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나 황녀 전하께서 점심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여관 주인과 함께 찾아온 사람은 황녀의 시녀였다. 베로니카가 순순히 따라온 데는 방문한 이가 기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한몫했다. 어제의 공포를 떠올리지 않을 만큼 시녀는 상냥했고 그것은 도착해서 만난 요한나 황녀도 마찬가지였다.
“내 점심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어제 시합은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황녀는 출신이 믿기지 않으리만치 그녀를 다정하게 맞이했다. 베로니카는 제 손에 닿는 매끄러운 실크 장갑에 시선을 내렸다. 고급스러운 온기는 현실감이 없었다.
황족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나 친구가 되자는 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머릿속에 꽉 들어찬 잔상은 뺨을 어루만지던 황녀와 그녀를 내려다보던 리온이었다.
뭐였지, 그건?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때 귓가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동화자까지 부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리온이 서릿발 도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게 단둘이 함께하는 영광을 내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단둘이. 그 안에 담긴 암시에 베로니카는 군침 도는 식탁을 앞에 두고도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혔다. 어제까지 그녀와 짙고 깊은 입맞춤을 나누던 남자는 오늘 다른 여자와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접은 천차만별로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카이젠미어에 신이 내린 자비라고 불리우는 요한나 황녀이고, 베로니카는 이제 인간조차 아니었으니까.
질투란 뭘까.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토록 서럽고 초라하게 만들까.
어쩌면 베로니카는 은연중에 리온을 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만이 그의 틈을 보았다고, 자신만이 그에게 진실로 공감할 수 있다고.
우리는 특별하다고.
“우리의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가끔은 나를 양보해 줘요. 그대는 전장을 구르다 죽을 말이 불쌍하지도 않은가요.”
황녀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리온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정하는 듯한 어조였다.
전장을 구르다 죽을 말이라니, 베로니카가 의아하게 눈을 굴리자 황녀는 어머, 하며 입을 가렸다.
“아, 혹시 몰라요?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뭘, 말씀하시는 건지.”
“전하.”
리온이 베로니카의 말을 잘라 내며 끼어들었다. 황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베로니카를 불쌍하게 바라봤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명백히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따돌림당하는 줄도 모르는 어린애가 된 심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가 황족이고 이곳이 발소리도 죽여야 하는 황궁인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아무튼 마음껏 먹어요.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고.”
기다란 탁자의 중간 지점에 베로니카를 앉힌 황녀는 끄트머리 상석에 가 앉으며 말했다. 본인은 손끝 하나 대지 않으면서 턱을 괴고 베로니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실은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속도 안 좋았지만 예의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이름 모를 싱그러운 채소 요리를 골라 먹었다. 식기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피던 황녀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손목이 부었네요.”
베로니카는 연푸른 멍이 드러난 팔목을 내려다보다가 소매로 가리며 대답했다.
“부딪혔어요.”
“양쪽 다?”
“네.”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황녀의 뒤로 딱딱하게 굳은 리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왜 전혀 몰랐다는 듯이 보는 걸까. 어울리지 않게 불편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손목의 멍은 물론 리온이 어젯밤에 만들어 낸 자국이었다.
아마 황녀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할까 봐 겁이라도 나는 모양이었다.
왜? 인간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으면서. 그도 저 금발의 여자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가.
체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사고는 비틀린 채 아무대로나 향했다. 뜻대로 안 되는 감정은 영혼의 재난이었다. 그래도 참아 냈다. 체할 것 같은 정적과 시선 속에서도 베로니카는 버텨 냈다.
꾹꾹 눌러 참던 설움이 터진 건 문득 벽에 걸린 투구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여태 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대놓고 전시되어 있었다. 앉은 자리의 맞은편. 벽에 걸린 탄비아산 강철 투구.
분명히, 제작한 장인이 죽어서 세상에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티란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 주려고 만들었지만 연인이 죽는 바람에 자살한 대장장이의 작품이라고.
“뭘 그렇게 봐요?”
베로니카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어 왔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여 대답했다.
“벽에 걸린 투구가 낯이 익어서요.”
“투구? 아, 저거요? 당신을 초대한다니까 베르크 경이 내게 준 선물이에요. 그럴 필요 없는데 아무래도 바하무트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죠. 옆에서 호위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말이에요.”
황녀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베로니카는 하얗게 질린 손등에 푸른 혈관이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울컥 안에서 뭔가가 치솟으며 눈앞이 부옇게 변했다. 괴물, 괴물. 여러 번 그의 말에 상처를 받았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는 진정 자신이 황녀의 뇌를 먹으려 들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리온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는 황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가라앉은 시선과 마주쳤지만 그 눈은 도저히 풀어 낼 수 없는 난제처럼 여겨졌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끝끝내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간신히 반짝이던 희망의 불씨가 파시식 꺼졌다. 새카만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베로니카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제 슬펐다면 오늘은 화가 났다.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라 하는 것까진 이해한다. 하지만 넘어간 마음을 짓밟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리온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이 적어도 한 명은 흡족하게 만들었는지 황녀는 싱그레 웃더니 새 접시를 가져오는 시종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만 가져오고 접시를 치워라. 식사는 이쯤으로 충분할 것 같구나.”
만찬은 시작했던 때처럼 멋대로 끝이 났다. 황녀는 식기를 내려놓는 베로니카를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오늘 부른 이유를 내가 제대로 말하지 않았죠.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죽은 기사는 내 호위였어요.”
“…송구합니다.”
“아니, 사과를 듣자고 하는 말은 아니고. 어차피 테오도르 경은 황제 폐하가 아끼시던 기사지 난 그다지 상관없었으니까.”
황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처음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웃다니. 다정하고 겸손한 황녀를 질투에 눈이 멀어 너무 꼬아 보는 것일까?
베로니카는 기사의 죽음이 언급된 것만으로 손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황녀는 그녀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을 둘이나 얻었으니 내게 손해는 아니에요. 베르크 경은 내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죠.”
충성 맹세. 모래알을 씹듯 앞 문장이 귀에 걸렸지만 베로니카는 애써 제 얘기에 집중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친우가 되어 줘요.”
“송구합니다. 전하. 저는 제가 감히 전하의 친우가 될 만한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바깥의 위험을 보는 눈을 가졌어요. 그 정도 정보로도 내 작은 새가 되기는 충분해요. 뭐, 어제의 결투를 본 황제 폐하께서는 반대하셨지만. 베르크 경이 내 옆에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어요.”
“…….”
“내 친우라는 자리는 나쁘지 않아요. 보석이든 드레스든 날 따라다니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거든요.”
황녀는 마치 선택지를 던져 주듯 말했다.
마치 친우가 되기 싫다고 말하면 무사히 보내 주기라도 할 것처럼.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손끝을 문지를 때였다. 문득 뇌리에 기발한 발상이 스쳤다. 원하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혹시 원하는 글도 볼 수 있을까요?”
“글?”
황녀는 황당한 듯 되물었다. 글이라는 말보다도 그녀가 요구 사항을 똑바로 말한 데에 더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애초에 그렇게 쭈뼛대고 수줍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분이 가라앉아서 입에 음식만 밀어 넣고 있던 것뿐이다.
“정확히는 기록이 될 거예요. 환상을 볼수록 과거의 예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요. 전하의 친우가 된다면 제가 감히 황실 서고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요?”
감히 황족에게 요구하는 목소리는 또박또박 뚜렷했다. 리온에게 맘 상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예법에 맞는 말투인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여태껏 흐릿하던 시선을 똑바로 들자 황녀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서고라, 뜻밖의 요구인데. 리온, 어떻게 생각해요?”
“예언과 관련된 자료는 교황청에 더 많을 겁니다.”
리온은 분명 황녀에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베로니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을 통제할 권리는 없었다.
“아니요. 저는 황실의 기록을 더욱 신뢰해요.”
베로니카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베로니카가 봐 온 교회는 늘 진실을 은폐하고 숨기는 집단이었다. 지금도 카르트 시민들은 바깥의 상황을 모른다. 정보를 통제하는 자들은 충분히 역사를 왜곡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교황청이 예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가졌든 간에 더 객관적인 기록은 황궁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교황청보다 황실을 더 높이 치는 듯한 발언에 요한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기꺼이 서고를 드나들도록 허가를 내주지요. 대신 내 궁에서 생활하는 게 조건이에요.”
원하는 것을 얻은 베로니카는 다소간 긴장을 풀었다. 반면에 리온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