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2)화 (52/128)

“동화자를 가까이 두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리온이 황녀에게 충언을 건넨 건 그때였다. 괴물을 언급하는 투에 다시 한번 안에서 뜨거운 게 치받았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랑 닿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거든.”

어젯밤에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가끔은 못되게 굴어도 자신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여겼다. 단지 필요 때문에 역겨움을 참는 줄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크나큰 영광입니다.”

무릎 위로 주먹을 꽉 쥔 베로니카는 보란 듯이 황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리온의 생각을 안 이상 더는 그 여관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통쾌함이 아니라 비참함을 먼저 느끼는 스스로가 싫었지만 지금만큼은 마음을 깎아서라도 리온에게 뭔가를 갚아 주고 싶었다. 그는 이제 베로니카가 황녀에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까 불안해해야 할 것이다.

황녀는 일부러 시선도 올리지 않는 베로니카를 보며 빙긋이 웃더니 편하게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내가 부를 때는 다 그만두고 찾아와야 한단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서고를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 말이 나온 김에 새로 생긴 내 친우에게 빈방을 안내해 드리지 그러니?”

친절한 말에 시녀 하나가 베로니카의 옆에 다가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축객령이었다.

“이후로는 손님을 아무도 들이지 마. 방해받으면 화낼지도 몰라.”

황녀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베로니카는 그녀가 나가고 두 사람이 뭘 할지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은 때때로 자학에 불과하다.

“아, 들고 올 짐이 있다면 내 시녀에게 말해 놓으렴. 그 여관에는 다시 돌아갈 필요 없게 말이야.”

베로니카는 돌리려던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시선을 리온에게 둔 채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황송하오나 그곳엔 제 물건이 없습니다. 유일한 짐인 검이 어제 부러져서요.”

덜컹,

크게 트인 문이 양옆으로 닫혔다.

베로니카는 시녀의 뒤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뒤로는 병사 대여섯 명이 따라붙었다. 어제 장정의 머리를 터뜨린 괴물인 만큼 호위가 아니라 경계의 목적임이 분명했다.

눈높이에는 비싼 유리로 된 창문이 죽 이어져 있었는데 블라센 산맥의 설경이 긴 액자 속의 그림처럼 장관으로 펼쳐졌다. 새하얀 햇살이 눈과 검은 절벽 위로 부서져 내렸다. 저곳에 그녀와 연결된 바하무트가 있을 것이다. 모태 속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그러고 보니 ‘그것’의 환상을 본 지 오래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요동치며 머릿속에 웅크린 바하무트가 눈을 번쩍 떴다. 소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

뭐야, 지금 이 환상은?

베로니카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환상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말도 안 되지만 베로니카는 상상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보통은 그것의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이건, 말 그대로 착각 같은.

찾았다.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에 베로니카가 숨을 크게 들이켜자 앞서가던 시녀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돌아가야.”

“네?”

“돌아가야 해요. 황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당황했던 시녀는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언을 제게 주시면 때를 보아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지금 바로 말해야 해요.”

찾았다니? 뭘? 누구를?

마치 몰래 제 머릿속에 숨어든 생쥐라도 찾아낸 말투였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동시에 머리는 지난번에 봤던 환상을 더듬고 있었다. 아셀도르프에 유독 많았던 바하무트. 베로니카가 머물렀던 여관과 성문에 가득하던 그들이 찾던 것.

베로니카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뒤따르는 병사들을 돌아봤다.

“급한 일이에요. 당신들도 황제 폐하든 누구에게든 가서 겨울잠을 자던 ‘그것’이 눈을 떴다고 전해 주세요. 예감이 좋지 않다고요.”

가까이서 눈이 마주친 남자 하나가 흠칫 놀랐다. 한 발자국 물러나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눈이 뭔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불길하게 뛰었다.

“빨리요!”

재촉하자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던 병사 중 하나가 뒤로 물러났다. 그대로 전할지는 몰라도 이상을 보고하기는 할 것이다.

그녀가 평범한 평민 여자에 불과했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지금 그녀를 진심으로 무서워했다. 어제의 결투에 대해 황궁 내에 소문이 쫙 퍼진 게 분명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신분이 높은 시녀마저 베로니카의 눈을 보자 거부하지 못하고 중얼거렸으니까.

“그, 그럼 다시 요한나 황녀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따라오세요.”

겁먹은 시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멍하니 걸은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는지 돌아가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화려한 문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시녀는 뭔가를 말하기 위해 뒤돌았다. 동시에 쾅, 하고 가까이에서 굉음이 터졌다. 비명, 넘어지는 시녀와 흔들리는 시야.

지축이 뒤흔들렸다. 복도에 서 있던 사용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베로니카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지만 충격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쾅, 쾅 하는 파괴음과 진동이 이어졌다.

창문 너머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가 보였다. 이해 안 가지만 분명히 포탄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가까이에서 터진.

다음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리온이 걸어 나왔다. 그가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에게 안을 가리키며 몇 마디를 지시하고 복도를 가로지르다 멈칫했다.

“아직까지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이 혼란한 와중에도 구석에 서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는 게 놀라웠다. 베로니카는 당황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밖에 나가려는 거죠? 같이 가요.”

“지금은 안 돼. 비켜.”

“나를 찾고 있어요.”

스쳐 지나가려는 그의 팔을 잡자 리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에게 있어 별로 큰 힘도 아닐 텐데 뿌리치지 않았다.

“소리를 들었어요. 일부러 궁전 주위로 쏘는 것도 나오라는 뜻이에요.”

리온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불분명했다. 눈앞이 하얘지는 폭발이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이번엔 바로 옆에서 터졌는지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며 파편이 들이쳤다. 모든 소리가 폭발음에 먹혀 진공 상태처럼 멍해졌다.

당기는 힘과 함께 시야가 새까매졌다. 현실을 다시 자각한 건 뺨에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을 때였다. 고개를 든 베로니카는 숨을 멈췄다. 그녀를 감싸 안고 몸을 수그린 리온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리 파편이 튄 것 같았다.

“피….”

왜? 기사로서의 본능인가? 아니면 자신이 지켜야 할 동화자라서?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친 순간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그를 확 떠밀었다. 순순히 놔주는 리온에게선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다친 데 있어?”

혼돈 속에서 입술 모양을 읽었다. 멍하니 고개를 젓자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리온은 곧장 그녀를 계단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에 뛰다시피 하던 그녀는 아픈 손목에 작게 신음했다. 리온이 곧장 잡은 손을 놓았다.

그가 그녀를 배려할 리 없었으므로 우연이 분명했다.

“어디로 가려는 거예요?”

말에 올려 줄 때가 돼서야 베로니카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리온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성벽.”

땅을 박찬 말은 빠른 속도로 황궁을 빠져나갔다. 베로니카는 문득 호위를 맡은 리온이 황녀를 두고 나와도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런 의문은 주변의 풍경을 보자 곧 설 자리를 잃었다.

포탄을 직격으로 맞은 황궁은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샘솟는 과거의 잔상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히 대포가 불을 뿜는 일은 멎었다. 그러나 성벽으로 다가갈수록 다른 종류의 의아함이 샘솟았다. 어디에도 바하무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마침내 사람을 통제하는 길목에 다다르자 말에서 내린 리온이 책임자처럼 보이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리온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곧장 길을 터 주었다.

“현재 진상을 조사 중입니다. 성벽을 지키던 모든 병사가 일시에 행동하여 진압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원 사살하여 처리했습니다.”

병사는 설명하면서도 엿듣는 베로니카를 불안하게 힐끔거렸다. 리온이 그 의미를 먼저 눈치챘다.

“동화자였나?”

“예. 직접 보시겠습니까? 마침 비텔스바흐 경도 와 계십니다.”

동화자라고? 바하무트가 침입한 게 아니라?

베로니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동화된 인간은 반나절도 채 생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동화된 채 움직이려면 반나절 안에 바하무트를 마주쳤어야 말이 된다. 하지만 카르트는 완전 봉쇄 상태였다.

샘솟던 의문은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성벽에 오른 순간 저절로 풀어졌다.

시야가 닿는 지평선 끝까지 바하무트가 빼곡했다. 그것들은 성벽에 가까이 오지 않았지만 눈이 듬성듬성 녹은 땅에 하나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서 있었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붉은 눈이 만든 징그러운 점이 보였다. 엄청난 수에 소름이 끼쳤다. 아마 대포를 쏜 동화자들은 성벽 바깥에 선 바하무트와 눈이 마주친 듯했다.

바깥이 어떨지 시체의 환상을 보며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들어올 때와 완전히 달라진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베로니카도 아늑하고 안전한 카르트의 모습에 현혹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밖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 위험을 잊기란 얼마나 쉬운지.

“성벽 위에는 20대 초반의 병사들을 배치하라고 듣지 않았나?”

“예, 안 그래도 지시가 내려와 나이가 찬 인원은 무기 관리 등 후방으로 빼서 관리 중이었습니다만….”

대답한 병사는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20년 전 광야의 석상을 보았던 자들만 동화되는 게 아니었습니까?”

리온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인상을 굳혔다. 베로니카는 쿵쾅대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시체는 수십 구가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고 주변에는 얼굴을 모르는 성기사가 여럿 서 있었다.

리온이 시체를 살피는 사이 베로니카는 안내한 병사 뒤에서 눈치껏 걸음을 멈췄다. 굳이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붉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눈꺼풀이 없는 바하무트처럼.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생각에 잠겨 다시 성벽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이었다. 베로니카는 숨을 딱 멈췄다. 바하무트들의 빨간 눈동자가 모조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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