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5)화 (65/128)

리온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여자의 눈가는 토끼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깊이 쌓인 분노에 가까운 설움. 티를 낸 적 없어서 신경 쓰는 걸 몰랐다. 정확히는 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내 이름을 듣지 않은 건 당신을 포함해 네 사람뿐이에요. 채찍을 휘두른 교황 성하, 목을 조른 메클렌부르크 경, 그리고 황녀 전하와 당신.”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말 사이에서 리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메클렌부르크가 목을 졸랐다고? 블라센에 가기 전에 있었던 일인가.

순간 황궁 결투장에서 공황 증세를 보였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핏기가 가신 얼굴을 보고도 리온은 그녀를 달래기보다 다그쳤다. 죽음의 공포가 다가왔던 순간이라 생각하자 모든 게 이해되면서 심장이 불쾌하게 욱신거렸다.

“다들 공통점이 있죠. 날 인간으로도 생각 안 한다는 거.”

그녀에게 그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왜 또 친근한 척 다가와요? 욕정을 해소할 데가 필요한데 고귀하신 황녀 전하께는 이런 식으로 굴 수 없어서?”

그녀가 보란 듯이 옷깃을 끌어 내렸다. 설핏 드러난 목에 그가 남긴 붉고 푸른 흔적이 가득했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살성이 약한 피부는 연한 멍까지 들어 있었다.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군데군데 빈 기억 속에서 그가 저지른 짓이었다.

리온은 불가항력처럼 손을 뻗었다. 목부터 쇄골까지 검지로 훑어내리자 여자가 약간 몸을 떨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리온은 다가가지 않고 팔을 내려뜨렸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쓰레기 새끼였다.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휙 몸을 돌리더니 오스카 쪽으로 가 버렸다. 리온은 그녀를 잡아 세우는 대신 오스카에게 뭔가를 고하는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처음에 그녀는 리온도 저런 눈으로 올려다봤었다. 아니, 훨씬 더 사랑스러운 빛을 담아.

그녀가 결국 진저리를 낼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온 마음을 담아 고백하고, 닿아 오고, 부딪혀 올 때마다. 깨져나가는 빛의 파편이 보였다.

밀어내면서도 이기적으로 그녀가 계속 좋아해 주길 바랐다. 스스로를 잃어버릴 정도로 맹목적으로 굴기를. 그때부터 이미 잘못 상정한 셈이었다. 자신을 잃기엔 지나치게 뚜렷한 여자였다. 그녀는 리온과 달랐다. 닮은 척했어도 달라서 마음이 갔다. 같아질 수 없기에 그토록 모질게 영혼을 탐했다. 같아질 수 없는 상대를 삼켜서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면. 빌어먹을. 비뚤어진 새끼.

리온은 모순적인 갈증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비웃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는 거리에서 오스카와 함께 있는 여자를 봤을 때부터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게다가,

리온은 욱신거리는 신체를 느끼고는 픽 웃었다. 한 손으로 머리칼을 마구 흩뜨렸다. 달아오른 몸을 가라앉히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날, 약을 먹고 날뛴 이후로는 툭하면 이랬다. 어린애처럼 인생에서 가장 야릇한 꿈을 꾸고. 그러고도 모자라 몇 번이고 손을 대 죄를 저질렀다. 떠올리는 일만으로 곤란하게 되는데 오늘은 직접 마주쳤으니 끓는점을 넘어도 한참 전에 넘은 셈이었다.

사실 리온은 안아 주고 괜찮다고 말해 준 여자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도 몰랐다.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가 어려웠다. 태연한 가면에 금이 갔다.

그때쯤 다시 거대한 낙석이 가까이 쏟아지며 우르르 굉음이 터졌다. 여자는 창가를 떠나 구석 자리에 홀로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어떻게든 폭음을 견뎌 보려는 사람처럼 귀를 틀어막았다. 오스카를 비롯한 몇 명이 고집스럽게 창문 밖을 살피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현명했다. 산의 붕괴는 앞으로도 수 시간은 지속될 테고 창가는 가장 위험한 자리 중 하나였다.

리온은 걸음을 떼어 내 그녀의 옆에 다가갔다. 혹시 이 건물까지 무너지면 가까이 있어야 지키기 수월했다.

“왜 따라와요?”

옆에 앉는 그를 흘깃 쳐다본 여자가 물었다. 사방이 시끄러워서 입 모양으로 알아들었다. 리온은 벽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단단히 잘못한 개새끼가 된 기분이라서.”

“…….”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정면으로 틀었다. 허공으로 낭비되는 시선을 붙잡아 오고 싶었다.

세워 둔 오른쪽 다리에 엎드려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야각에 들어가게끔.

“알려 줘. 지금이라도.”

“…….”

“네 이름.”

여자는 이제 와서,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낼 만했다. 화내도 좋았다.

“뭘 원해? 뭐든 네 이름이랑 바꿔.”

재밌게도 그것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나한테 뭘 원해요, 깨어난 여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도저히 입 모양으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가까이 대자 굉음을 뚫고 유난히 선명한 미성이 파고들었다.

“당신을 망치고 싶어요.”

리온은 잠깐 호흡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울 것 같은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당신이 진짜로 타락했으면 좋겠어요. 더 엉망진창으로, 신께서 치를 떨며 당신을 저버릴 정도로.”

리온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작은 손이 목으로 올라오는 걸 내버려 두었다. 목을 조를 심산인지 울대가 압박감과 함께 짓눌렸다. 숨이 막혔다. 그가 반항 없이 기다리자 고개를 기울인 여자가 입술을 짧게 맞붙였다 떼어 냈다. 그것은 이전과 같이 타액을 섞는 질척한 행위도, 애정이 담긴 표현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포상이었다. 목이 졸리는데 가만히 기다리던 데 대한.

아, 그래. 비뚤어진 건 그만이 아니었다. 반쯤 내리깐 시야에 오로지 붉은 눈만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눈. 광기가 불새처럼 그를 압도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

리온은 낮게 속삭였다. 귓가로 고개 숙인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음절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심장에 박혀 들었다.

“그게 내 이름이에요.”

리온은 이름을 알려 준 의도를 캐묻지 않았다. 설령 끌어내리고 싶다는 뜻이라 해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여자와의 관계는 애매하고 모호했다. 딱히 뭘 어쩌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죽을 것이고 그는 감정을 끝끝내 내뱉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마지막 날까지는.

어차피 타인이란 아득한 혼돈이며 확신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조차 바다 위 반짝이는 잔물결처럼 일었다가 사라진다. 그는 막막한 바다에서 단지 아름다운 햇빛을 붙잡고 싶다고 생각했다.

***

산의 단말마는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에야 가까스로 끝이 났다. 천년의 평화에 비하면 놀랄 만큼 짧은 재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반나절이 아니라 일주일은 되는 듯했다.

2차, 3차 산사태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이 앉은 건물은 더 살벌하게 돌먼지를 떨어뜨렸다. 돌들이 튀어 들기도 하고 건물이 아찔할 정도로 기울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부상을 입었고 고립되거나 죽어 갔다. 귀에는 울음이나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수라장이었다.

다행히 오스카까지 합류한 구석은 건물의 뼈대가 되는 벽 측이라 상황이 나았다. 그러나 천장이 무너졌을 때는 파편이 튀어서 리온이 폭격 때처럼 베로니카를 감싸 안아야 했다. 베로니카는 굳이 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미 없는 행위였던 탓이다.

그가 관심을 가진다 한들 잠깐에 불과할 게 분명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의 ‘취향’이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 제법 아쉬워진 모양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다시는 속지 않으리라. 베로니카는 이제 와 이름을 묻는 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저주를 속삭였다. 베로니카, 이름을 들은 그는 이제 그녀를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저기….”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접근해 온 건 바깥이 잠잠해진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베로니카는 기울어진 바닥에서 어렵게 중심을 잡은 땅딸막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박한 얼굴이었다.

“혹시 붉은 기사님 아니십니까?”

남자가 리온의 머리 색과 흉터를 흘금거리며 물었다. 리온이 대답하지 않자 인정이라 생각했는지 넙죽 엎드릴 기세로 기어와 리온의 팔을 움켜쥐었다.

“제, 제발, 저 좀 도와주십시오. 아내와 아이가 집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죽는 사람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다섯 천사의 분수대 바로 앞까지만 동행해 주십시오.”

다섯 천사의 분수대. 베로니카는 피로와 어지러움으로 풀려 있던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 거리는 한나와 에밋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리온은 오스카와 시선을 교환한 뒤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과 함께 나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안전한 장소에서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나가면 그쪽에 생존자가 있는지는 확인해보겠습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슬슬 나갈 참인 듯했다. 베로니카는 긴장으로 머리에 다시 피가 도는 걸 느꼈다.

“그래도…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충분하고 말고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남자는 따지려다가 무표정한 리온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고쳤다. 몇 번이고 턱에 호두 같은 주름을 만들어 내며 고개를 조아렸다. 베로니카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든 건 그때였다.

“다섯 천사의 분수대 앞이면 혹시 25번지 앞인가요?”

“예? 아, 그 근처로 26번지입니다만.”

“그럼 혹시 옆집의 이웃도 아시나요?”

“에밋 씨 말하는 건가요? 예, 예. 건실한 청년이지요. 하지만….”

에밋을 안다는 말에 반가움이 스치길 잠시, 이내 베로니카의 안색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도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만났을 때 분명 오늘은 집에 있겠다고 했는데… 축제 첫날은 너무 혼잡하다고… 미안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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