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8)화 (68/128)

귀 가까이 머리카락이 사락거렸다. 마디가 거친 손가락이 귓바퀴에 스쳤다. 맴돌았다. 간지럽고 이상한 느낌에 베로니카는 목을 움츠렸다.

“몰라서 물어요?”

“응.”

“요한나 황녀요.”

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기억났다는 듯 아, 하고 감탄했다.

“넌 내가 그 여자랑 뒹굴었다고 생각했었지.”

황녀를 언급하는 어조가 무척이나 무례했다. 그녀가 ‘뒹굴었다’는 천박한 표현에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낮게 부정했다.

“그런 적 없어. 그럴 일도 없고.”

얼마나 단호했던지 순간 그 말을 믿을 뻔했다. 흐트러진 침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베로니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관없어요. 당신이 누구를 안았든지.”

“…이제 안 좋아할 거라서?”

“아니요. 당신이 거짓말쟁이라서요.”

“…….”

“억울하면 해명해 봐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인 적 없다고. 최초의 바하무트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고.”

떨리는 목소리에 환멸이 묻어났다. 그렇게 당하고도 기대하다니. 그의 말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다니.

리온의 손장난은 멎은 지 오래였다. 머리칼을 거머쥐고 있던 손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풀려났는데도 심장은 우악스레 잡힌 것처럼 아팠다. 침묵은 긍정의 다른 얼굴이다. 깊은 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한나를 위로하면서 광야를 떠올렸던 게 비참했다. 가장 찬란한 기억이 모조리 환상에 불과하다는 게, 그녀의 절망이 그에게는 태울 장작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난 살고 싶었어요.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남아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어요. 나는, 난 다 끝나고 나면 당신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바보처럼.”

사람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금이 갈 때 가장 고통스럽게 부서진다. 그래서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름은 저주다. 누군가의 가슴에 평생토록 새겨지는.

“죽을 때까지 잊지 마요. 내 이름도. 나는 죽기 싫어했다는 사실도.”

베로니카, 승리를 가져오는 여인.

그녀의 이름은 묽은 독처럼 그의 심장을 서서히 망가뜨릴 것이다.

그녀의 존재가 죄라면 그 죄책감을 짊어질 사람은 그였다. 그의 불꽃이 그녀를 화형에 처했으므로.

***

베로니카는 얼어붙은 리온을 지나쳐 돌아왔다.

무너진 집에 들어와 앉아 있으니 예전에 이 집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이름을 듣고, 축복받은 인생을 예상했던 때. 난롯불은 아늑하게 타올랐고 갈색 의자는 오리 깃털을 깔아 푹신푹신했다. 베로니카는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평화로운 기억은 산사태의 굉음과 함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갑자기일까? 아니, 전조는 있었다. 갑자기 싹 사라진 바하무트. 카르트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했어야 했다.

누구를 탓하겠나. 그녀 자신도 리온과의 일로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시한부의 마지막을 생각하느라 잠깐이나마 바깥을 잊었다.

“곤란하군요. 틈을 봐서 나가야 할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바하무트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건물 곳곳에 숨은 인간들을 뒤지는 모양입니다.”

잠깐 밖을 보고 온 오스카가 걱정스레 말했다.

떠나온 건물 사람들은 잘 숨어 있을까. 물 없이 보낸 시간이 하루가 되어가는데. 얼른 황궁에 가서 군대를 요청해야 하는데.

피곤하게 들어 올린 눈에 에밋과 한나가 담겼다. 더는 싫다. 더는.

“제가 유인해 볼게요.”

제안은 불쑥 충동적으로 튀어 나갔다. 오스카가 눈썹을 들썩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한번 해 봤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어요. 그들은 저를 해치지 않아요.”

“베로니카. 그때 당신이 살아 돌아온 건 바하무트가 멀쩡히 보내서가 아닙니다.”

“아, 물론 당신에겐 감사하고 있어요. 공로를 잊은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해요.”

“아니, 제게 감사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마른세수를 한 오스카가 망설이다 가까이 쭈그려 앉았다. 밖에 있는 리온이 듣지 못하게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의아하게 올려다보는데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왔다.

“내가 방해하는 건가?”

오스카의 어깨 너머로 리온이 뚜벅뚜벅 나타났다. 묘하게 서늘한 눈동자는 불빛과 어둠 사이에서 한층 형형했다. 오스카는 당황해서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거 아닙니다. 밖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리온은 대답을 미룬 채 베로니카를 빤히 살피다가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입을 열었다.

“놈들이 점점 이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어.”

그는 소름 끼치는 얘기를 무표정하게 해냈다.

“예상 밖의 상황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탈출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나가는 얘기라면 저도 찬성이에요. 공기도 안 좋고 한나도 걱정스러워요. 둘 중 하나가 엄호를 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한나 씨를 부축해서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베로니카는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러자 리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나를 제외하고 숫자는 셋. 하나가 모자라다.

“나머지 한 명?”

“내가 유인하면 돼요. 저번에 토벌대로 나갔을 때처럼요.”

“안 돼.”

리온은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묵살했다.

“왜요? 안전할 거예요. 그들은 날 죽이지 않아요. 오히려 저번처럼 날 찾는 건지도 몰라요. 그리고….”

베로니카는 잠이 든 한나를 힐끔 보았다. 혹시 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입을 함부로 놀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나는 아셀도르프 출신이에요.”

뜬금없는 말에 오스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리온은 곧게 뻗은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부모님이 여관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리온은 아마 그녀가 또 한 번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이유를 눈치챘을 것이다. 한나의 부모님은 아셀도르프에서 죽었고, 이제는 남편까지 잃어버렸다. 베로니카는 가족이 사라진 한나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한나를 무사히 탈출시키는 일은 과거의 자신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누구 한 명이 희생해야 한다면 내가 되는 게 맞겠죠. 다들 걱정할 가족들이 있잖아요. 만에 하나 나를 찾아 모여드는 거라면,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말로 민폐일 테고요.”

“…후.”

오랜 침묵 끝에 오스카가 장대한 한숨을 터뜨렸다. 그가 머리라도 찧고 싶다는 얼굴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당신을 말리고 싶지만… 반박할 말이 없군요. 오늘처럼 제 자신이 싫은 날도 없는 것 같습니다.”

뒤이어 그가 허리에서 검대 째 장검을 풀어냈다. 은으로 도금된 검집에는 신의 기사를 상징하는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그것을 눈을 동그랗게 뜬 베로니카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제게 돌려주십시오.”

“하지만… 밖은 위험할 텐데 이걸 제게 주셔도 괜찮겠어요?”

“토벌대에서의 일이 재현된다면 바하무트는 제가 코앞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한나 씨를 부축하면서는 검을 휘두를 수도 없습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요.”

오스카는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오스카 ‘베르크’. 기사단이 되기 전까지 평민의 신분에 불과했을 남자.

그에게 그 검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베로니카는 뭉클한 마음으로 장검을 받아들고 리온을 쳐다봤다. 이제 당신만 동의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물었다.

“유인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돌아올 생각이지? 바하무트를 전부 끌고 돌아올 건가?”

“그럴 리가요. 당연히 생각해 둔 바는 있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제2의 눈꺼풀이 있다고 하면 될까요. 내 생각엔 그걸 떴을 때 바하무트들도 날 의식하는 것 같아요. 유인을 끝마치고 숨고 나서는 눈을 감을 거예요.”

“제안보다도 이미 결정을 내린 통보처럼 들리는데.”

“맞아요.”

“납치라도 하지 않는 한 마음대로 행동할 작정이군.”

“그렇겠죠. 아마 기절이라도 시켜야 할걸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자 리온이 입술 끝을 치켜올렸다.

“그래, 마음대로 해. 누가 어디로 가든 서로 참견할 권리는 없지.”

선선한 대답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의구심을 품던 베로니카는 문득 깨닫고 경악했다.

“…설마 날 따라올 작정은 아니죠?”

“맞는데.”

“미쳤어요?”

“네 작전이 통하기만 한다면 다른 두 사람은 엄호할 필요도 없이 안전해. 그리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더 우선시해야 할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동화자겠지.”

베로니카는 그를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논리에 빈틈을 찾는데 그가 덧붙였다.

“거기다 지금 죽으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거든.”

“…….”

“저도 베르크 경이 따라가는 게 더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진짜 속마음 같아선 검을 주는 게 아니라 직접 동행하고 싶습니다만….”

“안 돼요. 누군가는 황궁으로 가서 생존자에 대해 전해야 하잖아요. 발밑에서 들리던 소리를 기억해요.”

고개 돌린 베로니카는 이번에는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오스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홀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졌으니 부담이 크리라.

“혹시 생존자를 구하지 않으려는 눈치면 부단장님께 전해 주세요. 토벌대에서 한 약속을 지켜 달라고요. 그때 피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으면 한 번은 제 편을 들어주기로 하시지 않았느냐고. 제 부탁은 이재민을 구하는 거라고요.”

누구 한 명은 황궁과 교황청이 있는 안전지대로 가야 한다. 그리고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의 기준에서 죽어도 되는 쪽은 리온 베르크였다.

오스카는 왠지 서글픈 눈으로 리온과 베로니카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결론 났군.”

리온은 비스듬히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고 베로니카는 오스카의 검대를 차고 검을 비껴 넣었다.

움직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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