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7)화 (47/128)

“어머, 베로니카! 오랜만이에요!”

발을 들인 거실은 벽난로 불이 활활 타올라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배가 더 부른 한나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말로 오스카가 있었다. 차를 마시던 그는 놀란 것 같았지만 섣불리 내색하지는 않았다.

“추워 보이는데 이쪽에 앉으십시오. 몸을 좀 녹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스카의 말에 베로니카는 그제야 제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음을 인지했다. 벽난로 가로 조심스럽게 걸어간 베로니카는 가장 먼저 한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다시 한번 죄송해요. 그때 말없이 사라진 것도요. 걱정 끼칠 걸 알고 있었는데 주변에 일행이 있다는 소식에 성급하게 굴었어요.”

“뭘요.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건데요. 그보다 이거나 한 입 마셔 봐요. 국화차에 꿀을 넣은 건데 달고 맛있어요.”

한나는 으쓱하며 마실 것을 권했다. 그것이 그녀의 배려였는지는 몰라도 속에 따뜻한 게 들어가자 베로니카도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상냥한 부부는 태동이라든가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라든가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오기 전부터 나누던 대화였는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질문에 대비하고 있던 베로니카는 솔직히 안도했다. 저번과 같았다. 평화롭고 안정적이다. 마치 누군가 그려 놓은 ‘좋은’ 가정처럼. 이런 게 정상적인 가정이구나.

어릴 땐 이런 보통 가정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었다. 서로 말만 안 할 뿐 뒤져 보면 모두가 콩가루 아닐까, 하고. 그런데 눈앞에 멀쩡한 사람들이 있었다.

따뜻하고, 안온하다.

“그럼 한나가 만들고 있는 건 아이 옷인가요?”

베로니카는 한참 만에야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나는 미소 지었다.

“그런 셈이죠. 지금 새기고 있는 건 펠릭스의 머리글자예요.”

“펠릭스요? 여자아이면 어떡하려고요?”

“여자애면 펠리시티로 할 거니까 똑같죠, 뭐. 아이는 이름 따라간다고, 행복하다는 뜻의 이름을 지어 주자고 합의 봤어요.”

“이름이 뭐든 간에 두 분을 부모로 뒀으니까 행복할 거예요.”

너무 곧바로 확신을 갖고 말한 탓일까. 찰나 정적이 흘렀다. 베로니카는 민망해져서 횡설수설 덧붙였다.

“아니, 물론 두 분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한 사람은 잠깐만 봐도 알잖아요. 이런 시간에 찾아왔는데도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고, 그리고 오스카도 내면은 좋은 사람 같았으니까 주변 사람을 보면 안다고….”

쿡, 하는 소리는 한나에게서 제일 먼저 터져 나왔다. 베로니카가 퍼뜩 고개를 들자 그녀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마침내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아, 진짜. 맙소사. 왜 이렇게 귀엽지. 에밋, 나도 스무 살 때 저랬나?”

주위를 둘러보니 에밋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고 오스카는 어쩐지 머쓱해 보였다. 베로니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한나가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봐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말했다시피 우리 부부는 오스카 씨에게 빚진 게 있어서요. 하루쯤 손님을 재워 준 걸로 생명의 은인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할 순 없잖아요. 이유도 없이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니랍니다. 계산속이 투철해요.”

“그래도.”

“베로니카도 행복할 거예요.”

베로니카는 멍하니 한나를 응시했다. 거울 같은 눈에 밝게 웃는 얼굴이 담겼다.

“아직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한 사람은 잠깐만 봐도 안다잖아요.”

한나의 뒤편 식탁에는 붉게 피어난 겨울꽃이 유리병에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잠잠하던 베로니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활짝 웃는 얼굴. 검은 단발.

“아이고. 그럼 걱정하실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멀리는 가지 마. 우리 딸도 아가씨 또래인데 시집가서 카르트에 살고 있거든. 보고 싶어 죽겠어.”

아셀도르프의 여관에서 봤던 선반 위 초상화. 상냥하게 걱정해 주고 겨울 과일을 쥐여 줬던 부인.

똑같다. 설마, 하지만. 설마.

소름이 끼쳤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살아 있는 사람을 등지고 도망쳐서 이런 식으로 벌을 받는 건가?

“…전, 저는….”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던 베로니카는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고 입을 막았다.

뭐 해, 이상하게 보잖아. 기껏 좋았던 분위기가 또 이상해지잖아.

시선을 둘러보는 베로니카의 안색이 새파래지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오스카가 뭐라고 말하며 손을 뻗어 왔다. 피하듯 흠칫하며 일어난 베로니카는 뒷걸음질을 쳤다. 세 사람의 다정했던 얼굴이 어느새 다시 새까맣게 변했고 눈은 하얗게 둥둥 떠다녔다. 베로니카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속이 안 좋아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허락이 귀에 닿기도 전에 도망치듯 돌아섰다. 혼자인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툭, 그때 누군가 어깨를 잡아 돌리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스카의 침착한 녹안에 비친 그녀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흔한 질문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괜찮냐고? ‘나’ 괜찮은가?

베로니카는 자문했다. 순식간에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멋대로 들떠서 투구를 선물하고, 몇 시간을 낯선 방에서 기다리고, 목이 졸려 죽을 뻔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빌어먹을,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아?”

“아니요.”

베로니카는 그제야 깨달았다.

안 괜찮았다. 한 번도 괜찮은 적 없었다. 실은 그 방에 있는 시간 내내, 아팠다.

“베르크 경이 당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겁니까?”

마침내 필사적으로 피하던 이름이 수면 위로 올랐다. 베로니카는 뺨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실없이 웃었다.

“리온이요…? 무슨 짓을 하긴 했죠.”

“혹시 억지로 감금되어 있는 거라면 제게 말하십시오. 빚은 나중에 갚아도 되니 당장의 도움은 제공하겠습니다.”

오스카가 사명감 넘치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요? 날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마침 당분간 숙식을 해결할 일자리가 있습니다. 기사단에 들어갈 때까지 저를 돌봐 주신 노부부인데. 요즈음 거동이 불편해서 도와줄 젊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숙식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오스카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리온과 다니면서 잊고 지낸 것들이었다.

이제는 아득히 멀어져 버린, 평범한 일상.

그러나 그런 것은 진정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

“말도 안 돼요. 밖에는 여전히 바하무트가 있는걸요. 그래선 당장 잘 먹고 잘 살아 봤자 큰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베르크 경 옆에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입니까?”

“앞으로가 달라질 거예요. 최초의 바하무트를 발견하는 데는 내가 필요해요.”

“아, 당신이 그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말은 안 했습니다만 그 주장을 하는 건 기사단에서 베르크 경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애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반면 카르트의 안전과 평화는 천년의 세월이 입증해 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성도의 평화는 영원하리라는 것과, 카르트가 무너질 거라는 것? 두 가지 예언은 모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황 성하께서도 당신의 예언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다.”

오스카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게다가 연결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보는 환상도 바하무트의 장난일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 괴물들이 동화된 정신을 어떻게 조종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대화가 여기까지 오자 베로니카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오스카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다 맞았다. 가장 솔직한 동기를 입 밖으로 끄집어낼 때였다. 타당하지는 않아도 절대적인 동기가 되는.

“하지만 좋아하는 걸요.”

“…….”

“그래서 떠날 수가 없어요. 거절당하고도 아직까지 미련하게 감정이 남아서.”

당사자에게는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이다. 그 말이 남에게는 이토록 쉬웠다.

속으로 품는 감정과 밖으로 내뱉는 고백은 얼마나 다른지.

베로니카는 말하고서야 제가 남아 있는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상처받으면서도 버티는 이유. 그에게 외로운 설원의 풍경을 보여 주고 복수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필요한 존재가 되어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뿐이다.

“신의 기사는 신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오스카의 얼굴에는 참담함이 일렁였다. 정해진 비극을 보는 눈이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하겠다는 말입니까?”

“정리가 될 때까지는요. 그리고 오늘 도망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어요.”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한나가 아셀도르프 출신일지는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하겠지만. 만약 예상이 맞다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이번에는 도망갈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힘이 없어 벌벌 떨던 그때와는 달라졌다.

“당신은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군요.”

오스카가 조용히 말했다. 베로니카는 흘낏 눈꼬리를 들었다.

“당신이 생각보다 기사다운 것처럼요?”

“기사다운 게 아니라 기사입니다.”

어이없다는 투를 듣자 베로니카는 진지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쿡, 입가로 웃음이 새자 오스카는 처음엔 진지하게 쳐다보다가 어렴풋이 표정을 풀었다.

비밀을 털어놓으면 친구가 된다는 신비한 마법이 작용한 탓일까. 확실히 아까보다 공기가 편안했다.

사람 일은 참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스카를 처음 봤을 땐 그와 이렇게 화장실에 주저앉아 대화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왜 웃습니까?”

베로니카가 벽에 기댄 채 계속 웃자 오스카가 물었다.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에게 그는 알려 주고 같이 웃으면 안 되겠냐고 당황스럽게 중얼거렸다.

***

없다. 여자가 사라졌다.

리온은 숨을 데 하나 없는 방을 다시 찬찬히 둘러보았다.

뛰쳐나가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하나. 그 외에는 단서가 전혀 없다.

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피곤한 목을 푼 뒤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방 안은 들이치는 달빛 외에는 암암했다. 평생 알았던 익숙한 어둠인데도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듯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돌아오면 늘 침대맡에 켜져 있던 불빛을 떠올렸다. 피곤함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온기는 사람을 순식간에 길들여 버린다. 어둠이 순응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리온은 꺼진 벽난로 불을 살피는 대신 침대에 털썩 등을 묻었다. 피로한 눈가를 덮자 요동치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신을 모시는 인간에게 있어 감정의 동요는 독이었다. 평생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그것이 분노든, 증오든, 사랑이든 싹을 잘라 내야 한다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신의 구원 외에는 그 무엇에도.

리온이 다시 일어난 건 한참 만의 일이었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감정을 내비치는 한 자락의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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