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3)화 (53/128)

‘그것들’은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안내했던 병사도 벽 아래를 보더니 입을 딱 벌리고 기겁했다.

“뭐야… 이 괴물 새끼들이 갑자기 왜….”

그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둘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내렸다. 생명을 가진 이상 포식자의 눈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차가운 주검이 된 병사들도 이런 식으로 벽 너머를 내려다봤으리라. 어차피 동화는 20년 전에 광야에 있었던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무 두려움 없이.

잠깐만, 맙소사.

“눈을 감아요!!! 아래를 쳐다보지 말아요!!!”

베로니카는 발작처럼 소리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경고는 언제 해도 늦었다.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

베로니카는 눈이 새빨개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채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까지 안내하고 방금까지 멀쩡히 말했던 병사였다. 목덜미가 쭈뼛 곤두서며 오한이 끼쳤다. 베로니카는 중얼거렸다.

“오지 마.”

뒤로 물러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붉은 눈이었다. 리온의 매혹적인 적안과는 달랐다. 동화된 눈은 심장처럼 고동쳤다. 시체를 살피던 성기사들과 베로니카를 제외하곤 모두가 동화된 것 같았다. 그들이 일제히 멀쩡한 사람들에게 모여들었다. 그 움직임이 끈 달린 인형처럼 다 똑같아서 징그러웠다.

그들에겐 소리가 없었다. 검을 뽑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지만 이런 성벽 위는 싸우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기사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베로니카는 속이 울렁거려 입을 막은 채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악몽과 겹쳐졌다.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고 싶지 않았다. 동화자는 아직 그녀처럼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등이 성의 난간 같은 부분에 닿은 순간, 더 도망갈 수 없는 그녀에게 손들이 뻗어져 왔다. 팔과 어깨에 온기가 닿았다. 붙잡으려는 손길이 아니라 밀어내려는 손짓이었다.

아, 설마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카르트 성벽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허무하게?

사람들에게 덮이며 몸이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서걱, 돼지의 머리가 도축되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동시에 구울(Ghoul)처럼 손을 뻗어 오던 자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강렬한 아픔이 어깨에 엄습했다.

모두를 한꺼번에 벤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그답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리온은 그녀까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이다. 어차피 그녀는 신의 자식도 아니니까. 바하무트와 연결된 괴물이니까.

핏방울이 튀며 시야를 가렸다. 고통에 차라리 눈을 감았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수면에는 한 가지 진실만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들은 누구든 동화자로 만들 수 있었다. 즉 지금까지 ‘선별’해 왔던 거다. 인간을. 아주 특별한 인간을.

***

베로니카는 여관이라기엔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방에서 눈을 떴다.

“읏….”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예상대로 크게 베였는지 붕대가 어깨와 가슴을 통째로 둘둘 감고 있었다.

결국 움직임을 포기한 채 고개만 돌려 주변을 살폈다. 방에는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차가운 공기를 풍기며 창턱에 기대선 남자를 바라봤다. 그도 똑같이 고요한 시선을 보내왔다.

성력 덕분인지 유리에 긁힌 상처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우습게도 가장 먼저 안도가 치밀었다. 그다음은 막 끓기 시작한 억울함이 방울방울 솟구쳤다. 남은 크게 상처입힌 주제에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다. 늘 그랬다. 그녀가 밟고 선 땅을 갈라 사람을 통째로 흔들어 놓고 홀로 동요 없는 땅에 서 있다.

적막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건 리온이었다.

“등에 난 상처.”

“…….”

“교황과 메클렌부르크 둘 중에 누구지?”

성벽에서의 일부터 얘기할 줄 알았던 베로니카는 뜻밖의 화제에 당황했다. 상처를 치료받을 때 등을 본 모양이었다. 이제 와 검은 복도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아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창가에서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아니, 물을 필요도 없군. 이건 메클렌부르크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야.”

“…그가 좋아하는 방식은 뭔데요?”

“철저히 고립시켜서 정신을 말살하는 것.”

“당신이 겪은 일이에요?”

당돌한 질문에도 리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간 보낸 수많은 시간 덕분에 베로니카는 곧장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해야 할 일. 애초에 그것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싫어요. 당신의 성력은 필요 없어요.”

누운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황청 지하에서도 당신 없이 잘 지냈어요.”

쏘아붙이듯 말하자 강제로 행동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리온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내려다보는 얼굴은 평소처럼 느긋하지도 버릇처럼 미소를 걸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했다. 베로니카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굵직하게 내려오는 목선과 울대만 필사적으로 응시했다.

“그보다 내가 쓰러진 이후에 어떻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요?”

고요를 음미하기라도 하듯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리온은 한참 만에야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동화된 전원을 사살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대로 뒀다간 또 사람들을 공격할 테니.”

예상한 일이었지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둘러싸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찾으러 온 바하무트 때문에 죽었다. 좀 더 빨리 바하무트의 의도를 전달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처음부터 전부 나 때문이에요.”

베로니카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나를 찾으러 온 거예요. 분명히 들었어요. ‘찾았다’고.”

“아, 안 그래도 네가 여관에 남기고 간 기록은 읽었는데.”

리온이 태연히 말을 끊어 냈다.

“설마 그런 얘길 다른 사람한테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겠지.”

“무슨 뜻이에요?”

“바하무트가 뭘 찾고 있다. 근데 그게 나인 것 같다. 맨몸으로 성벽 밖에 내던져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게 당신이 바라는 바 아닌가요?

목구멍까지 그런 대꾸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베로니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또, 또 그에게서 얻어 내야 할 것. 확인해야 할 것.

“…그래서 내가 부탁한 대로 교황청에서 자료를 찾아봐 주긴 할 건가요?”

“안 해 주면? 이번엔 교황에게 가서 친우가 되겠다고 선언할 건가?”

화났나 싶어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나 그는 딱히 빈정거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사실 아까 일어나서부터 계속 어둠에 잠겨 있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에게서 감정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교황 성하와 친구는 못 되겠지만 당신에게 정보 교환을 제안하긴 하겠죠. 제가 황실 서고에서 찾아내는 정보와 바꾸자고요.”

“나쁘지 않네.”

순순한 대답에 베로니카는 눈을 깜빡거렸다. 저도 모르게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오늘따라 웬일로 갈등이 없네요.”

“피곤해서.”

리온은 그렇게만 말하곤 서 있기도 귀찮다는 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보니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오후의 노란 햇살이 비추는 먼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날렵한 옆얼굴을 눈으로 훑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히 미운데, 어제고 오늘이고 그의 언행이 미워 죽겠는데 동시에 가여웠다. 지쳐 보였다. 강하고 단단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그 바깥까지 흘러나올 정도로 피로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대답을 못 들었어요.”

“무슨 대답?”

“메클렌부르크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어요?”

리온이 고개만 비틀어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이 무거워지는 주제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다시 제안했다.

“우리 공평하게 궁금한 질문을 교환해요. 난 내 등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군지 말해 줄게요.”

“별로 안 궁금한데.”

“거짓말.”

발끈해서 내뱉자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리온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베로니카는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을 홀린 듯이 응시했다. 눈은 그대로 두고 입술만 휘어지는 미소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처음엔 구슬이었나.”

그때 리온이 불현듯 알 수 없는 말로 운을 뗐다.

“그다음은 수도원 나무에서 떨어진 새끼 새.”

“…….”

“흥미진진한 기사 이야기, 주인 없는 강아지, 새 신발, 낡아서 누군가 버린 공.”

“…….”

“친구가 될 뻔했던 뒷골목의 소년.”

“…….”

“어머니.”

베로니카는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불을 움켜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가 말하는 목록의 의미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 보잘것없는 존재들은 어떤 소년이 좋아했던 것들이다.

“원하면 전부 망가졌어.”

리온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는 더 적절한 표현이 어느 것인지 알면서도 망가뜨렸다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구슬은 깨지고 새는 빼앗겼어. 책은 태워지고 강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발에 치여 죽었지.”

베로니카의 입술이 가만히 벌어졌다. 귀는 다음을 궁금해하는데 손은 말리고 싶어서 움찔거렸다.

“신발과 공은 쓰레기장에 버려지고 짐을 부리는 노예 친구는 말에 깔려 죽었어. 또 내가 뭘 말해 줬지?”

“됐으니까 이제.”

“아, 어머니. 그 여자는 자살했어. 자살 당했다고 해야 하나.”

베로니카는 더 견디지 못하고 침대를 짚고 일어났다. 고통이 눈앞을 새하얗게 덮었지만 그의 말을 막는 게 더 급선무였다. 내게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내게 그런 잔인한 얘기를 털어놓느냐고.

그때 리온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포기는 쉬워. 생각보다.”

“…….”

분명 뭐라고 반박하려 했는데 모조리 잊어버렸다.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소리는 많았지만 그에게 가치 있을 만한 말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의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불꽃처럼 붉은데도 어둠보다 더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주황색 음영을 보고서야 문득 지금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가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얘진 머릿속에 마침내 해야 할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것은 등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의 이름도 아니었고 하찮은 위로도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멀어지려는 리온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불가항력처럼 입이 벌어졌다.

“좋아해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좋아해요.”

그래서 한 번 더 말했다. 필요하다면 백번도 더 말할 자신이 있었다. 리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심연에 빠진 소년에게 있는 힘껏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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