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2)화 (62/128)

여자가 종종거릴 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아득하게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검은색은 밤바다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복도에는 황녀 전하의 눈과 귀가 자주 돌아다녀요. 그리고 난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고개를 약간 튼 채 말하는 여자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눈에 담았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얼굴이다. 체념 같기도 했다.

물론 상관없이 예뻤다. 어느 나라 여왕처럼 차려입은 옷이나 장신구 때문이 아니라. 사실 여자는 처음부터 아름다웠다. 그 잿더미 속에 쓰러져 있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게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때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존재에 감히 손대지 말고.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느 방으론가 이끌고 간 여자가 방문을 닫다가 멈칫했다.

단정한 눈썹이 의심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나가야 한다. 이성이 지시했다. 그러나 무거워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통제를 잃을 만큼 오래 지체했다는 걸 깨닫자마자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뒤로 물러서려는데 등에 문이 닿았다. 한계였다.

“만지지 마.”

손을 뻗어 오는 여자에게 낮게 뇌까렸다. 달뜬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흐릿한 시야로는 여자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잠시 침묵하던 여자에게서 황당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요? 눈가가 붉고 초점도 안 맞아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데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요?”

그녀가 바싹 다가왔다. 진심으로 겁이 났다. 지금 네가 날 만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생각이 뚝 끊겼다. 코끝에 스치는 여자의 체취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보이는 환영 때문에.

티란에서 잃은 동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정신이 약해지거나 몸이 아플 때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약이 판단력을 흐린 탓인지 오늘따라 환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을 가득 채운 그들은 검을 뽑아 들고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빌어먹을.

“도대체….”

당장 여자가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줌짜리 여자를 당겨 으스러져라 끌어안았다. 놀란 비명이 들렸다. 미안. 잠깐만 이러고 있어. 그대로 문에 기대어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직 아냐. 때가 되면 내 손으로 끝낼 거야. 내버려 둬.”

자신을 내려다보는 동료들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를 감싼 팔이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욕설이 잇새로 샜다. 지독한 전선 후유증이다. 술을 즐기게 된 것도 티란 이후의 일이다. 나아지는 줄 알았던 증상은 정확히 블라센 파견을 기점으로 심해졌다.

아니, 더 제대로 따지자면 메클렌부르크의 죽음을 들은 이후였다. 잠을 자지 못하고 환영에 시달렸다. 이젠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도 의심스러웠다. 계속 쫓아왔는데 그저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뭘 끝내요?”

여자가 안긴 채로 웅얼거렸다. 대답하지 않자 꼼지락거리며 팔을 빼내더니 그의 이마와 뺨에 차례로 손을 얹었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태도였다.

“당신 열나요. 어디 아픈 것 같은데 풀어 줘요. 오늘 대화는 포기할게요.”

“안 돼.”

“왜요?”

“…….”

“말 안 하면 이번엔 진짜로 소리 지를 거에요.”

“말하면 미쳤다고 할걸.”

리온은 픽 웃고는 떠나려는 여자의 손을 겹쳐 쥐었다. 작은 손에 얼굴을 기대자 온기가 번져 왔다. 움찔 굳는 여자가 재밌어서 그녀의 손으로 제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사실은 만져 주길 바랐다. 두 손이 같이 움직였다. 눈썹부터 흉터를 거쳐 콧대와 입술까지. 달래는 듯한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미쳤다고 안 할게요. 말해 주세요.”

이상한 일이었다. 계속 어린애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여자는 전혀 어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애는 그였다. 왜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는지 이해할 성싶었다. 이렇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면,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집에 온 기분이 든다면. 충분히 어리광 부릴 만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여자의 붉은 눈만 선명하게 반짝였다. 보석 같았다. 그만 알던 특별한 보석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과거를 몇 번이고 털어놓을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리온은 충동처럼 입을 열었다.

“티란의 동료들이 보여.”

“…….”

“널 죽이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 방에 가득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이 반쯤 떨어진 녀석도 있고 팔이 없는 놈도 있어.”

“…….”

“그래서 못 놔줘.”

놀란 여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손을 움츠리는 게 뺨으로 느껴졌다. 리온은 입매를 늘여 실실 웃다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미치지 않았다고 해 봐.”

제발, 내가 너한테 미친 게 아니라고. 감히 짊어진 사명을 잊어버리고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꾼 게 아니라고.

“미치지 않았어요.”

여자가 작게 속삭인 건 그때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기 전에 경직된 팔에서 힘이 풀렸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가득 안았다. 리온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단호히 말하는 여자의 품은 당혹스러우리만치 부드럽고 따뜻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 본 적이 있었던가. 까마득한 어린 시절은 이미 기억에 없다. 더 자라고서는 커다란 그를 안아 줄 이가 없었다.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리온은 본능처럼 허리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깊게 파묻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기묘한 안정을 선사했다.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결국.

“엉망이잖아. 우리.”

중얼거리며 웃었다. 여자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건 그래서였다. 그 가슴 뛰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는 헛소리를 지껄일 것 같아서. 콧대를 흰 목덜미에 문지르자 여자가 가는 숨을 내쉬었다. 살냄새와 숨소리, 어느 하나 괴롭지 않은 자극이 없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난봉꾼. 방금 그 방에서 나왔으면서.”

그녀는 그가 요한나와 뭔가를 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리온은 딱히 해명하지 않았다. 해명할 정신도 없었다. 머리는 녹는 것처럼 몽롱한데 심장은 세차게 피를 아래로 흘려보냈다. 쾌락의 갈구가 고통에 가까울 정도였다. 리온은 제가 여자의 목을 물었다는 사실을 신음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아, 아.

물고 빠는 질척한 소리보다도 미약한 신음에 정신이 나갔다. 빨갛게 자국이 남을 때까지 목덜미를 지분거리다가 초점이 나간 눈을 들어 올렸다. 꼭 깨물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턱을 잡고 삼키듯 베어 물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오래 굶다 고기를 맛본 짐승처럼 그때부턴 이성이 뚝 끊어졌다.

닿고 싶었다. 끝까지.

아주 어릴 적에 느꼈던 소유욕과는 같은 듯 달랐다. 가지는 게 아니라 알고 싶었다. 이름을 알고, 즐기는 음식을 알고, 가장 좋아하는 계절과 태어난 달을 알고.

미칠 듯한 배덕감이 심장을 불태웠다. 신보다도 그녀를 궁금해하는 그는 죄인이었다.

죄악이 깃든 생각은 끝이 없어서, 리온은 바하무트가 이 땅에 왔음에 감사했다. 베이른이 불타고 여자가 동화되었음에 감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므로. 엮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고 말았을 테니까.

밀어내려는 손길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늪에 빠지듯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자각만 있었다. 옷을 끌어 내리고 고개를 쇄골 아래에 처박고 빨았다. 둥근 과실은 금단의 열매처럼 달았다.

다시 구원하려고 해 봐. 내 유일한 신이 된 것처럼.

암전처럼 의식이 뚝 끊겼다 돌아올 때마다 여자는 붉게 달뜬 얼굴로 아래에서 헐떡거렸다. 처음엔 분명 앉아 있었는데 다음엔 카펫을 등에 대고 누워 있었다.

붉은 드레스와 비슷한 색상의 카펫 때문에 여자는 피 웅덩이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온은 매번 멀쩡한 바지를 확인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얻고 싶어서. 옷감 몇 개를 사이에 두고 개처럼 허리를 들썩일 정도면 이미 갈 데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를 구했어요?”

지독한 혼돈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여자가 밭은 숨을 내쉬며 질문했다. 언제를 말하는 건가 생각했다. 언제든 대답은 같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바라건대 그때까지만이라도.

작은 몸을 덮듯이 안고 엉망으로 흐트러진 흑발 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지키려는 몸짓이었다. 죽어 간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피를 흘렸다. 핏값을 요구했다. 물러날 수 없다고 속삭였다.

“그렇구나.”

그녀가 누운 채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은 먼 산을 더듬었다. 죽은 사람처럼, 죽어 가는 사람처럼.

“있잖아요. 혼자 있을 때 당신을 좋아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몸에 파고들어 웅웅 울렸다. 리온은 눈을 감았다.

“나한텐 아무도 안 남았으니까 그랬나 봐요. 베이른에서 만난 당신까지 사라지면. 더는 과거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내가 말한 설원의 풍경이었어요.”

알고 있다. 그녀가 표현하려 애쓰는 풍경은 한번 리온을 휩쓴 적 있는 폭풍이다. 티란에서 모두를 잃었을 때. 평생을 바쳐 쌓아 온 모든 것이 재해 앞에서 무너진 순간.

그는 그 모래사막에 혼자 서 있었다.

“광야에서 내가 불을 피우려고 하던 때 생각나요?”

여자가 별안간 덧붙여 물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하니 쉬워 보인다며 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때 아무리 단검에 부싯돌을 부딪쳐도 불이 붙지 않았죠. 근데 당신이 옆에서 그랬어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네 빛이 유일하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답지 않은 낭만적인 충고였다. 그러나 그다음엔 정말로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필요한 건 무엇이었던가.

“나는 어두운 길의 불꽃이 되어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자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심장이 뻐근하게 조였다. 손에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초조한데 무엇을 움켜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과분한 애정을 받기엔 이미.

“이제는 당신 안 좋아해요.”

바닥이 검게 부식되다 무너졌다.

“싫어해요.”

발아래로 같이 오기로 했던 지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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