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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8)화 (48/128)

애초에 여자가 갈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리온은 가장 먼저 교황청에 찾아갔다. 황제가 비호하는 사형수를 잡아들였다는 말은 없었다.

“아, 오스카 베르크 말입니까? 어디 보자, 저녁을 먹고 나간 후에… 음,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올바른 행실을 갖춘 기사라기엔 꽤 늦은 시각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근무 시간 외의 외출은 자유 아닙니까. 아무래도 기상 시간이 있으니만큼 알아서 잘들 들어옵니다. 에, 오스카 베르크의 경우 예외기는 하지만 듣기론 집이 카르트 외곽에 있는 데다 나이 든 양부모를 돌봐야 해서 매일같이 늦는다고 하더군요.”

숙소의 출입 기록을 눈으로 훑던 기사가 설명했다.

공식적으로 리온은 기사단을 나왔지만 그간의 역사가 있기에 위계는 조금 모호한구석이 있었다. 마음대로 출입은 못 해도 기사들의 호의를 이용해 먹을 수는 있을 만큼.

“카르트 외곽이라. 그 집의 위치를 아는 자는 없나?”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베르크의 성을 단 자와 귀족 자제들이 집까지 찾아갈 정도로 우애를 나눌 리가 없었다.

고개를 까딱이고 들어가 보라 손짓한 리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기사단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자는 오스카와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신경을 긁는 건, 걱정이 아닌 다른 무언가다.

리온은 새카만 방을 본 순간 해일처럼 밀려든 감정을 생각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오스카는 늦은 귀환이 일상이라고 했다. 그건 리온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항상 방에 있었다. 그전까진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몸에서 흘러내린 새카만 어둠이 늪처럼 영혼을 빨아들였다. 기이한 불안이 정신을 좀먹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온기는 그에게서, 쉽게 도망쳐 버렸다.

손아귀에 있던 새가 빠져나가려고 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작은 새가 다칠 걸 알면서도 욕심껏 그러쥐고 싶어지는.

밤거리를 걷던 걸음은 여관 앞에서 우뚝 멎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똑같이 멈춰 선 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스카가 먼저 예를 차려 인사했고 여자는 어색하게 다가왔다.

역시, 그랬나.

“늦게 왔네요. 혼자 있기 무서워서 잠깐 다른 사람들이랑 있다 오는 길이에요.”

“다른 사람들?”

리온은 조용히 반문했다. 여자는 카르트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교황청에서 나왔을 때 잠깐 신세 진 사람들이요. 안 그래도 관련해서 할 말이 있었는데, 들어가요.”

“베르크 경도 오셨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자가 들어갈 기색을 보이자 오스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는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리온은 멀어지는 오스카의 뒷모습을 보다 건조하게 내뱉었다.

“취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지.”

“…네?”

“기사가 취향인 거면 저런 딱딱한 녀석 말고 다른 놈을 골라 보지 그래.”

느리게 시선을 내리자 의아한 얼굴을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가 취향이니 어쩌니 하는 개소리는 사실 오늘 황녀가 그의 귓가에 속살거렸던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다가오는 건국제 때 충성 맹세를 받고 싶다고 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 앞에서, 신을 사랑한 기사에게 살아 있는 주인이 있음을 보여 주겠노라고.

“방탕한 인간들은 특히 황실 기사단에 차고 넘치지. 아마 동화자랑 하룻밤 놀아 줄 취미를 가진 놈들도 꽤 있을 거야.”

그녀가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함부로 오해하지 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게 뭔데?”

“알잖아요. 저 사람은 당신과는 달라요. 날 이용해 먹으려는 게 아니라 잘못을 사죄하고 싶어하는 것뿐이에요.”

리온은 자신을 모욕하는 말보다도 뒷부분에 집중했다.

“잘못? 오스카 베르크가 네게 사죄할 만한 일을 저질렀나?”

싸늘한 목소리에 그녀는 당황해서 눈을 굴렸다.

“그건…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오늘도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만났을 뿐이에요. 그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당황했는지 여자는 명백히 쩔쩔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오스카를 감싸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순진해 빠졌다. 리온은 탄식 섞인 조소를 흘렸다.

“눈치 빠른 것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멍청하단 말이야.”

거슬렸다. 금세 마음을 열고,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를 짓고, 덕분에 몰아치는 바람에 더 아프게 흔들린다.

“말했을 텐데. 사내새끼들이 잘해 주는 이유는 착해서가 아니라고.”

“…왜 화가 났어요?”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자 여자가 한 발자국 물러서며 물었다.

화가 났다고? 리온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화가 나려면 걱정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겐 그녀가 상처받는 걸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입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어차피 죽일 테니까.

“화? 안 났는데.”

“화난 거 맞잖아요.”

여자는 억울하다는 듯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밖에서 화가 난 걸 왜 나한테 풀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적대적인 태도에 이미 한계까지 쌓인 피로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리온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입을 뗐다.

“잘못한 거야 많지. 방 안에 있으라는데 그 잠깐도 참지 못해서 남자를 찾은 쪽이든, 굳이 죽일 필요 없는 인간의 머리를 터뜨려서 일을 귀찮게 만든 쪽이든.”

“안 했으면 내가 죽었어요.”

“죽게 내버려 뒀을 것 같아?”

리온이 나지막이 되묻자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목덜미가 저릿할 정도로 새빨갛게 짙어진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그게’ 죽기 전까지 네게 그런 자유는 허락되지 않아.”

순간 여자의 얼굴에서 실망처럼 핏기가 가셨다. 심장이 죄이는 통증에 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부글부글 흘러넘친 검은 피로가 허리와 어깨를 넘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시합을 망친 건 너야. 우린 네가 위험해지기 전에 시합을 중지할 생각이었어.”

상대가 기사가 아니라 황제였다 해도 그녀를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했을 게 분명했다. 황녀에게 맹세가 아니라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에겐 그녀가 필요했으므로.

“우리…?”

그때 여자가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보는 사람이 더 쓸쓸해지는 표정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뜻밖의 것이었다.

“이런 점은 닮았네요. 메클렌부르크랑.”

리온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무언가 치민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도 나를 쓸모를 위해 살려뒀었죠. 뭐가 백성을 지키는 기사에요? 뭐가 신념이고 신앙이야? 신의 자비는커녕 잔혹함만 배웠으면서.”

여자는 울 것 같았다. 아프게 떨리는 목소리에 리온은 날카로운 미소를 그렸다.

“슬슬 살려 준 일이 후회되는데 말조심하지 그래.”

경고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 말은 오히려 여자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고 말았다.

“당신이 언제 날 살려 줬어요? 몇 번이나 죽어 버리라고 지옥에 던졌지. 그래서 화가 나요? 죽으라고 보냈는데 자꾸 살아 돌아와서? 귀찮게 와서는 당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불길한 소식이나 전해서?”

아, 이 여자는 항상 이렇게 선을 넘는다.

“입 다물어.”

마침내 리온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메클렌부르크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랐다. 하필 모친과 똑같은 검은 머리를 하고. 그놈의 메클렌부르크.

“왜요? 이름만 나와도 못 견디겠어요? 애정 결핍은 나만 있는 줄 알아요? 당신도 똑같아요. 실은 그가 당신을 위해 블라센 산을 올랐다고 믿고 싶으면서. 그날부터 잠도 잘 못 자면서!”

밤이 깊어 텅 빈 거리에 여자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사라지자 이윽고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빈자리를 메웠다. 리온은 숨을 몰아쉬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다 했어?”

“…….”

“다 했으면 들어가. 피곤하니까.”

“안 끝났으면요?”

“끝내.”

“말 안 통하는 어린애 취급하지 마요.”

“그럼 어른답게 행동해. 아무 데서나 언성 높이지 말고.”

무심히 내뱉은 리온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발길을 돌렸다. 귀찮게 이마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곤 여관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쫓아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리온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따라잡은 건 캄캄한 방 안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회피는 어른다운 거예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솔직한 눈이다.

“잘라 내지 마요. 한 번이라도 진짜 속을 보여 줘요. 인간 아닌 취급 받으면서 껍데기랑 대화하는 거 억울해 죽겠으니까. 이런 식이면 막말로 오스카한테….”

쾅.

리온이 그녀의 팔을 확 끌어당기며 문을 닫았다. 둘만 남은 어두운 방 안은 긴장으로 팽팽했다. 얼굴을 가리는 역광을 등지고 리온이 허리를 숙였다.

“진짜 속? 저번엔 뒤틀렸다고 징징대더니 그게 그렇게 보고 싶어?”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여자는 금세 겁에 질렸다. 알면서도 팔을 빼려고 애쓰는 힘에 응해 주지 않았다. 리온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다가 가녀린 팔을 부술 것처럼 세게 움켜쥐며 속삭였다.

“왜? 그러고 나면 내가 널 좋아하게 될 것 같아?”

찰나지만 반항이 멈췄다. 닿은 팔에서 여자가 경직된 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달빛을 받아 흔들렸다. 붉다.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볼 때마다 리온은 의문을 품곤 했다. 이 여자는 목덜미 아래로 어디까지 붉을까. 어디까지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을까, 하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랑 닿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거든.”

리온은 비웃듯 말하며 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짝, 하고 방 안에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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