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1)화 (61/128)

“들여보내.”

요한나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베로니카는 들어오는 리온을 낯설게 응시했다. 그는 검은색 기사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흰색이나 금색과 달리 그 특유의 사나운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리온은 곧장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베로니카를 보자 드물게도 동요했다. 꿰뚫듯 쳐다보는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졌다. 마치 불꽃이 담긴 듯 강렬한 시선에 살갗이 녹는 환통을 느꼈다.

“베르크 경, 서약의 예행을 할 상대는 이쪽이랍니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 놨어도 그편에만 시선을 주니 서운하네요.”

황녀가 웃음기 담긴 투로 말했다. 그제야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걸음을 디딘 그가 옆을 스쳐 지나갈 땐 저절로 숨이 멈췄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색채가 강렬해 잠깐 눈길이 갔을 뿐입니다. 누굴 어떻게 꾸며 놓든 황녀 전하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대륙에서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한쪽 무릎을 굽힌 리온이 고저도 없는 목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실망과 절망이 절반씩 엄습해 왔다. 평소와 다르게 흰 장갑을 낀 리온이 의자에 앉은 황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요한나는 만족스럽게 베로니카를 일별했다.

악취미. 소유욕. 흥분과 즐거움.

사랑이 아니다. 황녀는 비싼 인형을 사서 친구에게 자랑하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인형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하긴, 애초에 사랑이었다면 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애 같은 건 만나지도 못하게 멀리 떼어 놓았으리라.

그녀는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 여기선 괜찮은 척해야 한다.

머리로는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표정 관리는 쉽지 않았다. 예전에 느끼던 비참함의 문제는 진작에 넘어섰다. 베로니카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심지어 칼날을 휘두를 인간은 그녀가 마음을 쥐여 준 남자였다.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멀어졌다. 하릴없이 그들을 보고만 있자 황녀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곤 갸웃거렸다.

“어머,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 드레스가 불편한 거니?”

리온까지 이쪽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질문이 자신을 향했다는 걸 깨달았다. 베로니카는 공황 속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회복이 덜 되었는지 쉽게 피로를 느낍니다. 송구합니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굳은살도 박여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믿었는데.

“그래? 오늘은 좀 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아쉽구나. 그래. 건국제가 코앞인데 체력을 아껴야지. 옷은 그대로 입고 가도 좋아.”

요한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이상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성격이 둥글어지는 게 아니었나? 동화 속 공주님은 발랄하고 사랑스러웠는데. 항상 악역은 왕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쁜 왕비였는데.

어쩌면 누구나 마음속에 구멍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핍이 없는 인간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탕.

베로니카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단두대의 비명 같다고 생각했다.

잠시 방을 향해 걷다가 유독 블라센이 잘 보이는 창문 앞에서 멈춰 섰다. 오늘따라 황녀가 기거하는 서탑은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녀가 통로에 서 있어도 말을 걸어오는 이 하나 없을 만큼.

방을 코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로니카는 그대로 서서 창밖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기다렸다. 이 길을 반드시 지나가야 할 사람을.

미련하게도 직접 확인하고 묻고 싶었다.

***

리온은 문이 닫히고도 한참을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를 구하려 뛰어들었을 때, 그가 본 것은 그녀를 지키는 바하무트들의 모습이었다. 알처럼 둥글게 감싸고 불길이 뱀 같은 혀를 내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녀는 괴물의 비호하에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창백해도 그때보단 확실히 생기가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과 붉게 젖은 입술. 리온은 홀린 듯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그토록 오래 참았으니 이 정도는.

“일어나 내 옆에 앉아요.”

가라앉는 사념을 뚫고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온은 고개를 들어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허락만 하신다면 예행연습을 먼저 끝내고 싶습니다.”

“서둘러 해치우곤 가 버리려고요? 그런 건 마지막에 해도 좋잖아.”

요한나는 으쓱하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럼에도 리온이 움직이지 않자 시녀가 다가왔다.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세공이 들어간 은잔과 포도주가 놓였다.

“오랜만에 만나러 와선 계속 이렇게 섭섭하게 굴 건가요?”

황녀가 슬슬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병상에 누워 있던 건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갑옷이 녹아 들어간 피부에는 아직도 화상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리온은 번거롭게 낀 흰 장갑을 빤히 보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황녀 자체는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가 해코지할 대상은 문제가 되었다.

“한 잔 마셔요. 술을 꽤 즐기는 편이라던데.”

조르륵 맑은 소리와 함께 달큼한 냄새가 풍겼다.

“혹 크라우스 경이 전하께 제 험담을 올렸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할 말은 아니라고 전해 주십시오.”

“아하하, 그럴 리가요. 크라우스 경으로부터 들은 말이 아니랍니다. 방금 나간 내 친구로부터 들었죠.”

입술에 닿은 술잔이 멈칫 굳었다. 리온은 말없이 술잔을 끝까지 기울였다.

황녀는 술잔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그의 목울대가 다디단 독을 꿀꺽꿀꺽 삼켜 내리는 모습을 응시했다.

“실은 나는 남대륙의 포도주는 즐기지 않아요. 남쪽에서 올라오는 산물은 모두 불경한 느낌을 줘요. 그렇지 않은가요? 요즈음 평민들 사이에 인기를 끄는 감자만 해도 그렇죠.”

잔을 깨끗이 비운 보람도 없이 옆에 있던 시녀가 도로 술을 따라 주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검보라색 액체는 피를 닮았다.

“성전에 적히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래요. 어떤 면에선 바하무트 같은 식물 아닌가요? 씨앗이 아니라 뿌리로 번식한다고 하더군요. 그 특이성이야말로 악마의 식물이라는 증명이죠.”

리온은 동의하는 대신 가만히 술만 들이켰다. 황녀의 말에서 그는 앞으로 일어날 종교 전쟁의 기미를 직감했다.

높으신 분들이 왜 바하무트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고도 남았다. 그들은 애초에 전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바하무트가 사라진다 해도 그다음 해 대륙의 어느 땅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개종까지 해 가며 고개를 수그린 체사니아와 탄비아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지. 작물을 태우라는 명은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될 테니까.

리온은 설핏 웃었다.

꽤나 심각한 추측까지 내렸으면서 결국 머릿속에 자리한 건 또 그 여자였기 때문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던가. 고집스럽게 굶다가 감자 몇 개에 넘어온 적이 있었다. 얼굴을 붉히며 한 번 더 권해 달라고 했을 때 리온은 처음으로 여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런 표정을 지어요?”

황녀의 부드러운 손이 얼굴을 돌린 건 그때였다. 리온은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말씀대로 남부의 작물은 사악하다고 생각하던 중입니다.”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거야 교황을 견딘 리온에겐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리온은 미소 짓는 황녀를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이하게 몸이 달았다. 바늘이 혈관을 타고 흐르듯 따끔거렸다. 잘 아는 충동이다. 여관에서 여자와 함께 지내는 내내 억누르던 욕망이니까.

“그래요? 그럼 나랑 뜻이 같은 거네요.”

아, 술인가.

리온은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시녀도 시종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진작에 눈치챘을 일을 여자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탐욕이 지나치다 못해 흘러넘쳤다. 리온은 벌레처럼 기어오르는 혐오에 그의 옷깃까지 내려간 손을 잡고 입술을 늘였다.

“전하, 외람되오나 어떤 몰상식한 인간이 포도주에 약을 탄 듯합니다. 당장 사람을 불러 조사하심이 옳습니다.”

“리온.”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몸을 떼어 내며 일어났다. 약이 돌 때까지 기다려선 안 된다. 흔들리는 시야를 감지하고 리온은 욕을 짓씹었다. 얼마나 넣었는지 고작 넉 잔 마신 것으로 이 정도였다.

“감히 이런 짓을 획책한 질 낮은 인간은 황궁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마땅합니다. 서약의 예행은 건국제 당일 이른 시각에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비난조가 안 되도록 노력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황녀를 질 낮고 몰상식한 인간으로 만든 말은 잘못 받아들일 여지 없이 명백한 거절이었다. 둘로 보이기 시작한 요한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수치심을 느껴야 할 건 이쪽 아닌가.

“베르크 경. 그 문을 열지 말아요.”

“전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바깥의 기사들에겐 알려야 합니다.”

“지금 나가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라면 이미 하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요한나는 일어나 쫓아오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벌컥 문을 열고 햇빛이 쏟아지는 복도로 나왔다. 바깥에 거느리던 사용인까지 치워 뒀는지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이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약이 아니었던가. 이토록 질 나쁜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리온은 욕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뗐다. 계단을 내려갔다. 거침없는 다리가 굳은 건 가는 길에 우뚝 선 여자의 환영을 봤을 때였다. 점입가경이군. 리온은 머리를 거칠게 헝클이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잠깐만요.”

팔을 잡는 가느다란 손길에 걸음이 멎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는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마치 영혼까지 붙들린 사람처럼.

“얘기 좀 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그를 어딘가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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