의 두 배가 넘었고, 살가죽을 뼈 위에 덮어쓴 듯 마디가 도드라졌으며, 손에는….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것의 기울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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