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6)화 (66/128)

말을 다 잇지 못한 중년 남자가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리온이 그녀에게 흘긋 시선을 내렸다.

“에밋? 그건 또 누구지?”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아, 당신보다 내 이름은 먼저 알았지만요.”

베로니카가 슬쩍 빈정거리자 리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스카는 곤란하게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 걱정으로 속이 타 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그도 기본 눈치는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건 됐고 나갈 거면 저도 같이 가요.”

베로니카가 일어서는 리온에게 덧붙인 건 그때였다. 부서진 창문 너머를 살피던 리온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냥 아는 사람’을 구하러 가려고?”

“네.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이에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양팔을 들고 균형을 잡은 베로니카는 창가까지 걸어가 그 옆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왠지 질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곧 어두워질 거야. 날이 밝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삽시간에 무표정을 되찾은 리온이 조용히 말했다.

말마따나 어둠이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남색의 흐릿한 사위 속에서 리온은 그들이 있는 6층에 가깝게 쌓인 돌무더기를 내려다보았다. 건물이 기울어졌다는 점을 감안해도 현관이 아니라 창문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건 상황이 심각하단 뜻이었다. 당장 발밑도 식별하기 어려운데 바위틈에 끼거나 빠지기라도 하면 일이 곤란해진다.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이상하네요.”

리온은 말뜻을 가늠하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베로니카는 덤덤하게 이어 말했다.

“교황청에서는 더 어두운 데서도 며칠을 보냈는걸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리온은 뭐라고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왜인지 무표정이 슬퍼 보였다. 고개를 들자 검 끝이 맞부딪히듯 시선이 충돌했다. 베로니카는 아까부터 스스로에게 놀라는 중이었다. 그를 포기하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그녀는 원래의 당당한 자신으로 되돌아가 하고 싶은 말을 술술 내뱉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나 보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움받기 싫어서.

참기만 하는 사랑이 오래갈 리가 없는데도 그랬다. 물론 이 경우에는 제대로 시작도 못 해 봤지만.

죽음은 그녀에게 한없는 용기를 부여했다. 베로니카는 제 마지막이 결정된 순간 리온을 놓았다.

“저도 슈바르츠발트 양과 함께 나가는 데는 찬성입니다. 그녀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오스카까지 말을 얹자 리온은 결국 느리게 시선을 떼어 냈다. 등을 돌리는 행위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혹은 날이 완전히 지기 전에 빨리 나가고 싶었거나.

기울어진 창틀을 밟고 둘러보던 리온이 먼저 뛰어내리자 베로니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와줄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게요. 섣불리 나오지 마세요.”

열렬히 끄덕이는 건 부탁을 건넨 중년 남자뿐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다. 건물 안쪽에 숨은 사람들은 겁먹은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넘겨다봤다. 아주 오랜만에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 다시는 사람들을 버려두지 않아. 베로니카는 아셀도르프를 되뇌며 창틀에 올라섰다.

바깥에는 돌이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내려갈 높이가 한 층 정도 남아 있었다. 평평하고 커다란 바위에 선 리온이 말했다.

“받아 줄 테니까 뛰어내려.”

베로니카의 뒤로는 오스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섭다고 벌벌 떨며 시간을 끌기도 싫었고 여기서 고집부렸다 다치면 더 큰 피해를 초래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베로니카는 군말 없이 허공에 발을 내디뎠다. 잠깐의 부양감과 함께 단단한 팔이 몸을 확 낚아챘다. 베로니카는 익숙한 체취와 온기 속에서 눈을 떴다.

“아, 팔 부러진 것 같은데.”

바닥에 무사히 내려 주며 하는 말에 고맙다는 말이 쏙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표정 변화도 없이 농담을 지껄이는 남자를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농담할 상황 아니잖아요.”

“농담 아니야.”

눈썹을 찡그리고 쏘아보자 리온이 픽 웃었다. 짜증 날 정도로 잘생긴 미소였다.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는, 그 특유의 배려기도 했다.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속지 마. 마음 약해지지 마. 그의 다정함에는 의미가 없어.

이윽고 오스카까지 내려오자 그들은 본격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대로 도시는 쑥대밭이었다. 높은 건물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원래의 형태와 거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내렸다. 참담함에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백만 인구가 사는 거대한 카르트에서 적어도 면적의 4분의 1은 산사태의 피해를 직격타로 입은 것 같았다. 이 상황에도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황궁을 바라보며 오스카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분수대는 방향상 저쪽이겠군요.”

돌 더미다. 생존자가 있을 리 없다. 셋 다 같은 생각을 했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부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분수대는 황궁 쪽이라 어차피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그들은 바위틈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세상은 금세 어두워졌다. 발밑에서 사람의 신음이나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살려줘, 살려 주세요. 누구 없어요.

베로니카는 귀를 막았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다 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 온통 돌로 덮여서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나는지도 찾기 어려운 데다 셋이서 돌무더기를 헤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차라리 황궁에 가서 군대를 요청하는 편이 빨랐다.

그때, 앞서 걷던 리온이 갑자기 긴 다리를 멈춰 세웠다. 그가 무언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따라 고개 돌린 베로니카는 숨을 들이켰다. 날개 조각의 끄트머리.

“여기가….”

다섯 천사의 분수대.

이곳을 기준으로 오른편 거리의 두 번째 집이 한나와 에밋 부부가 사는 곳이었다.

거리를 가늠하는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집이 전부 묻힐 정도라면, 역시 살아 있을 가능성은….

그때였다.

“저기 좀 보십시오!”

오스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불꽃이 보여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정말로, 무너진 장벽 부근에서 점점이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그것은 이른 아침 첫 노래를 부르는 새처럼 하나둘씩 켜지다가 일렬로 번져나갔다. 마치 바르게 도열한 군대 같았다.

군대? 잠깐만.

“…아니에요. 저건 불꽃이 아니에요.”

베로니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등골이 오싹했다.

같은 것을 깨달은 리온이 검 자루에 손을 올림과 동시에 그녀는 질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건 바하무트의….”

눈동자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에 가까운 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바하무트의 대군이다.

그들이 무너진 장벽의 틈으로 들어오고 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산을 무너뜨린 게 진실로 그들이었던가. 발 빠른 진격 속도에 기가 질렸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잘못된 곳을 밟은 건 정말이지 순수하게 그녀의 탓이라곤 볼 수 없었다. 발밑의 돌이 와르르 무너지고, 리온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손끝이 스치듯이 닿으며 아래로 푹 미끄러졌다. 짤막한 비명과 발목의 통증, 엉덩방아를 찧은 베로니카의 옆으로 리온이 뛰어내렸다. 이윽고 오스카까지 따라 들어왔다.

크고 널찍한 돌 두 개가 각자 기둥과 지붕 역할을 하는 바람에 아래에 생긴 빈 공간이었다.

“일어날 수 있어?”

“아마도요.”

베로니카는 리온이 내미는 손 대신 잔해를 잡고 혼자 일어났다. 솔직히 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쿵. 쿵. 쿵.

“차라리 잘됐습니다. 여기서 저것들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죠.”

검을 뽑아 든 오스카가 위쪽의 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푸른 달빛 아래서도 땀으로 흥건한 이마가 보였다.

“눈을 피할 작정이면 더 안쪽으로 들어가지 그래.”

리온이 베로니카의 발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제안했다. 마치 그의 부상이라도 되는 양 굳은 얼굴이었다. 베로니카는 까마득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가.

“상관은 없지만…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 말에 모두가 어둠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안쪽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생존자가 있다.

“안에 누구 있습니까?”

오스카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울음이 뚝 멎더니 잠시 후 절규 같은 여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여기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오스카와 베로니카는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절박한 음성이 아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신이시여.”

오스카가 검을 밀어 넣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고 베로니카는 옅은 통증을 무시하고 뒤따랐다. 중간에 한나가 등잔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무너진 집 안으로 들어가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집은 침실과 거실 일부가 무너졌고 침범한 바위가 운 좋게도 기둥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오스카 씨. 잘, 잘 왔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에밋이, 에밋이 절 지키다가….”

동그란 불빛이 주저앉은 한나를 막처럼 감쌌다. 그녀는 하반신이 바위에 깔린 에밋을 힘겹게 끌어안고 있었다. 하얀 옷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오스카는 털썩 무릎을 꿇었고 베로니카는 신음을 삼키려 입을 틀어막았다. 리온이 옆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저 남자는 이미 가망이 없어.”

얼빠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도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더없이 냉정했다. 베로니카는 리온의 팔을 꽉 움켜쥐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

“구할 수 있어요. 구해야 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는 더더욱. 저 사람들은, 그러니까.”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아셀도르프를, 여관의 주인장 부부를 입에 올릴 수 없어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한나에게 더 큰 슬픔을 지워서는 안 되는 때였다. 소리 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리온의 눈빛이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낮은 숨을 쉬며 고개 돌린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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