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3)화 (63/128)

그는 역겹고 싫다고 했으면서 뜨겁게 입을 맞췄다. 뭇 여자가 바라는 눈길로 내려다보며 도망치지 못하게 손에 깍지를 꼈다. 거짓말쟁이. 난봉꾼. 싫어. 당신이 싫어.

베로니카는 침대에서 혼자 눈을 떴다. 짓누르는 압박감이 사라진 몸은 움직일 때마다 열감으로 따끔거렸다. 베로니카는 이불 밑에 들어가 붉게 남은 흔적을 하나씩 매만졌다. 손끝이 떨렸다.

“왜 나를 구했어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힘겹게 잡고 있던 마지막 끈을 놓은 건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말은 죽을 때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였다.

자세히 물을 의지가 사라졌다. 진실로 여정의 마지막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느냐고. 왜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도망갈까 봐 걱정했냐고. 할 말은 많았지만 삼키고 억눌렀다.

어떤 대화는 상처만 줄 뿐이다. 베로니카는 버티기를 포기했다. 감정이 짓밟히고도 그가 베푸는 호흡에 헐떡이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 치사하게 가면을 썼던 리온과 달리 그녀는 모든 얼굴을 보여 주었다.

미련은 없었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놓자 리온의 존재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나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한 권의 책이라면 아껴 읽던 종장은 이로써 완전히 끝이 났다.

***

온 시민이 고대하던 건국제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매해 그렇듯 첫날은 신의 축복처럼 쨍쨍했다. 알음알음 퍼지던 불안도 오늘만큼은 설 자리를 잃었다. 봄의 시작, 대국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베로니카는 목의 흔적을 가린 옷깃을 만지작거리다 대뜸 입을 열었다.

“오스카, 당장 내일 죽는다 치면 오늘 뭘 할 것 같아요?”

그들은 카르트의 중앙로에서 건국제의 열병식을 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행군하는 카이젠미어의 병사들에게서 은색 갑옷이 햇빛을 받아 번득였다.

“음, 우선 그간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올리고, 길러 주신 분들께 찾아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빙과를 먹던 오스카는 쓸데없는 질문을 받은 사람 특유의 진지함을 담아 대답해 주었다. 베로니카는 아, 하고 감탄했다.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길러 주신 분들이 있댔죠. 오늘 같은 날 그분들을 만나러 가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했으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축제 기간 내내 머무르면서 밀린 집안일을 도울 텐데 섭섭해하시는 건 반칙입니다.”

“집안일이요?”

“지붕을 고쳐라, 수도가 샌다, 고양이가 사라졌다. 젊은이가 나이 든 사람을 도울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가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왠지 애정이 느껴지는 말투와 인간다운 표정에 베로니카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일까. 그럼 답이 없어지는데. 씁쓸히 생각하는 사이 인파에 어깨가 떠밀렸다.

“제 앞으로 오십시오. 좀 나을 겁니다.”

웃는 얼굴을 멍하니 보던 오스카가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며 말했다. 고마워요, 하고 가까이서 올려다보자 불그스름하게 익은 귓바퀴가 보였다. 햇살이 내리쫴도 아직은 쌀쌀한 날씬데 많이 더운 모양이었다. 얼음으로 만든 빙과까지 씹는 걸 보면.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오스카는 그녀를 카르트의 거리로 친히 데리고 나와 주었다. 공로를 세웠어도 동화자는 위험했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행 기사가 필요했다. 오스카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럼 내일이 아니라 몇 개월 남은 시한부면요?”

베로니카는 그의 턱 언저리에서 다시 질문했다. 오스카가 정면만 보며 대답했다.

“시한부…. 그때는 기사단에서 나와 세계 여행을 떠날 것 같습니다. 노래로만 들어 본 바다도 보고 싶고… 아, 물론 바하무트가 없어져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

“인류는 대역병도 이겨 냈습니다. 전 대륙이 함께 싸우고 있는 만큼 바하무트를 이겨 낼 무기도 금방 고안해 낼 수 있을 겁니다.”

흐려진 안색을 보고 오스카가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시끄러운 북과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정말로 그럴까? 이겨 낼 수 있을까?

바하무트는 2년 반 만에 전 대륙에 종양처럼 퍼졌다. 중부와 남부는 전부 잠식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사람이 몰살된 게 아니라 대부분 성문을 걸어 잠그고 땅을 빼앗긴 것이겠지만.

세상에 이런 재앙이 있었던가. 전례 없다, 는 말이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로 환상을 본 적은 없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마치 몰래 보던 구멍이 막힌 것처럼 깜깜했다.

황실에도 그렇게 보고하자 황제는 바하무트가 카르트 인근을 완전히 떠났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카르트는 성벽 바깥보다도 폭격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는 중이었다. 카르트는 안전하다. 과시하듯 색색의 종잇조각이 봄바람에 흩날렸다. 카이젠미어의 가장 큰 축제 주간이었다. 와르르 웃으며 아이들이 지나가자 친구들과 쏘다니던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툭 튀어나와 발을 걸던 포석도, 뛰지 말라고 혼내던 베이른의 치안대 아저씨들도 그리웠다. 세상엔 돌이킬 수 없는 시간도 있다. 왜 잃기 전에는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까.

“베니! 여기!”

그때 누가 환청처럼 베로니카를 불렀다. 의식보다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이번엔 뒤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맙소사, 대체 어디 있었어? 사람이 많아서 한참 찾았어.”

이름이 같을 게 분명한 여자가 옆을 스쳐 뛰어갔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낮추었다. 친구들이 그리웠다. 외로웠다.

“한나 씨를 보러 갈까요.”

베로니카를 지켜보던 오스카가 운을 뗀 건 그때였다. 그답지 않게 둥글린 어조가 이어졌다.

“성격상 이런 날 밖에 못 나가서 심통이 나 있을 겁니다. 맛있는 음식을 사 가면 분명 기뻐할 테고요.”

“그럴까요?”

베로니카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반색했다. 활기찬 사람들과 아늑한 집을 떠올리며 기운을 내려고 노력했다. 오스카에게 우울함을 읽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전 돈이 없는데요.”

“제가 잠깐 빌려주겠습니다.”

“언제 돌려받을 줄 알고요?”

“나중에, 이 일이 다 끝나고 정상적인 일자리를 얻으면 그때 갚으십시오.”

“이자가 어마어마하겠네요.”

“예. 노후 자금은 그렇게 마련할 계획입니다.”

뻔뻔한 대답에 베로니카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스카도 마주 웃었다. 좋은 날에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 게 미안해서 일부러 발걸음도 가볍게 걸었다. 열병식이 끝난 거리에는 이제 영웅 카이젠미어의 업적을 기리는 가두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이른에서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어느 가게에 진열된 검은 체리 케이크를 들여다볼 때였다. 오스카가 불쑥 그렇게 물었다. 베로니카는 주인에게 포장해 달라고 손짓하며 되물었다.

“왜요? 빌려준 돈을 못 받을 것 같아서 걱정돼요?”

“예. 혹시 기사 문학 쓰는 작가한테 제 노후 자금이 걸린 거면 어떡합니까.”

베로니카는 킥킥대다가 가게 주인이 가져다준 케이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대신 들려고 손을 내미는 오스카에게 봉투를 건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맞혀 봐요.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은지.”

“엄청 말랐네.”

“춤이라도 췄어?”

오스카의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머리 한편에선 자연스럽게 리온의 목소리가 울렸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잊으려고 하는데도 베로니카는 툭하면 그를 떠올렸다. 저녁을 먹을 때. 씻을 때. 자기 직전에. 이러다 붉은 머리만 봐도 착각하게 생겼….

가볍게 내딛던 발걸음이 무기점 앞에서 멈췄다. 베로니카는 익숙한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가게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큰 키와 넓은 어깨. 대충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우연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예술 계통의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아, 혹시 화가입니까?”

옆에서 오스카가 질문했다. 대답해야 하는데. 빨리 고개를 돌려야 하는데.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스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는 건 금방이었다. 동시에 새 완갑을 살피던 리온이 예민한 짐승처럼 이편을 쳐다봤다.

아.

황궁 연회는 저녁이었다. 신의 기사가 황족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시간. 황궁에서 지내는 베로니카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할 시간. 그때까지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리온의 날카로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묘하게 비틀린 눈동자가 베로니카와 친밀히 선 오스카, 그리고 그가 튼 봉투까지 훑어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꾹꾹 눌러 둔 그날의 기억은 막을 새도 없이 솟구쳐 올랐다.

탁하게 잠긴 욕설. 울대를 울리는 두꺼운 목과 이어지는 남성적인 턱선. 황녀와 뒹굴면서 약이라도 했던 건지 리온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을 떠올리자 옷 아래에 남은 흔적이 찌릿하게 아팠다. 옆에 선 오스카가 입을 뗐다.

“들러서 인사하고 싶습니까?”

홧홧한 얼굴을 서둘러 들어 올렸다. 입만 달싹이다 말을 만들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실례하겠다 말하고 어깨를 감쌌다. 인파로부터 감싸 줄 때와 같은 동작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충 예상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베로니카의 짝사랑을 아니까. 신의 기사는 신만을 사랑한다고 조언했던 사람이니까.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은밀한 기억을 다 들킨 것만 같았다.

“맞다, 무슨 일을 했었는지 맞히고 있었죠.”

필사적으로 아까의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오스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대답할 수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툭 떨어졌다. 경직된 눈은 먼 곳을 바라봤다. 베로니카도, 거리의 시민들도 모두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못 지른다는 말은 진실이다. 찰나지만 온전한 침묵이 거리를 잠식했다. 가두 행렬이 뚝 멈췄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 눈이 부시도록 맑은 하늘 아래.

새하얀 설산이 폭포처럼 굉음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영원의 의미를 겨루기라도 하듯, 산꼭대기의 만년설이 성역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신의 낙원, 카르트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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