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7)화 (57/128)

베로니카는 그 뒤로도 서고를 꼼꼼히 뒤졌다. 양이 양이다 보니 밤새도록 뒤졌는데도 다 보지 못했다. 광야 이후로는 특이한 부분이 딱히 없어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지겨운 얘기를 꾸벅꾸벅 졸면서 읽어야 했다. 덕분에 카이젠미어의 역사에 대해서는 방대한 지식을 습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과로에 부상에 수면 부족까지 겹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안 돼, 아직 쓰러지지 마.

비틀거리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사실만이 선명했다.

그 기나긴 역사 동안, 광야는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

불모의 땅이니 누구도 탐내지 않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만약 그것이 예언의 증명이라면?

누구한테 말해야 하지.

베로니카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리온? 아니, 지금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아.

오스카? 그에게는 힘이 없는걸.

카르트의 백만 인구를 광야로 이주시킬 사람. 누가 있지. 교황? 황제?

떠오르는 사람은 죄다 베로니카에게서 너무 먼 사람들뿐이었다. 누가 한낱 동화자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누가 내일의 위험을 위해 오늘의 풍요에 불을 지르겠는가.

결국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수밖에 없었다.

“밤새 서고에 있었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구나.”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베로니카를 향해 황녀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이른 시간이라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절뚝이는 다리를 흘금 보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원하던 자료는 찾았니?”

“아니요. 찾던 기록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예의에 맞지 않는 시각임을 알면서도 감히 뵙기를 청했습니다.”

베로니카는 황녀에게 서고에서 발견한 기록과 추측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말할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으려 노력하자 반작용처럼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뜨거운 차를 마시던 요한나의 표정은 경청할수록 점차 싸늘해졌다.

“믿을 수 없는 얘기야.”

그녀의 감상은 짧았다. 그러나 절망적이기만 하진 않았다.

“물론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폐하께 지나가는 투로라도 말씀드려 볼 수는 있겠지.”

“정말인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요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네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 있겠니? 하지만 기대는 말려무나. 말했다시피 믿을 수 없는 얘기야.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지. 전언만 올릴 따름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이 예상 외로 풀리고 있었다. 거듭 고개를 숙이는 베로니카에게 황녀는 할 말이 끝났다면 이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베로니카가 허리를 세운 순간이었다.

“아, 대신 오늘 베르크 경을 만나면 이걸 좀 전해 주겠니? 무운을 빈다고. 어제 인사도 못 하고 잠든 게 아쉬워서.”

흰 손수건이었다. 주로 귀부인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상대에게 무사히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아 건네는 물건.

베로니카는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받았다. 문득 시야 끝에 흐트러진 침대 시트가 걸려들었다.

어제 인사도 못 하고 잠든 게 아쉬워서….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기분이 더러워졌다. 제 고백을 거절한 남자가 그다음에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니 비참을 넘어 서글퍼졌다.

거짓말쟁이. 설령 사랑하게 되어도 서약은 깨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머리는 제멋대로 퇴폐적인 상상을 이어 나갔다. 베로니카는 황녀의 관찰하는 듯한 눈과 마주치고서야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요한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전부 눈치챘음에 틀림없었다. 알고서 놀리는 거다. 부상을 알면서도 괴롭혔던 어제 하루처럼. 베로니카는 치미는 억울함과 수치심을 표 내지 않으려고 손을 꽉 움켜쥐었다.

황녀는 광야에 대해 거론해 주겠다고 했다. 그게 어디인가.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을 잊어야 할 때였다. 카르트는 아셀도르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사람을 등지고 후회하지 않으리라.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오는 길엔 아셀도르프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문답게 별 의미가 없어서 도수 높은 술을 마신 듯 입 안만 썼다.

***

황궁의 손님방에서 씻고 짧은 잠을 청했다. 하녀의 부름에 깼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팔다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새파란 하늘은 눈부시게 밝았다. 베로니카가 어떤 상태든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간다. 이런 때 느끼곤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의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고.

하녀는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갑옷을 가져다주었다. 결투 이후에 벗어 놨던 갑옷이 분명했다. 리온이 도와주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장하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따라오라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친절한 설명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로니카는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로 운반되는 물건과도 같았다.

마차를 타고 교황청 앞의 광장으로 가자 줄 맞춰 도열한 기사단이 보였다. 새하얀 갑주. 붉은 십자가. 신성 기사단이다. 곧장 눈을 굴려 리온을 찾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기사 한둘이 아니라 군집한 인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금속이 풍기는 냉기에 등골이 시렸다. 몇 기인지 모를 기마병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도 쓸데없는 말소리도 없고 함부로 움직이는 자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민들도 감히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

“부단장님, 지시하신 동화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병사는 베로니카를 대열의 맨 앞까지 이끌었다. 두 명의 남자가 무언가를 의논하다가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나는 왕자님처럼 생긴 은발 기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머리숱을 수염에 다 빼앗긴 듯한 험상궂은 기사였다.

그들은 마치 특이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강렬한 시선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은발의 기사가 매끈한 손을 슥 내밀었다.

“신성 기사단의 부단장 필립 폰 비텔스바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로니카는 일순 당황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상식적인 인사는 처음이라.

게다가 그의 소개가 사실이라면,

“제 사형을 언도하셨다는 그분이군요.”

부지불식간에 그런 대답이 튀어 나갔다. 필립은 눈썹을 들썩이더니 손을 내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판결은 유효합니다. 황제 폐하의 비호가 끝나는 날 당신은 사형대에 오를 겁니다.”

왕자, 백마 탄 기사. 그런 말이 어울릴 듯한 얼굴로 필립은 죽음을 입에 담았다. 과연, 가장 율법에 엄격하다던 기사다웠다.

“미래의 적에게 원하는 건 뭐죠?”

“요구 사항은 한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토벌을 도울 것. 그리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즉시 가까운 기사에게 보고하십시오.”

“제 예언을 믿으셔서 그런 요구를 하는 건가요?”

“당신은 황제 폐하의 원군입니다. 신분에 맞는 대접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 하지만 아군에 위협이 되거나 바하무트에게 우호적인 행동을 보일 시에는 그 즉시 사살합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한 눈빛이 아니었더라면 말하는 인형이라 해도 무방한 표정이었다. 베로니카는 질리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탈 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운 좋게도 기사 하나가 당신과 함께 타겠다고 자원했으니 그쪽으로 가십시오.”

그가 턱짓을 하자 아까 안내했던 병사가 다시금 다가왔다. 필립은 크게 용건이 있다기보다 그냥 그녀가 제정신인지 확인한 눈치였다. 대머리 기사의 집요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떼려는데 불현듯 타오르는 붉은 머리가 시야 끄트머리에 잡혔다. 새까만 군마에 검은 털 망토. 리온은 흰색 일색인 기사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저쪽에 들렀다 가요.”

안내하는 병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입술을 깨문 베로니카는 바꿔서 다시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요한나 황녀 전하의 명으로 반드시 전해야 할 물건이 있어요.”

병사는 그제서야 귀찮다는 듯 돌아보았다. 베로니카는 곱게 접은 손수건을 의심의 눈길 아래 펼쳐 보였다.

“베르크 경에게 무운을 비는 손수건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만약 못 받은 걸 아시면 그 죄를 당신에게 물으실 거예요.”

병사는 베로니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황족의 이름이 걸린 이상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리온에게로 이끌었다.

리온은 다가오는 베로니카를 눈치채고 빤한 시선을 보냈다. 의식하자 걸음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절뚝이기 싫어서 아픔도 무시하고 걸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마침내 말이 들릴 거리에 이르자 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는 데일 듯 강렬한 시선을 느끼며 손에 들린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

그런데 얼른 받아 가야 할 리온은 손수건을 생경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이게 뭐냐는 눈빛에 베로니카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운을 비는 의미예요.”

가장자리에 황금빛 태양이 수놓아져 있으니 누가 보냈는지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리온은 눈썹을 찌푸리고 묘한 표정을 짓다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손이 잠깐 닿는 순간 베로니카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흘끔 올려다본 순간에는 순수하게 놀랐다.

아름다운 광휘를 품은 눈동자. 세상에 다시 없는 보물을 보듯 뚫어지는 시선.

그저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이었다. 평소의 얼음 같은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멀거니 선 베로니카를 앞에 두고 그는 느릿한 손길로 손수건을 검에 묶었다. 심장이 꾹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나 그 여자가 좋은 걸까. 평생의 신념을 깰 정도로.

죽기를 바란다는 잔혹한 거절과 비교하자 자존심이 아프게 뭉개졌다. 베로니카는 울컥 치미는 설움을 누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쌓인 상처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포기가 느린 베로니카도 주저앉고 싶어질지 몰랐다.

“이제 곧 행군이 시작될 겁니다. 전열을 갖춰야 합니다.”

그때 안내해 온 병사가 초조하게 재촉했다.

아셀도르프. 아셀도르프. 아셀도르프. 베로니카는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며 몸을 휙 돌렸다.

슬퍼졌다. 그 도시에서 그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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