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8)화 (58/128)

“어쩌다 다쳤어요?”

베로니카는 오스카의 도움으로 말에 오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스카는 머리에 하얀 붕대를 매고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안색이 더 나빠 보이는데요.”

“피곤해서 그래요. 끝나고 쉬면 돼요. 어차피 도시를 한 바퀴 도는 게 다잖아요.”

베로니카는 별거 아닌 척 너스레를 떨며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려 보였다. 오스카는 검을 한 자루 건네더니 정정해 주었다.

“정확히는 반 바퀴입니다. 토벌대는 남문으로 나가 두 갈래로 찢어질 예정입니다. 부단장님이 이끄는 부대는 시계 방향으로, 크라우스 경이 이끄는 부대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북문으로 함께 들어오게 될 겁니다.”

“크라우스 경이라면, 선두에 있는 대머리 기사님이요? 연륜이 있어 보이는데 메클렌부르크 경의 대리인 건가요?”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옆에 섰던 기사가 이쪽을 쳐다봤다. 큼, 오스카가 목청을 가다듬고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머리… 아니, 크라우스 경은 베르크 경과 동갑입니다.”

“설마 지금 웃음 참는 거예요? 잠깐만, 그리고 누구랑 동갑이요? 리온?”

베로니카는 경악으로 입을 딱 벌렸다.

무조건 메클렌부르크와 또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라우스 경이 노안이긴 하지.”

그때 아까 쳐다봤던 기사가 동상처럼 꼿꼿이 정면을 본 채 끼어들었다. 투구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의외였다. 이 사람들, 사람이 맞긴 하구나.

“말조심하자고.”

입술을 씰룩거리며 대답한 오스카가 투구를 썼다. 그러자 오래지 않아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기사들은 일제히 자세를 바로 세웠고 창대를 든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땅을 찍었다. 베로니카도 덩달아 허리를 세웠다. 이윽고 앞에서부터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고삐를 잡으며 주의를 줬다.

“꽉 잡으십시오.”

기사단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열쇠 대로라 불리는 중앙로를 따라 성문으로 내려갔다. 어느새 길 양옆에는 시민들이 모여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아저씨들과 수줍게 손을 흔드는 여자들, 펄쩍펄쩍 뛰면서 쫓아오는 아이들이 보였다. 거리의 창문으로 사람들이 내다보고 여기저기서 승리를 기원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자랑스레 흔들었다.

“베로니카!”

그때 산만한 군중 속에서 아는 목소리가 꽂혔다. 베로니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양팔을 붕붕 휘두르는 한나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같이 손을 흔들기엔 기사단이 모두 정면만 보고 있어서 눈으로만 인사했다. 옆에 선 에밋은 많은 인파에 한나가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활달한 아내와 안절부절못하는 남편. 행복한 가정의 전형이다.

그래, 정신 똑바로 차리자. 그때와는 달라졌어.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워야만 해.

베이른을 막 나왔을 때는 곁에 리온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결심을 다진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아니,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성벽 둘레를 돌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적만 깔끔하게 죽이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정말 베로니카를 의식한 경우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밖에 나간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만약 그들이 정말 자신을 찾고 있다면, 그때는….

부우우, 성벽 위에서 나팔이 길게 울었다. 남문이 위로 기기긱 올라갔다. 통제된 길목에는 시민들의 환호도 사라지고 긴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카르트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의 정적 속에서 필립이 대평원을 배경으로 검을 뽑아 올렸다.

“Cui Deus oculos aperit? (신이 누구를 향해 그의 눈을 뜨시는가?)”

전원 절걱 소리를 내며 발검했다. 온 땅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대답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Ad filium! Ad militem! Ad populum! (그의 아들과, 그의 기사와,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거센 말발굽이 땅을 박찼고 4열 종대로 기사단이 찢어졌다. 피가 끓어올랐다.

베로니카는 오스카에게 받은 보잘것없는 검을 꽉 쥐고 얼굴을 때리는 바람을 맞았다. 그들의 선두에는 부단장 필립이 있었고 리온은 반대 방향으로 갈라진 듯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남서향부터 천천히 처리하고 올라간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바깥의 풍경을 똑바로 보자마자 왜 대포로는 해결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진 바하무트는 모두 심장에 있는 눈을 가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괴롭힘당하는 아이처럼 무릎을 세우고 팔로 휘감은 자세.

붉은 눈을 부수지 않으면 끝도 없이 재생한다. 대포로 아무리 쏴대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기름을 두르고 불을 질러라!”

필립은 그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려 했다.

기름, 불, 유도.

순간 비책이라 부를 만한 뭔가가 뇌리에 스쳤다. 베로니카는 더 따져보지 않고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스카. 날 부단장님께 데려다줘요.”

“갑자기 왜, 뭐라도 느낀 겁니까?”

“저것들은 나를….”

“설마 그런 얘길 다른 사람한테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내가 한 곳으로 유인할 수 있어요. 저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어요.”

자신을 쫓고 있다는 말을 목 끝에서 삼키고 바꾸어 말했다. 그때쯤 엄선된 1진이 바하무트와 격돌했다. 버석, 성력을 휘감은 검신이 두꺼운 가죽에 박혀 들어갈 때마다 서늘한 파열음이 솟구쳤다.

말들이 발을 높이 구르며 흥분하고 날붙이가 허공을 갈랐다. 과연 신성 기사단의 솜씨는 대단했다. 블라센 산맥의 환상에서 메클렌부르크를 봤을 때도 했던 생각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수적으로 너무나도 밀렸으니까.

“여기서 개죽음당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까 부단장님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즉시 말하라고 하셨어요.”

오스카는 더 캐물을 듯하다가 시간 낭비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빠르게 말을 몰아 필립의 부관에게 접근했다. 보고할 것이 있음을 알리고 필립이 그녀를 상대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 짧은 새 환상이라도 봤습니까?”

필립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투로 질문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젓곤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요. 다만 저런 식으로 싸우다간 북문까지 가는 길에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잘 짜여진 전투를 보던 필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잘 싸우고 있을지 몰라도 도중에 더 많은 바하무트가 몰려오면 지치고 말 거예요. 효율적이지 못해요.”

“그래서? 무슨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저렇게 산발적으로 떨어진 적과 싸울 때는 지금의 전형이 최선입니다.”

“군집시킬 수 있어요.”

베로니카의 단언에 필립이 말을 멈췄다. 베로니카는 숨을 가다듬고 확신을 주는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제가 미끼가 되어 한 자리에 유인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그때 바하무트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어요. 심지어 그들은 기사단에게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아까 행군을 시작할 때 이미 계획했던 생각이다. 구체적인 발상은 기름을 보고서야 생각났지만.

어쨌든 ‘그들’이 베로니카를 보고 싶어 한다면, 베로니카도 만나서 이유를 묻고 싶었다.

말끝에 기름 부대를 쳐다보자 뒤에 앉은 오스카가 급히 숨을 들이켜고 필립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희생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바하무트가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면 진작에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해 대신 동화를 선사했다.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당신 하나에게 바하무트가 몰리리라는 발상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불을 지르라면서 희생은 아니라는 주장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매한가지고.”

“한 번만 믿어 주세요. 부단장님이 이 계획에 투자해야 할 건 말 한 마리뿐이에요.”

“말 한 마리?”

필립의 시선이 오스카에게 향했다. 베로니카는 확인해 주듯 덧붙였다.

“혼자 타고 갈게요. 말을 잘 다룰 필요도 없죠. 멀리 돌진하기만 하면 되니까.”

“안 됩니다.”

끼어든 건 오스카였다. 그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필립이 한 손을 들고 제지하자 더는 말하지 못했다.

“베르크 경, 내려서 말을 내주게.”

“부단장님.”

“전장이다. 불복시 규율대로 처리하겠다.”

더 말을 얹으면 목을 베겠다는 뜻이었다. 오스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릴 수 없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끌어내려.”

필립의 간결한 지시에 옆에 있던 다른 기사들이 오스카의 목젖에 칼끝을 들이대어 내리게 했다. 그의 목에서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사이 필립은 의구심을 띤 눈으로 베로니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신 뒤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조건이 있어요. 만약 제 작전이 먹혀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으면, 딱 한 번만 제 편이 되어 주세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필립은 가늠하듯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화자에게 교회의 명예를 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비텔스바흐 백작가의 이름으로라면 한번이 아니라 열 번도 도와주겠습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광야로의 이주는 아군이 필요할 테니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베로니카는 말을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당하게 말했어도 무섭지 않을 리 없었다. 손발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만용이 초래한 자살일지도 모른다. 죄 없는 말만 죽고 끝날 수도 있다. 그래도, 혹시 이렇게 해서 더 많은 생명이 살 수만 있다면.

베로니카는 세차게 박차를 가했다. 갑자기 떨어진 신호에 놀란 말이 히히힝 울더니 땅을 걷어차고 달려 나갔다. 베로니카는 몸을 깊이 숙이고 말의 목을 부여잡았다. 달려. 이대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 바하무트의 진실에 이를 때까지.

동화된 이후 눈꺼풀 속에 하나의 눈꺼풀이 더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이 뜨이면 환상을 봤고, 그것을 뜨면 바하무트도 그녀를 의식했다.

두근. 베로니카는 붉은 눈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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