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5)화 (55/128)

연이어 포격 소리가 울렸다. 밤새도록 계속된 소리는 상당히 멀리서 들리는데도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었다. 특히 당장 얼마 전에 포탄의 무서움을 겪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듣기론 성벽 밖이 대충 정리될 때까지 쏜다더구나. 너는 두 눈으로 그것들을 보고 왔지.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하니?”

몸치장을 받던 황녀는 잠을 못 잤는지 드물게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공손히 대답했다.

“수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걸 다 없애려면 오늘 온종일 해도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아, 건국제가 코앞인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람. 바깥의 소문은 어떻지?”

이번 질문은 시녀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예상하시는 대로 시민들은 불안에 술렁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셋 이상만 모여도 새로운 예언에 대한 소문을 떠든다고 합니다.”

“새로운 예언?”

“동화자가 했다는 예언이온대… 카르트가 멸망한다는… 아마 귀족 가문으로부터 예언이 퍼져 나간 모양입니다.”

황녀가 혀를 찼다. 베로니카는 귀족 가문이 아니라 황궁의 사용인에게서 말이 퍼져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았다. 복도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듣기론 황제가 성벽 밖으로 토벌대를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렇다고 멀리까지 가는 것은 아니고, 매일 나가되 성벽 둘레만 정리하고 들어오는 것이 핵심이었다. 토벌대는 동화가 통하지 않는 신성 기사단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베로니카는 거기에 리온도 포함될지 생각하다가 가슴이 욱신거려 생각을 멈추었다.

얼른 서고부터 살펴야 하는데.

아침부터 불려 나온 베로니카는 하는 일도 없이 그저 황녀의 방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부상 때문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황녀는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악의를 품은 인간이 아니고서야 하얗게 질려 식은땀 흘리는 얼굴을 못 본 척하진 않을 테니까.

“넌 기쁘겠구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고개를 든 베로니카는 황녀의 휘어진 푸른 눈과 마주하고 당황했다.

“네?”

“인정받았으니 기쁘지 않니? 네가 했다는 예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베로니카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제 말이 맞았다 한들 사람이 죽었는데 기쁠 리가 있나.

칭찬이 아니다. 베로니카는 대답을 미룬 채 거울에 비친 황녀의 표정을 신중히 살폈다.

“하지만 전하, 새 예언을 떠들긴 해도 믿음이 기우는 방향은 여전히 이전의 예언입니다. 바하무트가 들어오지 못하고 동화자를 이용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국 이 땅의 불가침성을 증명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시녀가 서둘러 첨언했다. 황녀가 소문을 오해라도 할까 겁이 나는 눈치였다.

겁. 그것은 자비로운 주인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니다.

“그래. 어찌 되었든 모두가 예언에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이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사실 나는 어제 포탄 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

“어머나, 이거 천벌인가?”

치장이 끝난 황녀가 아름답게 틀어 올린 머리를 돌렸다. 단정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교도를 보호하는 바람에 신께서 황실에 노하신 건 아닐까?”

“…….”

“포격이 황궁 근처에만 집중되었으니 이상하기도 하지.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과하기는커녕 예리한 생각이다. 제 탓이라는 데는 베로니카도 동의했다. 리온은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만 죄책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분명히 찾았다는 음성을 들었다.

“실은 내가 널 아침부터 불러낸 이유도 여기에 있단다. 황제 폐하께서도 나와 같은 불쾌감을 느끼시고 널 토벌대에 보내기로 결정하셨거든.”

황녀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베로니카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뿐만이 아니야. 폐하께선 베르크 경도 토벌대에 넘겨주셨어. 이래선 수지가 안 맞아. 네가 내 기사를 죽였던 그날의 시합에서 결국 내가 얻은 건 없는 건 하나도 없는 셈이야.”

무릎을 꼰 황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무척 불쾌해 보여서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아, 리온 베르크는 말 그대로 길들이기 곤란한 사자 같아. 도무지 옆에 붙어있지를 않는다니까.”

황녀의 말에 맞장구치듯 대포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는 과장스레 한숨을 쉬더니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괴었다.

“오만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진작에 이빨을 다 뽑아야 했을까?”

부드러운 목소리에 담긴 분노에 소름이 돋았다.

황녀는 화가 나 있었다. 역시 그녀를 두고 성벽으로 간 리온의 행동은 그의 독단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관계는 베로니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던 걸까.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황녀는 베로니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분이 황녀 전하께 곧 충성 맹세를 바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기회를 주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좁은 식견으로도 기사의 맹세가 중요한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태도는 이후로 달라질지 모릅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긴장된 분위기에 이제 등 뒤로 솟구치는 식은땀이 부상 때문인지 황녀의 침묵 때문인지도 불분명했다. 그녀는 흠, 하고 작위적인 소리를 내더니 대답했다.

“기사에게는 물론 맹세가 중요하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단다.”

“…….”

“네가 아는 리온 베르크는 어떤 사람이지?”

난해한 질문이었다. 베로니카가 망설이자 황녀가 다시 한번 물었다.

“순결 서약도 깬 기사가 과연 나에 대한 충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베르크 경은 순결 서약을 깬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은….”

화들짝 놀라 부정하던 베로니카는 점차 말끝을 흐렸다.

아. 황녀가 웃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와 깼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특별한 관계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

심장이 비참하게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짝사랑을 들킨 기분이었다. 머리가 하얘지는 와중에도 황녀의 말이 모래알처럼 씹혔다.

리온 베르크가 순결 서약을 깼다. 누구와?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단 말이야. 동화자는 성력을 받아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넌 어떻게 아직까지 미치지 않고 지내고 있는 거니?”

또다.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워졌다.

“그건….”

베로니카는 혼란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남의 남자와 몹쓸 짓을 한 기분마저 들었다.

“입을, 맞추는 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입맞춤이라. 낭만적인 이야기야. 고작 이런 얘기로도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순진한 아가씨기도 하고.”

지루함이 담긴 음성은 난처하고 무례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친우가 되자고 손을 잡아 줄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멍청하게 속았다.

“좋아, 곤란한 화제는 이쯤 하고 네게 쉬운 얘기로 넘어가자꾸나. 너 자신에 대해 말해 봐. 난 새로 생긴 친우에게 궁금한 점이 많아. 동화되기 전에는 어디서 뭘 하며 지냈지?”

“베이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돈을 벌 나이가 되고는 극단에서 춤을 배웠고요.”

“춤?”

“네. 비록 미천한 솜씨지만 그것이 제가 유일하게 열정을 느낀 일이었습니다.”

황녀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까딱이는 손가락이 왠지 모를 불안감을 스멀스멀 피워올렸다.

“그러고 보니 무희들의 춤을 감상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마침 잘됐구나. 저 포탄 소리가 끝날 때까지 나만을 위한 공연을 열어 주렴.”

역시나 불안감은 고통스럽게 적중했다.

사실 춤을 춰 달라는 부탁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나무 악기 따위 없어도 그녀에겐 발이 닿는 모든 땅이 무대였다.

문제는 지금의 몸 상태였다. 부상 때문에 서 있기만도 벅찼다. 그리고 황녀는 파리하게 질린 베로니카의 얼굴을 뻔히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르헨. 춤추기 편한 신을 내줘.”

베로니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시녀 하나가 앞에 신발을 놔 주었다. 어차피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주저하다 발을 밀어 넣었다. 따끔, 발바닥에 뭔가가 박히는 아픔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베로니카는 멈칫 굳어 버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니?”

고개를 들자 해맑게 웃는 황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불렀던 거다. 토벌대에 들어가게 된 그녀에게 화가 나서. 서고에 갈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은 채 괴롭히려고.

“…아니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건 베로니카의 정신력이었다. 고향과 가족을 잃고 광야를 건넜다. 강도를 만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황족의 괴롭힘 정도에 기가 죽기에는 그간 겪은 일로 박인 굳은살이 단단했다.

베로니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끝을 세웠다. 이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서고의 허락을 구했을 때부터 고생은 각오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팔을 들자 익숙한 동작이 저절로 피어났다. 움직일 때마다 온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베로니카는 리온에 대해 잊기 위해 신체적 고통에 골몰했다. 쓰러질 때까지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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