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4)화 (54/128)

혹시나 하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그가 빈틈을 보여 줄 때마다. 비슷하다고 느낄 때마다.

그래서 역겹다는 소리까지 들어 놓고도 미련하게 고백을 입에 담았다. 아니, 사실은 전부 핑계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목 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더는 눌러 담을 수 없게 되어버렸는지도.

눈물을 참다 보면 어느 순간 계속 울게 되는 것처럼.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돼버려서.

“어제 한 행동도. 아까 본 투구도. 상처는 충분히 받았어요. 그러니까 한 번쯤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대답만 들으면 깨끗이 포기할게요. 귀찮게도 안 하고 더는 티도 안 낼게요.”

닿아라. 제발.

“나는.”

닿아라.

“당신을 좋아해서 계속 기다렸어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눈물이 시야를 비틀었다. 감정을 그에게 내보이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뜨자 볼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 남자를 만나고부터 눈물이 헤퍼졌다.

“나한테는 포기가 쉽지 않아요.”

리온은 드물게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눈물을 빤히 바라보다가 닦아줄 듯 손을 뻗었다. 베로니카는 닿아 올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허공을 헤매던 손길은 결국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귓가에 스미는 목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덜컹 내려앉은 심장보다도 더. 바닥없는 어둠보다도 더.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죽음을 소원한다는 사실뿐이야.”

손을 놓친 베로니카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니 나를 위해 울 필요는 없어. 용서도 하지 마. 절대로.”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닿았으니 알 수 있었다. 완벽한 거절. 매달릴 여지도 없는.

베로니카는 멀어지는 리온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이제 말끔히 체념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녀를 안아 줄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만을 사랑하는 신의 기사였다. 알고 있었는데.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욱신거렸다.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던 심장이 폐부를 아프게 압박했다. 숨 쉬는 게 힘들어 인상을 찡그렸다.

닫히는 문에 걸린 신의 초상화는 한쪽 눈을 감은 채 두 눈으로 울고 있었다.

신이시여, 한순간 망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미친 걸까요? 그렇게라도 그가 원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

포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메클렌부르크가 리온에게 내어 준 단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리온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허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게 물건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아예 가지고 싶다는 욕구가 거세되도록. 그리하여 그가 제 아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수도원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들르던 첫 친구는 말굽에 밟혀 죽었다. 짐마차를 끄는 노역마는 거의 1톤에 가까운 크기였는데 하필 수도원으로 오는 길목에서 멈추지 못하고 달렸다 했다. ‘너 때문에 죽은 게다.’ 늙은 사제는 혀를 차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모친은 자살했다. 알려 준 사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메클렌부르크였는데, 그는 리온을 이름 없는 무덤으로 데려갔다, 묘비에는 리온이 모친을 수소문하기 위해 수도원을 빠져나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찾아오지 않는 부친은 사제들의 눈과 귀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원하면 깨졌고 좋아하면 부서졌으며 사랑하면 망가졌다. 아니, 그가 손대기만 하면.

어느 순간부터 리온은 원하지 않았다. 체념은 습관과도 같았다. 사랑을 바치고도 파괴되지 않은 존재는 신밖에 없었다.

여자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녀가 만날 때부터 죽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망가질 여자라 마음을 놓았다. 틈이 생겼다. 틈으로 스며드는 따뜻한 물을 막지 못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큭.”

으슥한 그늘에 들어서던 오스카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벽에 쿵 뒤통수를 찧었다. 멱살이 잡힌 그는 재빨리 상황 파악을 하고 눈을 홉떴다.

“밖을 오래 떠도시긴 했나 봅니다. 시정잡배들처럼 주먹을 다 쓰시고.”

“아니, 전부 수도원에서 배운 것들인데. 늦게 기어들어 와서 잘 모르나 보군.”

리온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스카는 찍어누르는 힘과 괴리되는 말투에 기이한 공포를 느꼈다. 리온에게선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뭘 원하십니까?”

“내가 재밌는 걸 봤는데 말이야. 혹시 아는 게 있나 해서.”

리온이 고개를 기울이자 눈 하나가 푸른 달빛 아래로 드러났다. 서늘한 불꽃. 얼마나 기묘한 조합인지.

“등에 있는 채찍 자국. 누구 짓이지?”

간결한 질문에 오스카는 눈에 띄게 경직했다. 누구의 등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채찍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퍼뜩퍼뜩 떠오를 정도로 선명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일의 언급보다 더 심기를 건드린 건 리온 베르크가 그 상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

쓰러질 것같이 지쳐 보이던 여자를 다시 품에 안은 거다. 감정을 돌려주지 못할 여자와는 입을 맞추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을. 오스카는 턱이 불거지도록 이를 악물다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전부 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아, 역시 교황 성하신가? 메클렌부르크와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라 생각하긴 했어.”

마치 혼자라는 말을 못 들은 사람처럼 리온은 픽 웃고는 손에서 힘을 풀어 주었다. 자유로워진 오스카는 변명하는 대신 벽에 몸을 똑바로 기대며 물었다.

“이제 와 묻는 이유는 뭡니까? 당신이 그 여자의 안위를 신경 쓸 처지는 됩니까?”

“안 되지. 그래서 안 죽이잖아.”

오스카가 그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는 그대로 벽에 다시 처박혔다. 그는 낮은 신음을 뱉었다. 뒤통수에서 흐르는 뜨끈한 피 때문이 아니라 목을 조르는 손으로 빠져나가는 성력의 흐름 때문이다.

신검의 주인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이 행위가 더 나아가면 성력을 넘어 생명력까지 잡아먹히게 된다. 티란에서 수백의 기사가 이런 식으로 죽었다. 리온이 휘두른 검날의 게걸스러운 식탐에 의해.

오스카가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가운데 리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사자가 착해 빠졌으니 미안하다 몇 마디로 용서받았겠지만. 스스로도 알잖아? 네가 무결한 인간에게 손을 댔다는 걸.”

“윽, 대체 뭘, 원하는.”

“낮의 사건으로 토벌이 결정 났다. 괴물에게 동화되지 않는 신성 기사단이 매일같이 성벽 주위를 청소할 거야.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여자도 토벌대에 포함되겠지.”

오스카는 처음 듣는 정보에 눈을 크게 떴다. 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를 지켜. 네 목숨을 바쳐서라도.”

“토벌대가 만들어진다면, 큭, 당신이야말로 무조건, 포함될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더는 상종 안 할 생각이라. 네가 책임지고 생명을 유지 시켜야 할 거야. 그 여자가 머리 터져 죽으면 다음은 네 차례거든.”

그가 대답도 못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리온은 손을 떼어 냈다. 털썩 무릎 꿇고 바닥을 짚은 오스카는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일렁였다. 이런 태도는 그가 아는 리온 베르크가 아니었다. 신성 기사단 출신의 기사가 이단 심문에 눈썹 하나 까딱할 리 없다.

설마. 쌍방향이었나.

“후, 하하.”

실성한 듯 숨찬 웃음을 터뜨리는 오스카를 리온은 무표정하게 내려다봤다. ‘생명을 유지시키라’는 요지는 주지시켰으니 대답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리온은 결론을 내리고 걸음을 떼었다.

리온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성력을 공급했던 인간이 오스카라고 확신했다.

그래, 누구든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성력만 있다면 누구든.

“좋아해요.”

쾅, 먼 곳에서 대포가 울었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바하무트를 몰아낼 요량으로 공격이 연신 이어졌다. 리온은 하늘 저편에서 번개처럼 번쩍이는 빛을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즈음엔 엎드린 오스카가 시끄럽게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사람이 밤에 자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금세 죽어 버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어둠은 사람을 검게 물들인다. 아무리 밝은 불꽃도 심연 속에선 길을 잃는다. 바닥없는 바다에 한없이 가라앉아 마침내 사그라든다.

리온은 홀로 여관에 돌아왔다. 삐거덕, 방 안은 온기 하나 없이 적막했다. 평생 발을 담근 고독이 새삼스러운 질감을 띠고 날뛰었다. 그는 어제와 달리 기꺼이 질퍽한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여자의 말마따나 그녀에게 속한 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낮에 확인한 양피지를 제외하면 그녀가 있었던 흔적이라곤 침대에 묻은 체취뿐이었다. 흰 이불에선 여자의 목덜미에서 나던 순수한 겨울의 냄새가 흘렀다.

“좋아해요.”

리온은 눈을 떴다. 천장은 시커멨고 사방은 고요했다.

잠이 들었던가. 초점이 흐릿한 눈은 어둠이 아니라 여린 등을 뒤덮다시피 했던 상처를 더듬었다. 방에서는 날 리 없는 피 냄새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검은 복도에 들어간 이상 멀쩡하게 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묻기는커녕 무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사실 그녀에게 채찍을 휘두른 사람은 교황이나 오스카가 아니라 리온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를 다치게 했다. 낮에 성벽에서도, 세게 잡은 손목도. 의도치 않았다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추위를 느낀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메클렌부르크는 어느 면에서는 옳았다. 인간은 원하면 원할수록 고독해진다. 처음부터 따뜻한 불에 다가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춥지도 않았을 것을.

쾅, 쾅, 멎은 줄 알았던 포격이 다시 시작됐다. 고개를 비튼 리온은 점멸하는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귀가가 항상 늦었다. 여자는 항상 이 자리에서 불을 밝히고 기다렸다. 하루의 끝에 밝혀져 있던 동그란 불. 반가워하는 얼굴과 발음이 또렷한 목소리. 식사하면서도 흘금거리는 시선.

실체 없는 온기와 숨소리를 장작 삼아 불을 질렀다. 기억은 추운 밤을 보낼 환상이 되어 줄 것이다. 비록 불이 꺼지기 전까지만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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