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로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날은 온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다.
- Evangelium secundum Lucam 21:25-35
***
깜빡, 깜빡.
눈을 뜬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천장을 보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고.
반복은 희극의 장치로도 쓰인다지만. 평생 겪을 기절을 근 몇 개월 동안 다 채운 것 같다.
“물 좀 주세요.”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베로니카가 입을 열자마자 방에 있던 하녀는 놀라서 비명을 빽 질렀다.
정신없이 물을 받아먹고, 한 번 더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난 후에는 소화에 좋은 죽을 먹었다.
창문 아래를 내다보니 황궁의 그늘에 남아 있던 눈이 거의 사라졌다. 훌쩍 다가온 봄보다도 아직 카르트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벌써 건국제가 코앞입니다.”
찾아온 오스카가 설명했다. 오래 쓰러져 있었던 모양이다.
“토벌의 공로를 인정해 당신을 황궁 연회에도 초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큰 의미인지 와닿습니까? 평민이 건국제 연회에 발을 들이는 건 카이젠미어 역사상 처음입니다.”
오스카는 이 말을 하면서 약간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마치 친구의 성공을 제 성공처럼 기뻐하는 사람 같다. 아쉽게도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지만.
“토벌대는 어떻게 됐어요?”
조용히 묻자 오스카가 멈칫했다. 그가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이 굳었다가 얼른 간추렸다.
“이후로도 토벌대는 여러 번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처음의 피해가 컸는지 바하무트가 더는 성벽으로 접근해 오지 않습니다. 전부 당신이 해낸 일입니다. 부상자는 존재하지만 예상 범위고, 괄목할 수준은 아닙니다.”
더는 오지 않는다고?
베로니카는 미간을 좁혔다. 좋은 소식인데도 왜인지 불길했다.
“왜, 마음에 걸리는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실은… 의식을 잃기 직전에 바하무트의 기억 같은 걸 봤거든요.”
오스카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떴다. 베로니카는 금방이라도 제 말을 옮겨 적을 듯한 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새로운 정보는 없어요. 그냥 과거의 기억이었어요. 처음 우리가 사는 곳을 봤을 때, 그것이 느꼈던 부러움 같은 거.”
“부러움…?”
“되게 사람 같죠. 사실 부러움보다 더 서글픈 감정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연민이 들었어요. 난.”
허공을 보며 말하던 베로니카는 문득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가 그녀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연민, 이라고 했습니까? 그 괴물들한테요?”
아.
“혹시 불길 속에서 완전히 동화되었던 거 아닙니까?”
말실수했다. 체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해 못 할 감정인데.
의심 섞인 시선이 베로니카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당장 누군가를 부를 태세였다. 의사든, 병사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에요. 표현이 잘못되었던 것 같아요. 약 때문에 아직 머리가 어지러운가 봐요.”
베로니카는 서둘러 변명했다. 이마를 짚는 시늉을 하고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리자 오스카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술만 열었다 닫았다. 모르긴 몰라도 제 상태가 끔찍이도 아파 보이는 게 분명했다. 오스카가 한숨만 푹 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으니까.
“의식을 되찾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신체를 완전히 회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내일 눈 뜰 시각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일단은 푹 쉬십시오.”
“네네, 잔소리 잘 새겨듣겠습니다.”
베로니카는 이불 속에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 뜰 시각….
그때 문득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목소리가 솟구쳤다. 눈 떠.
“오스카.”
돌아서던 오스카가 고개만 돌려 쳐다보았다. 베로니카는 이불을 빼꼼 내리고 질문했다.
“그날, 혹시 불 속에서 절 구해 준 게 당신이었나요?”
“…예. 저였습니다.”
오스카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베로니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불길이 엄청났을 텐데.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화상은 입었지만, 성력이 있는 인간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어쩐지 굳은 얼굴이었다. 아픈 상처를 다시 떠올리니 힘든 건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미안해져서 얼른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신이 도우셨습니다. 앞으로는 무모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귀띔이라도 좀 해 주십시오.”
애원 같은 부탁을 끝으로 오스카는 등을 돌렸다. 방문이 닫히며 달칵, 소리를 냈다. 당연한 대답을 들었는데도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왜 리온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반대편 토벌대에 속해 있었으니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데.
지긋지긋한 미련은 상상에 재능이 있음이 분명했다.
리온은 서투른 고백에 잔혹한 대답을 돌려준 사람이다. 안 봐도 불 보듯 뻔했다. 걱정도 안 하고 찾아와 보지도 않았으리라. 그는 그녀가 생각하던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계속해서 마음을 다칠 이유는 없어.
몸을 말고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주문을 외웠다. 아셀도르프, 아셀도르프, 아셀도르프.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서.
베로니카는 그가 찾아오면 이제 똑같이 냉정하게 대하리라 다짐했다.
리온은 의무를 중시하는 인간이고, 성력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찾아올 테니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온은 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회복한 베로니카가 멀쩡한 음식을 씹고 황궁의 정원을 산책하게 되기까지 한 번도.
마치 그녀의 존재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요한나 황녀와 부단장 필립까지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건 굉장히 섭섭한 일이었다. 아니, 섭섭하다는 말은 너무 가벼웠다. 베로니카는 서러웠다. 그리고 한 번 더 실망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때맞춰서 잘 왔네. 이리 가까이 오렴.”
건국제가 다가올수록 베로니카를 제일 많이 찾는 사람은 의외로 요한나였다. 황녀는 건국제 준비니 뭐니 하며 자꾸만 베로니카를 오가게 했다. 잘해 주는 의도가 불분명해 부를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오늘은 불러서 와 보니 새빨간 드레스 한 벌을 보여 주었다. 상체와 팔은 태가 드러나게 달라붙고 허리 아래부터는 풍성하게 솟아오르는 형태였다. 드레스는 선명한 색상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너만을 위해 제작된 맞춤 드레스란다. 건국제 때 입을 옷이 없을 것 같아 마련했어.”
“제 드레스요?”
베로니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춤출 때 화려한 의복을 걸쳐 보긴 했어도 저렇게 좋은 옷감은 처음이었다. 붉은색이 쨍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매혹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떨떨하게 서 있자 황녀가 재봉사로 보이는 여인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생전 처음 입는 옷은 입기도 어려웠다.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욱여넣자 그때부턴 하녀들이 루비 귀걸이를 달아 주고 티아라를 씌워 보는 둥 그녀를 데리고 인형 놀이를 했다.
베로니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재밌는지 황녀는 옆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며 구경했다.
“듣기론 건국제 연회에 평민을 불러들인다고 수군거리는 귀족들도 있다더구나.”
베로니카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냐. 감히 황제 폐하의 결정에 말을 얹은 사람들은 네가 카르트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는지 모르는 이들이지.”
황녀가 비스듬히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베로니카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베이른을 떠날 때만 해도 어깨 위던 단발은 어느새 쇄골에 닿을 만큼 길었다.
“그럼 이런 치장은 그분들에게 보여 주시려는 목적인가요?”
베로니카는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다가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속으로만 생각하려던 건데. 맙소사.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황녀는 화내지 않았다.
“으음, 글쎄. 그런 것도 있겠지. 하지만 진심으로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커. 과거의 공로가 아니라 미래의 희생 측면에서.”
미래의 희생?
베로니카는 알아듣지 못해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황녀가 눈이 부실 만큼 활짝 웃었다.
“동화자의 숙명이라니 안타깝기 그지없지. 리온이 곤란해 보여서 여태껏 비밀을 지켰지만. 이번 일로 네가 진실을 안다고 도망갈 인간도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단다.”
리온. 비밀. 두 요소가 결합하자 뭔가를 감추는 듯했던 그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전장을 구르다 죽을 말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던.
“바하무트는 한 마리를 죽이면 그것이 낳은 자식들까지 줄줄이 죽어 버린다고 하지. 너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니?”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였다. 붉은 보석이 달린 무거운 귀걸이는 작은 움직임에도 휘청휘청 흔들렸다. 요한나는 설명이 쉬워졌다는 듯 미소 짓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동화자는 어떨까?”
“…….”
“동화의 주체가 되는 괴물이 죽고 나면, 동화자는 어떻게 될까?”
질문은 간결했다. 이해하기도 쉬웠다. 다만, 다만.
“난 죽어 버릴 동물 이름은 안 불러.”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던 퍼즐 조각이 거짓말처럼 맞춰졌다.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죽음을 소원한다는 사실뿐이야.”
“그러니 나를 위해 울 필요는 없어. 용서도 하지 마. 절대로.”
그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베로니카는 그야말로 가축이었다. 도축의 날을 위해서 긴 긴 시간 기르고 먹이는.
그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살렸다. 파괴하기 위해 구원했다. 인생을 통틀어 그녀가 아는 최고의 모순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이는 베로니카를 시녀들이 잡아 주었다. 꿈이라면 악몽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꿈이길 바라면 현실이 된다. 불타오르던 베이른이 그랬듯이.
그때 운명처럼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온 베르크 경의 방문입니다.”
베로니카를 내려다보는 요한나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