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50)화 (50/128)

카이젠미어 황궁.

“너무 먹기만 하지 말고 마시기도 하렴. 아니, 물 말고. 저기, 저 남부의 포도밭에서 올라온 신선한 와인은 어떠니?”

황녀는 사르르 웃으며 부채 끝으로 널따란 테이블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진수성찬 앞에 앉아 주춤하던 어린 하녀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거머쥐었다.

“응, 착하지. 괜찮아. 마셔도 돼.”

황녀는 동화 속 공주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소녀라 불러야 적당한 아이는 술을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입을 살짝 벌린 황녀는 몽롱하고도 흡족한 낯이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리온이 입술을 뗐다.

“아직 술을 즐길 나이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오, 괜찮아요. 나를 위해 마시는 거거든요.”

다섯 사람이 넉넉히 앉을 붉은 벨벳 의자에 옆으로 누워 있던 황녀는 그제야 뒤에 서 있던 리온을 기억해 냈다는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곧 봄의 시작을 알리는 건국제 아니겠어요. 숙녀들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으려면 식단 조절을 피할 수 없답니다. 이렇게라도 대리 만족을 해야지요.”

황녀를 위해 마신다. 그것은 나이 어린 하녀가 그 대상이라는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리온의 눈에 황녀는 장난감의 사정 따위 고려하지 않고 벽에 던지는 아이와 흡사해 보였다. 하녀는 벌써 두 시간째 식사 중이었다. 이미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러나 그거론 부족했다. 더 먹어야 했다. 황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녀가 내보내 줄 때까지.

“아, 물론 적절한 훈육의 의미도 있고요. 저 아이가 감히 내 목걸이를 탐냈거든요. 그래서 손이 잰 아이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왜 이렇게 느리담?”

그녀가 경고처럼 혼잣말하자 화들짝 놀란 하녀는 입에 음식을 급하게 쑤셔 넣기 시작했다. 볼이 가득 찼는데도 쫓기는 사람처럼 감자 요리나 빵을 목구멍에 욱여넣었다. 황녀는 고급 식기를 쓰지 않고 손으로 집어 먹는 아이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리온은 무표정하게 하녀의 손이 향하는 접시를 살폈다.

그토록 휘황찬란한 요리가 눈앞에 있는데도 부르튼 손은 그나마 가장 익숙한 빵이나 감자 요리로만 오가고 있었다.

리온은 저런 아이가 황녀의 목걸이를 탐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전하. 대(對) 바하무트 군단 편제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맞아요. 군단, 군단 말이죠….”

황녀는 자극적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무의미하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에 카르트 내 모든 군사를 소집하셨어요. 근위병들을 빼곤 전투 인력 모두가 동원될 거예요. 보통 이렇게 말했을 때는 거짓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글쎄, 느긋한 카이젠미어답지 않게 진실로 긴장하신 모양이더군요. 테오도르 경의 죽음이 꽤 충격적이긴 했어요.”

그때 하녀가 헛구역질을 하더니 끝끝내 토하기 시작했다. 황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자 시종들이 다가와 하녀를 질질 끌어내고 토사물을 치웠다.

시시해졌다는 표정을 짓던 황녀가 홱 고개를 돌린 건 그때였다.

“어머, 그런데 왜 아직 거기 서 있어요? 어제 말하지 않았나? 내 기사들은 내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그녀는 어제 온종일 리온을 끌고 다니며 제 일과와 그가 따라야 할 사항들을 주지시켰다. 예상대로 거기엔 기사로서의 호위 이외에 불미스러운 업무의 암시도 존재했다.

리온은 황제가 사랑스러운 황녀의 침실에 들어오는 기사들의 존재를 아는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황녀는 어제 만났을 때도 옆에 있던 기사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사내와는 상호 존중한다고 했던가.

“이리로 와요.”

황녀의 고아한 미소가 망막에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리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바치겠다 약속드린 충성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아, 물론이죠. 리온, 나는 그냥 당신이 내 말동무가 되어 주길 바랄 따름이에요.”

“말동무라면 지금 선 자리에서도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선을 긋는 어조에 황녀는 과장되게 혀를 찼다.

“이런, 잘 모르나 보군요. 마음을 나누려면 가까이 붙어 있어야죠. 때로는 신체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답니다.”

그 정도는 리온도 알고 있었다. 몸과 마음의 연결은 최근 그가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진리이기도 했다. 순간 웅크린 여자의 뒷모습이 기습적으로 뇌리를 스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가슴 한구석이 이유 없이 선득했다. 자괴감에 가까운 시커먼 배덕감이 그의 몸에서 진득한 독처럼 흘러내렸다.

죄. 죄를 지었다. 그간의 행위가 육신의 죄에 불과했다면 어제 그는 영혼으로 여자를 탐했다. 리온은 날이 밝아 입궁하기 전까지 성전에서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마음으로 무엇을 범했던가. 감히 무엇을 꿈꾸었는가. 신께 가진 전부를 바친 그에게 이미 남은 것은 없을진대.

이미 오해는 공공연했지만 리온은 군중의 손가락질보다 제 신념에 더욱 크게 베였다. 가장 깊게 찔러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 누구도 자신보다 제게 가까이 있지 않았다. 타인은 잘라 내고 나면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상처 입을 때 인간은 비로소 제 살을 자르고 뼈를 깎게 된다.

“그러고 보니 항상 궁금했는데.”

리온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황녀는 의자를 무릎으로 딛고 일어나 그에게 밀착하듯 몸을 기울였다. 반사적인 불쾌감이 고뇌를 뚫고 들어왔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팔라딘은 일곱 살 때부터 정신적 수련에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시기가 더 늦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 나이는 상당히 무지한 시기잖아요. 그럼 배우고 접할 기회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세속적인 행위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장하나요? 아니면 육신을 가진 인간인 만큼 본능에 따라 세상을 알게 되나요?”

이야기는 예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리온은 무표정하게 수도원 생활을 돌이켰다. 귀족의 아이들. 그들에게는 그와 달리 바깥 세계와의 끈이 있었다.

“물론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절제와 신앙을 먼저 배운다 해서 속세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유혹에 넘어가거나 흔들리는 때가 있을 텐데요. 수도원에 들르는 아름다운 소녀들도 있을 테고요.”

“그럴 때는 손을 들어 더러운 아이를 가리키면 됩니다.”

“더러운 아이?”

황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이 규율을 어기고 욕망에 따라 행동했을 경우 태어나는 ‘베르크’의 아이 말입니다.”

그가 어떤 대접을 받는지. 무슨 능력을 갖고도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여 주면 된다.

신흥 부자들이 돈으로 작위를 사는 시대였다. 황제는 귀족의 권위를 낮추기 위해 평민들을 개나 소나 귀족으로 만들었고, 그런 집안에서 특히 수도원에 아이를 많이 보냈다.

어린 리온은 친구들이 자신과 무엇이 그렇게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부조리한 규율에 대한 회의감과 느슨한 태도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교회는 그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부정한 인간은 회개해야 했다. 더더욱 신실해야 했다.

“아, 마음 아파지니까 부디 자학하지 말아요. 리온.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요?”

말은 그렇게 해도 눈썹을 축 늘어뜨린 황녀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눈 안에 기쁨이 흘러넘쳤다.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흔하디흔한 희락이다. 역겨웠다.

눈을 내리깐 리온의 얼굴에 그녀가 손을 댄 순간이었다.

“전하, 기다리시던 방문입니다.”

밖에서 시종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녀는 리온에게서 시선도 손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들여보내라.”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황녀가 웃음처럼 속삭였다.

“어려운 시기에 음식을 낭비하는 건 황궁 요리사들에게 미안한 일이라서 말이에요. 다른 손님을 초대했어요. 즐겁게 볼 수 있도록 둘 다 아는 사람으로 불렀는데.”

죽은 듯 가라앉아 있던 리온의 눈빛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성마른 시선을 돌리자 충격받은 얼굴을 한 검은 머리의 여자가 시야에 박혀 들었다. 지금쯤 여관 방에 있어야 할, 방금 전까지 그의 정신을 점령하던 그 여자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비었다.

리온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황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평소라면 절대로 범하지 않았을 멍청한 실수였다. 오해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내 점심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어제 시합은 정말 감명 깊게 봤어요.”

리온이 딱딱히 굳어 있는 사이 황녀는 활짝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가 여자의 손을 양손으로 맞잡았다. 황족답지 않게 친근하고 스스럼없는 태도에 여자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요한나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필요할 때는 평민에게 존칭도 쓸 줄 알았다.

“오늘 부른 건 뭐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친해지고 싶어서 불렀어요.”

“…저랑요?”

“네. 혹시 마음에 안 내킬까요? 내 위치 때문에 불편하겠지만… 음,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 본 힘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거든요.”

리온은 자연스럽게 손을 붙잡고 테이블로 이끄는 황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발랄하게 구는 황녀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순수해서 아는 사람도 속을 법했다.

“그간 리온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기도 하고요. 아, 나 좀 봐. 너무 내 얘기만 하네. 들뜰 때마다 꼭 이런다니까요. 점심은 먹었어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황녀는 기뻐하며 그녀를 테이블에 앉혔다.

리온은 그가 입궁하기 전, 그러니까 하녀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의 풍경을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도가 아니다. 정확히 지금과 같았으리라. 황녀는 제 방에 드나드는 시녀가 아닌 뒷배 없고 어리숙한 하녀를 불러들였다.

“대접을 위해 차린 음식이에요. 마음껏 먹어요.”

그녀가 다스리는 백성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평민들이었다. 짓밟아도 비명조차 들리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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