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7)화 (67/128)

오스카는 곧바로 바위를 치우려 달려들었다. 그도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고막을 괴롭히는 흐느낌에 대한 예의이자 어쩔 수 없는 몸의 반사 반응이었다.

그사이 리온은 에밋의 맥박과 호흡을 확인했다. 단순히 하반신이 깔린 게 아니라 뭔가가 허벅지를 관통했는지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잠시 손을 대고 있던 그가 에밋의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다시 목에 손을 갖다 대고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리온이 가만히 시선을 돌려 한나를 바라보았다. 불빛에 비친 남자의 표정은 읽어 내기 어려웠다. 다만 위안이나 긴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부군께서 마지막 말은 남기셨습니까?”

희미한 연민.

아.

“…….”

흐느낌이 뚝 멎음과 동시에 베로니카는 숨을 멈췄다. 안 돼, 아니야. 그럴 수는 없다.

그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미 에밋은, 진작에. 오스카가 털썩 주저앉았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한나가 기이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건 그때였다. 리온의 어깨며 가슴을 주먹으로 치는 한나를 베로니카가 끼어들어 껴안았다.

“쉬이, 괜찮아요. 한나. 진정해요.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의미 없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한나를 토닥였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베로니카에게 안겨서 악에 받친 울음을 토해 냈다.

“놔요. 이거 놓으라고!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안 죽었어! 방금까지도 나랑 대화했어. 바위나 치워 달라고요! 이, 이!”

“알아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붙들었다. 한나는 부른 배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다. 이러다 무슨 일이 날까 무서웠다.

“네, 알아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일단 숨부터 골라 봐요. 들이쉬고, 내쉬고. 네. 괜찮아요.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요. 아는데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 그래도 그때 나한테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이거였으니까. 그러니까. 한나.”

베이른을 생각하며 한나를 힘주어 안았다. 온기를 전달했다.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비참하게도 이 정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런 무능한 기분이 싫어서 그렇게 검을 배우고 훈련한 건데. 노력했는데.

구하지 못했다. 울분과 슬픔이 밀려들었다. 도시와 가족을 잃고 이웃과 친구를 먼저 떠나보내는 설움을 안다. 그것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치의 고통이다.

“혼자가 아니에요.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아도 당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야.”

인간은 누구나 살다가 한 번쯤 설원의 풍경을 만나나 보다. 눈보라 치는 하얀 땅이든,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모래사막이든,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바다 위의 뗏목이든.

인생은 결국 혼자라고 절망하고 단정 짓기 쉽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혼자 태어났기에 팔을 뻗어 서로를 안아 줄 수 있다. 같게 태어났다면 할 수 없는 일,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

발버둥 치길 한참, 힘이 풀린 한나가 마침내 꺽꺽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눈물과 콧물 사이로 말의 토막이 흩어졌다.

“에밋이, 에밋은 나랑 계속 이야기했어요. 기둥에 깔리고도 몇 시간은 의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대답이 없어서 내가 불안해하니까 눈을 감은 채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알아, 내가 봤어. 한나. 우리 가족은 잘 살 거야. 신이 도우셨어.’”

한나가 에밋의 마지막 말을 읊으며 헐떡거렸다. 가슴을 갈가리 찢는 절규가 막을 새도 없이 마음을 덮쳤다. 그녀의 울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조각은 한참을 정처 없이 공기 중을 떠돌았다. 듣고 있는 세 사람도 각자 허공을 응시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나가 넋이 나간 얼굴로 힘없이 눈꺼풀을 내릴 때까지, 색색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기랄…!”

오스카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는 베로니카보다도 부부와 잘 아는 사이였다. 지금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지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림처럼 멈춘 채 흘렀다. 정물화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탁자에 기대서 있던 리온이었다. 부싯돌로 다른 등잔에도 불을 붙인 그는 부엌을 뒤져 아직 무사한 잔에 물을 따라왔다. 베로니카는 그것을 받아 한나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러다 탈수 증세가 올 거예요. 한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한 모금 마셔요.”

그때까지 생의 의지를 모두 포기한 듯 늘어져 있던 한나는 아이라는 말에 간신히 의식이 깨어난 사람처럼 더듬더듬 물을 받아 마셨다.

“침대든 의자든 어디로든 옮겨야 할 것 같아요. 도와줘요.”

그러나 베로니카가 운을 떼자 한나는 물을 입가에 줄줄 흘려 가며 질색팔색했다.

“안 돼! 난 어디도 안 가요! 에밋과 함께 있을 거예요.”

“그럼 담요나 이불이라도 찾아보겠습니다.”

오스카가 급하게 일어나며 그녀를 달랬다. 리온은 바깥을 살펴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한나는 여전히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원래의 밝고 똑 부러지는 모습과 대비되어 마음이 아팠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집처럼 단단한 그녀를 지탱하던 기둥은 에밋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베로니카는 눈을 꼭 감고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끝까지 생을 붙들 힘을 주소서.

“그나마 돌가루가 덜 묻은 건 이것뿐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오스카가 가져온 담요를 한나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한나는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에밋의 가슴에 기대 눕고 한 손은 자신의 배에 올렸다.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아무래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할 듯싶었다. 그때쯤 리온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근처 이웃 중 생존자는 없는 것 같군. 애초에 일부라도 무사한 집은 여기밖에 없어. 그야말로….”

신이 내린 기적이다. 그러나 리온은 비극 앞에서 섣불리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가라앉은 눈이 엉켜 누운 남녀를 물끄러미 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이었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사방에 이끼처럼 퍼져 있어. 여기서 몇 시간쯤 기다리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주어 없이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사방에 이끼처럼 퍼진 주체는, 바하무트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사이에 황궁과 교황청에서 군대를 보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오스카의 말에 리온과 베로니카는 예의상으로도 맞장구치지 않았다. 지금쯤 군대는 잔해로 방벽을 쌓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교황과 황제다운 결단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 때는 집안일이 가득 쌓여 있을 때처럼, 하나씩 차근차근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럼 끼니를 때울 먹을거리라도 찾아볼게요. 우리는 그렇다 쳐도 한나 씨는 저렇게 울고 나면 기력이 떨어질 거예요. 밖으로 나가서 도망칠 때 지쳐 있어선 안 돼요.”

“저도 돕겠습니다.”

오스카와 베로니카는 부엌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부엌은 완전히 무너진 침실과 달리 나름대로 멀쩡했다. 그들은 빵이며 치즈, 소시지, 소금에 절인 양배추, 풋강낭콩을 찾아냈다. 리온이 두꺼운 빵의 중앙을 칼로 갈라 사이에 재료를 조금씩 끼워 넣었다. 맛보다는 효율을 우선시한 조리였다.

베로니카는 한나에게 거듭 권유하고 그녀가 억지로 먹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하며 남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다양한 재료가 들어갔는데도 맛이 느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한나는 멍한 눈을 깜빡이다 잠이 들었다.

“이제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눈 좀 붙이십시오.”

오스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제야 뻑뻑한 눈과 가벼운 편두통이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대했다.

“리온은요?”

“베르크 경은 만약을 대비해 출구와 가까운 곳에서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바깥을 생각하자 베로니카는 돌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수 시간째 돌 더미 아래 갇혀 있었더니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망설이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까 미끄러진 구멍 쪽에서만 신의 은총처럼 푸른 달빛이 스며들었다. 나른한 목소리가 뒤에서 툭 떨어진 건 그때였다.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우뚝 멈춰 서자 리온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등을 찌르는 듯한 시선에 숨죽이길 잠시, 커다란 기척이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

“아.”

베로니카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신음했다. 발목에 손을 댄 리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빈도로 발이 삐는데 춤은 어떻게 춘 건지 모르겠네.”

“…신경 꺼요.”

“신경 쓰이게 하는데 무슨 수로?”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긴 그가 뭔가를 발목에 세게 감아 주며 말했다. 보호대처럼 천으로 고정하는 느낌이었다. 신경이 팔려 있다가 넘어질 뻔한 베로니카는 그의 어깨를 붙들어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당신이 이렇게 제멋대로 구니까 내가….”

“좋아한다고?”

“싫어하게 된 거라고요.”

날 선 대답에 리온이 웃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소리로는 그랬다.

“그래서 날 어떻게 망칠 계획인데?”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는 약이 오를 정도로 태연했다. 그녀의 고백이나 감정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아 분했다. 베로니카는 차갑게 받아쳤다.

“그러는 당신은 날 어떻게 죽일 계획인데요?”

매듭을 묶던 손이 멈칫했다.

“잡아뗄 생각은 하지 마요. 당신이 신념까지 바친 여자가 내게 친절히 설명해 줬으니까.”

신발을 신겨 준 리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게도 어두운데 움직임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훤칠한 키에 넓고 단단한 어깨. 두꺼운 흉통과 날렵한 허리선. 피부가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팽팽하게 긴장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

“내가 신념까지 바친 여자가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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