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9)화 (49/128)

눈처럼 차가운 고요가 흘렀다. 마치 그 예리한 마찰음이 소리와 정적의 경계라도 된 것 같았다. 여자는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뒷걸음질 쳤다.

리온은 얼얼한 입 안을 혀로 굴려 본 뒤 픽 웃었다.

“손도 작은 게 꽤 세게 때리잖아.”

“가까이 오지 마요. 아까 죽은 기사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물러서던 여자가 한 손을 뒤로 돌려 문손잡이를 잡으며 경고했다. 그녀의 두 걸음이 그의 한 걸음이었다.

“아, 내 머리를 날려 버리려고?”

“필요하면요.”

“해 봐, 그럼.”

문이 열리며 빛이 기다란 자국을 남기자 리온이 손으로 열리던 문을 쾅 눌러 닫았다. 문과 그사이에 갇힌 여자가 놀란 호흡을 삼켰다.

“비명 지를 거예요.”

“질러.”

그가 허리를 숙이자 밀어내려는 듯 손이 올라왔다. 리온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양 손목을 한 손에 쥐어 올려 문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매일같이 체액을 나눈 여자의 입술에선 이제 그의 성력이 줄줄 새어 나오다시피 했다. 그것이 지독히 만족스러워서, 그는 결코 채울 수 없을 독을 채우고 또 채웠다.

반항할 듯 손목을 움찔거리던 여자는 부드럽게 얽힐수록 힘이 빠져나갔다. 다리까지 풀린 듯 잡은 팔목의 무게가 무거워졌지만 리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불필요한 흥분을 가라앉히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다른 종류의 흥분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리온은 끊임없이 그녀를 놓아줬다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손목을 놓고 얼굴을 감싸자 가느다란 다리가 미끄러지려고 해서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었다. 서로의 굴곡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밀착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그녀를 받쳐 올린 상태였다.

여자는 그의 옷을 찢어져라 그러쥐다가 결국 목덜미에 팔을 휘감았다.

질척한 소리는 금세 야릇한 음색을 띠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교성보다 더 자극적인 건 소리를 참기 위해 목구멍을 조이면서 터뜨리는 짧은 신음이었다. 스스로는 모르는 듯했지만 여자는 흥분하면 허리를 미약하게 흔드는 습관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돌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낄 즈음 리온은 드디어 녹진해진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헐떡거리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쯤 풀린 눈을 깜빡이다가 어깨를 밀어냈다.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내려, 내려 줘요.”

쉬어서 잠긴 목소리는 애원과도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요구했다.

“내려 줄 테니까 울어 봐. 날 찾아왔던 날처럼.”

자신만을 위해, 다시.

불쌍한 인간에게 서럽고 외로운 사랑을 베풀어.

“크게 소리 내서 울면 놔 줄게.”

“당신은 미쳤어요.”

여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동의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역겹다면서요. 비위가 좋네요.”

빈정거리는 말투에 리온은 피식 입매만 당겨 올렸다.

“역겹지. 그런데 네가 쾌락에 흐트러지는 꼴을 보는 건 좋아. 화가 단숨에 풀리거든.”

원래도 낮은 목소리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아, 내가 상대하는 생물은 이렇게 열등하고 야만적인 괴물이었지. 성력 한 방울 더 받아먹고 싶어서 아무한테나 천박하게 달라붙는.”

리온은 상처받은 눈을 파헤칠 듯이 바라보았다. 속을 쉽게 들키고 마는 건 본인의 잘못이다. 그녀는 투구를 썼어야 했다. 그의 것을 사 줄 시간에 제 얼굴을 지켰어야 했다.

“아무한테나… 아니에요.”

“그래? 난 누구든 상관없었을 거라고 보는데. 그 잿더미에서 건져 준 인간이 누구든.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정도만 된다면.”

내뱉고 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드디어 그녀를 찾아 거리를 헤매던 감정의 동기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초조했다.

그에게 그녀가 특별한 만큼 그녀에게 그가 의미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한심하게도, 언젠가 죽여야 할 여자에게 흔들리고 있던 거다. 아무리 마셔도 목이 마른, 독이 든 술 같은 여자에게.

아버지, 오늘 밤은 감히 여인을 탐하는 꿈을 꾸었으니 아침이 오지 않는 형벌도 달게 받겠나이다.

눈꽃이 더러운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다정한 겨울이 끝나가는 냄새가 났다.

***

검은 밤을 하얀 침대 속에서 버틴 것 같다.

베로니카는 밤새도록 소리죽여 흐느꼈다. 어릴 적 오랜 습관대로 먹먹한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눈물을 멈추려고 갖은 애를 썼다.

관심 끌려고 울지 마라, 눈물도 안 나오는데 훌쩍거리지 마라. 어린 베로니카에게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녀를 강하게 키우고 가르치고자 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안아 주고,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쉽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녀를 당황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지 않고. 눈물 흘리는 게 수치라도 되는 것처럼 못 본 척해 주지 말고.

우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 준 사람은 지금까지 리온 한 명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모든 처음을 가진 남자였다. 결코 아무나가 아니었다. 그 서릿발 같은 남자는 영영 모르겠지만.

리온은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자 침대에 내려 주었다. 밤새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새벽이 밝기도 전에 방을 나갔다. 베로니카는 닫히는 문 뒤로 자물쇠가 잠기는 덜거덕 소리를 들었다. 첫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이 방은 햇빛이 들어오는 검은 복도였다.

베로니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리온과는 관련되지 않은 것. 희망으로 살아갈 의지를 부여하는 것.

그때 문득 지난 저녁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한나와 에밋이 사는 아늑한 집은 검은 복도의 잔상을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화장실에서 나간 직후 베로니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죽 카르트에 살았는지를 물었었다. 에밋은 그렇다고 했고 한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음, 아니요. 나고 자란 건 아셀도르프예요. 결혼하면서 카르트로 왔죠. 아셀도르프 가 본 적 없죠? 거기가 이웃끼리 정다울 정도로 작은 도시라서 인심이 좋아요. 나중에 봉쇄가 풀리면 한번 가 봐요. 우리 부모님이 작게 여관을 하는데 내 이름을 대면서 묵어도 좋고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아득해졌다. 딛고 선 바닥이 갈라져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아는 지명을 듣고도 동요를 티 내지 않았다. 그곳에 가 봤다고도, 그곳의 상황도 설명하지 않았다. 때때로 아는 것은 병이 된다.

만약 이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면, 확실히 살아남게 된 후에 한나가 사실을 알게 돼도 늦지 않다. 베로니카는 제 마음이 편하자고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인 짓이라 생각했다.

한나는 홑몸도 아니었다. 슬픈 소식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베로니카는 그린 듯이 아름답던 한나와 에밋의 집을 떠올렸다. 입이 떡 벌어지게 부자도 아니고 그들도 깊이 들여다보면 완벽한 부부는 아니겠지만. 가정은 따뜻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이가 펠릭스든 펠리시티든 부모는 사랑을 베풀 테니까.

“카르트는 지켜 내야 해.”

혼잣말한 베로니카는 억지로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교황청에서 얻었던 등의 상처는 이제 아프지 않았다. 손을 뒤로 돌려 등을 만져 보니 거칠하고 단단한 딱지가 만져졌다.

찬물에 씻고 나오자 문 앞에 놓인 음식이 보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려 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가진 점원이 그녀가 자는 동안 넣어 둔 모양이었다.

접시 뚜껑을 열자 잘 구워진 닭 다리와 순무 수프, 검은 빵이 보였다. 배고픈 줄 몰랐는데 막상 음식을 보니 입맛이 돌았다. 베로니카는 열심히 손과 입을 움직여 몸에 기력을 보충했다. 식사 중에는 생각을 멈추고 여러 번 씹고 잘 넘기는 데만 집중했다. 살아야 했다.

홀로 살아남으며 생긴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아셀도르프에서도 운 좋게 살아나온 것이라고.

그러니 고작 리온과의 관계 때문에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베로니카는 항상 구비되어 있는 양피지를 들어 어제 떠올린 추측에 대해 상세히 적기 시작했다.

소리를 들었다고. 바하무트는 신의 머리를 찾고 있다고. 제 생각에는 사라진 신이 광야에 모였던 사람들 중 하나에게 깃든 것 같다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다. 신의 존재도 의심하는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끄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웠다. 하지만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런 의미에선 그야말로 종교적인 직감이 빨간 불로 번쩍이고 있었다.

하늘 저 너머에서 온 생물이 이 땅을 가지고 싶어 한다.

보통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생물을 죽이면 끝나는 일이지만, 그것은 현명하게도 진리를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신’이 있었다.

형체가 없으니 죽일 수도 없는 신. 과연 삼킨다고 사라질까 확신할 수도 없는 신.

그 신이 어느 날 사라졌다. 인간의 틈에서. 그래서 그것은 신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동화시키기로 결정했다. 동화자는 바하무트에게 정신을 잠식당한다. 세상의 신이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수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두는 근거가 없는 한 결국 베로니카의 망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료를 찾아야 했다.

황궁에서든 교황청에서든 리온이라면 20년 전 신상에 대한 기록을 조사할 수 있으리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며 베로니카는 양피지의 마지막 줄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때, 운명처럼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