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9)화 (59/128)

기사단에게 달려들던 바하무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필립은 퇴각 나팔로 기사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베로니카를 태운 말은 쏜살같이 평야로 달려 나갔다. 쏜 화살. 얼마나 정직한 표현인지.

“뭐야, 진짜로 따라가잖아.”

필립의 옆에 있던 부관이 넋을 뺀 채 중얼거렸다. 규칙적으로 성벽을 두르듯 서 있던 바하무트들이 모조리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피리 부는 사나이다. 민담이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뭘 하고 있나? 기름 부대를 들고 쫓아가. 북문으로 갈 필요도 없겠어.”

필립이 턱을 쓸며 냉정하게 말했다. 소름 끼치리만치 기이한 광경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이편의 바하무트는 알아서 다 모여들 것이다. 한데 모였을 때 불을 질러야 한다.

한참 달리던 말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바하무트를 발견하자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몸부림치자 힘겹게 말의 목을 안고 있던 여자는 내동댕이쳐지다시피 떨어졌다. 바하무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으며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기도회에서 은총 한 자락이라도 얻으려는 신도들 같았다. 벌레라면 새카맣게,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손길에 말과 여자는 단숨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놈들이 정신 팔린 사이에 기름으로 경계를 둘러라!”

기사단에서 가장 발 빠른 기사들이 말을 타고 내달렸다. 넓게 원을 돌면서 봄볕이 쏟아지는 벌판에 기름을 뿌려댔다. 장작은 바하무트. 제물은 동화자. 걸작이다.

“준비! 당기고, 쏴라!!!”

불씨를 실은 화살 수십 개가 하늘을 갈랐다. 화르륵 불이 붙자 괴물 떼는 마치 한 몸처럼 보였다.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살려 줘.

낙마한 이후로 세상이 시커메졌다. 베로니카는 불붙은 의식을 헤매며 몸을 웅크렸다. 부상이 낫지도 않은 몸으로 춤을 추고, 밤을 새우고, 무리에 무리를 거듭했다. 객기의 대가다.

이렇게 죽는 거야? 바하무트가 어디서 왔는지, 뭘 원하는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억울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새까만 바닥에서 반짝이는 점들이 보였다. 하얗고 노란 점. 아니, 별이다. 흐르는 은하수와 별이 있는 세계다.

베로니카는 그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 여긴 하늘 너머인가 보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을 때 여러 색이 섞인 파란 구슬이 점점 커지고 가까워졌다. 베로니카는 그 구슬이 자신이 사는 땅임을 인지했다. 모래색 사막과 초록 숲, 갈색 땅과 파란 바다.

아름답다. 바하무트의 기억이었다.

그중 가장 시선에 들어온 건 구슬의 대부분을 차지한 파란 부분이 아니라 노란 황무지였다.

광야. 그곳에 모여든 바글바글한 생명. 하나하나가 다 다르게 생겼다. 베로니카는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외울 만큼 오래도록,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르게.

바하무트의 붉은 눈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았다.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확대된 얼굴과 모공에서 솟구치는 땀까지도. 누군가의 배 속에 있는 웅크린 태아까지도.

이 감정은 뭘까.

놀라움? 반가움? 부러움과 서러움? 분노와 울분과 억울함?

아니, 그나마 가장 가까운 감정은 질투였다.

질투가 난다. ‘나’를 가진 존재에게. 특이하고 특별하여 단 하나뿐인 존재에게.

저 땅에 사는 생물들은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알고 있을까. 한없이 커다랗고 이어진 세계에서 자아를 갖췄다는 사실이?

나는, ‘나’는…!

“…눈 떠.”

그 순간 사념을 깨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보고 있던 구슬이 산산조각 나며 암흑 속으로 흩어졌다. 벌써 두 번째다. 그의 방해를 받는 건. 처음 동화될 때도 이랬다. 그가 나타나서. 끼어들어서.

떠나려는 자신을 붙들 듯이 꽉 안고 있다. 숨 막히도록 조여지는 압박감이 기분 나쁘지 않다.

“제발 눈 떠. 이런 식은 아니야. 빌어먹을.”

볼을 닦아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눈물을 흘려보냈다. 놀랍게도 바하무트가 불쌍해서, 서글퍼서, 가슴이 사무치도록 슬퍼서.

“울지 마.”

세상이 모조리 슬프다. 그녀를 안아 든 남자의 목소리 또한 슬픔에 젖어 있었다. 익숙한 음성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꿈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제 와 자신을 이렇게 다정하게 안을 리 없으니까.

“리온….”

베로니카는 꿈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입술이 남은 기력을 다 쓰는 바람에 의식은 바닥없는 심연으로 형편없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

카르트의 동부를 맡은 기사단이 이상을 감지한 건 문밖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하인즈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말마따나 바하무트는 약을 먹은 쥐처럼 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리온은 예리한 눈으로 그들이 가는 방향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뒤쫓아 가 볼까.”

“뭐? 원래의 지시를 잊은 겐가? 우리 목적은 바하무트 섬멸이 아니라 집 주변 청소 후 안전 귀가임을 잊지 말게.”

하인즈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후 말을 이었다.

“유인하는 건지도 몰라. 머리도 없는 주제에 제법 머리를 쓴다고. 베이른에 갔던 기사단이 매복에 당한 소식을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럼 나 혼자라도 가지. 기사단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원군 자격이니 상관없겠지.”

리온은 하인즈가 끼어들 틈도 없이 말을 돌렸다. 엄밀히 따지면 원군이든 뭐든 토벌대 안에 속해 있으니 단독 행동은 피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런 점들은 무시할 만큼 강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를 찾으러 온 거예요. 분명히 들었어요. ‘찾았다’고.”

공교롭게도 바하무트가 달리는 방향은 반대편 토벌대가 있는 쪽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늘로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그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리온은 확신에 박차를 가해 달렸다.

마침내 원하던 풍경에 다다랐을 때는 웬만한 끔찍한 전장에 익숙해져 있던 그조차 할 말을 잃었다. 바하무트들은 눈먼 생쥐처럼 불바다로 뛰어들었다. 기사단은 빙글빙글 돌며 계속해서 기름과 불을 더해 나갔다. 리온은 곧장 필립에게로 말을 몰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필립은 반대편에 있어야 할 리온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동화자가 바하무트를 유인하고 희생했습니다.”

리온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필립의 자색 눈동자가 타오르는 불길을 담고 번득였다.

“늦은 인정이지만 확실히 당신이 데려온 동화자는 전술적 가치가 있었습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죽이지 않길 잘했습니다.”

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늘 높이 피어오르는 불의 축제를 바라봤다.

계속해서 달려드는 바하무트들 때문에 기사단은 끊임없이 기름과 불을 들이붓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리온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릉, 날카로운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필립의 눈에 의구심이 스쳤다.

“뭘 하려는 겁니까?”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 머리를 돌리는 것으로도 의사는 확실히 전해졌다.

“미쳤습니까?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저기선 살아남지 못합니다. 저만한 숫자는 메클렌부르크 경도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알면 한 사람도 끼어들지 못하게 해. 더는 누구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리온이 낮게 내뱉자 손에 들린 역십자가가 햇빛을 반사해 예리하게 빛났다. 아포칼립시스. 무엇이든 벨 수 있지만 폭주하면 인근의 생명력까지 집어삼키는 게걸스러운 검.

필립의 말이 맞다. 메클렌부르크는 저런 곳에선 살아남지 못한다.

그는 절제를 아는 기사이고, 절대로 신의 검을 난폭하게 휘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티란에서 일어난 비극의 날, 만약 그 자리에 리온이 아니라 메클렌부르크가 있었더라면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를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이 신성 기사단의 영웅이 블라센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나 리온은 달랐다.

“베르크 경!!!”

그의 등 뒤로 다급한 부르짖음이 들렸다. 상관하지 않고 달렸다. 시야를 가로막는 거구의 바하무트를 도륙할 때마다 피가 튀고 녹슨 금속의 비린내가 솟구쳤다. 거침없이 뛰어오른 흑마가 불꽃의 경계를 넘었다.

신이시여. 여자를 살려 주십시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불길을 검으로 가르고 몸부림치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뜨겁게 녹는 갑옷 아래로 살이 타는 열감이 느껴졌다.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지만 않으면 다시 재생된다.

하지만 여자는, 그 여자는.

리온은 처음으로 신의 기사가 된 것을 후회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여기서 제 모든 것을 바칠 테니 한 번이라도 보게 해 달라 청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럴 권리도 없었다. 애초에 그의 모든 것을 신께 바쳤기 때문에, 그에겐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신에게 내줄 것도. 감히 내뱉을 약속도.

아, 신보다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으니 후회는 얼마나 큰 죄악인가.

“Comedite me. (나를 먹어.)”

그가 신의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뇌까렸다. 신검은 생명력을 먹는 검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삼키고 길을 열어라.

어렸을 적 심연의 지옥은 영원히 타는 불꽃이라 했다.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는 나락.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같이 타오를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가 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서 춤추듯이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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