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6)화 (46/128)

귀부인들이 째지는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은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분명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바하무트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 하지만 여자는 일정 선을 넘었다.

‘검’이라는 매개체를 휘둘러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류 기사의 머리통을 날린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좌중에는 흉흉한 불안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점은, 직속 호위가 죽었으니 황녀는 여자를 손에 넣을 명분을 쥐었다는 사실이었다.

“리온, 나….”

“빌어먹을,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아?”

이제 저 경멸스러운 여자가 동화자를 제게 달라고 황제에게 간청만 하면 끝이다. 목덜미를 잡힐 빌미를 제공했다.

“아아, 무엇보다 저기 하늘을 봐요. 신의 전령인 매가 결투를 지켜보았군요. 우리 모두 신께서 자비의 눈을 어느 쪽을 향해 뜨시는지 보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황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사실 그녀가 돕지 않았다면 불길한 동화자를 죽이자는 쪽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리온은 내키지 않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숨을, 잘 못 쉬겠어요.”

팔이 잡힌 채 끌려오던 여자는 뜰을 벗어날 즈음에야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온은 그녀의 턱을 잡고 숨을 몰아쉬는 얼굴을 살피다가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신병들이 보이는 공황 증세와 흡사했다.

“몸이 안 좋은가 보군요. 방을 하나 내 줄 테니 궁에서 쉬다 가요.”

그때 황녀가 불쑥 다가오더니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근사한 오찬을 차릴 생각이니 같이 들어도 좋고요. 카르트 바깥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오찬에 말동무가 필요하시면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동화자는 이만 돌려보내 주십시오.”

여자가 섣불리 말실수를 하기 전에 리온이 대답을 가로챘다. 여자를 가리듯 서자 황녀의 눈이 요사스럽게 가늘어졌다. 아마 오늘은 꽤 시달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정한 상태의 여자를 황녀의 발톱 아래 둘 바엔 이편이 나았다.

시선의 공방도 잠시, 승리의 달콤함을 입에 건 황녀는 결국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빨리 정리하고 와요. 난 우리의 약속이 거행될 날을 계획하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새초롬히 말한 그녀는 부채를 탁 접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시녀들이 따랐고 황실 병사 몇 명은 여자를 여관에 데려다주기 위해 남았다.

“루이벤 거리의 32–21번지다. 무사히 방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오도록.”

리온은 병사들에게 여관의 위치를 알려 주곤 여자의 얼굴에 엉겨 붙은 피를 훑어 내렸다. 손수건을 내밀자 윤기 없는 눈을 한 여자는 조용히 받아 들어 얼굴을 닦았다.

호흡은 나아졌지만 몰골은 여전했다. 그녀의 온몸은 목의 정맥에서 터져 나온 피로 흥건했다. 창백한 낯을 보고 있자니 기묘한 초조감이 치밀었다. 아침처럼 다시 웃어 보라고 하고 싶었다. 다시, 그렇게. 온 세상이 밝아지듯이.

“…내가 준 투구는요?”

그때 여자가 난데없이 물었다. 리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투구?”

그리고 오래지 않아 말뜻을 이해했다. 무기점에서 그녀가 사 온 선물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 그건 황녀의 방에….”

리온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현 장소가 바뀌었단 말에 급하게 나오느라 가지고 나오는 걸 잊어버렸다. 찾으려면 다시 들어가야겠지만….

피로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리온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깜빡하고 어디 두고 왔나 본데. 호흡 말고 또 불편한 데는?”

여자의 핏빛 눈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없어요. 그냥, 얼른 누워서 쉬고 싶은데. 지금 바로 가면 안 될까요?”

“위험할 수 있으니 병사들과 같이 가도록 해. 그리고 방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누구의 위험을 걱정하는 건데요?”

“뭐?”

“아니에요. 아무것도.”

여자가 대화를 끝내려는 듯 돌아섰다.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리온은 거기에 길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황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와의 대화는 오늘 돌아간 후에 하면 된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

황궁의 병사들은 베로니카를 여관까지 데려다주고 서둘러 돌아갔다. 뒤에 호위를 이끌고 있으니 높은 사람이 된 기분을 느껴야 마땅한데 꼭 죄인이 된 듯했다. 거리를 걸을 때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살인자, 동화자, 괴물. 사람을 죽였대. 세 번씩이나.

낮게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귀를 아프게 헤집어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자비로운 신조차 손에 든 검의 개수대로 살인자를 두 번만 용서한다고 했다. 세 번째에는 심판의 칼날이 내려온다.

그렇다면 제게 내려질 심판은 무엇일까.

베로니카는 비척비척 걸어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누였다. 몸에는 한기가 돌았고 머릿속에는 자꾸만 죽어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벤자민. 루에가의 금발 남자. 덩치가 거인 같던 우람한 기사.

“그러고 보니 모두 얼굴이 날아가서 죽었네.”

가뜩이나 혼자 있는데 오싹해졌다. 베로니카는 살기 위해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당연하게도 어떤 시도든 사고의 흐름은 리온으로 귀결되었다. 동시에 서러움과 억울함도 심장을 찡하게 비틀었다. 치졸한 질투다. 알고 있다.

리온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불 속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까맣게 날리는 재 사이에 우뚝 선 그는 마귀를 태우는 사도였으며 신이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성기사라는 사실을 알기 전이었지만 나지막한 기도문이 흐려지는 의식 속에 스며들던 기억이 난다. 리온은 베이른의 거리에 널린 시체들을 태워 주고 있었다.

나중에 바하무트가 분열한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뇌를 넘기지 않을 심산이었겠거니 했지만. 사실 영혼을 보내 주는 것은 사제의 역할이기도 했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기도를 받지 못한 자는 창공의 낙원에 들어서지 못한다.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정한 사람. 자신이 특별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생각하기 싫은데 자꾸만 하나하나 비교되었다. 이목구비가 화려해 시선을 확 잡아끌던 황녀의 얼굴과 입술을 닫은 채로도 우아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괜히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매력 있어 보였다. 베로니카는 본디 자신을 사랑하고 비교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황녀의 초상화가 있다면 가져다 한참 쳐다볼 것만 같았다. 리온은 황녀의 방에 몇 시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까. 무엇을 했을까. 투구를 내려놓았을 정도니 잠깐 있던 것은 아니리라.

아, 제발. 이런 자괴감 드는 생각은 그만하자. 차라리 한숨 자자. 자고 일어나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는 거야. 긴장으로 어제 눈 한번 못 붙였잖아.

베로니카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필사적으로 이불에 숨어들었다. 마모된 정신 탓일까. 정신이 깎이고 깎이다가 어느새 잊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엄마, 불 켜고 자면 안 돼? 어두우면 무서워서 잠이 안 와.”

“그래? 베니, 그럼 엄마가 알려 준 방법을 써봐.”

“아, 또 물고기가 됐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바다 깊이 들어가라고 하려고 그러지? 그거 싫어. 인간은 물고기랑 다르잖아.”

“어머. 너 아주 옛날에는 인간도 바다에서 살았다는 얘기 모르는구나?”

엄마가 혀를 찬다. 옆집 알리사는 알던데, 하고 덧붙이는 소리에 어린 베로니카는 머리끝까지 폭 덮었던 이불을 걷고 슬그머니 되묻는다.

“바다? 정말로?”

“그래. 사실 이 세상 모든 생물이 바다에서 살았어. 다 똑같이 생겼었는데, 자꾸 서로 비교하고 싸우니까 신께서 다양한 모습을 선물로 주셨대.”

“그럼 모든 아이가 선물을 받은 거네? 꼭 신의 탄신일처럼!”

“그래그래. 하지만 감사로 신을 섬긴 생물은 인간뿐이었단다. 그래서 신께서는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선물을 더해 주셨어. 우리가 다른 생물들보다 강한 건 신을 가졌기 때문이야.”

베로니카가 불현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머릿속에 환상에서 들었던 말이 되풀이되었다.

신의 머리. 사라진 신이 숨은 곳.

교황은 20년 전 목 없는 석상을 목격한 자들이 동화자가 된다고 했다. 예언의 시대는 20년 전에 끝났다. 혹자는 신이 그때 죽었다고 했다.

만약 신이, 신상 속에 깃들어 있었다면. 그리고 바하무트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그곳에 있던 사람 중 하나의 몸에 숨어든 거라면.

바하무트가 그토록 찾는 것은 ‘신’이었다.

신을 잡으려는 거다. 인간을 흉내 내면서.

오싹, 갑자기 떠오른 가정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벌떡 일어나 앉아 벌벌 떠는 어깨를 쓸어내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라고 중얼거렸지만 바하무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설명 못 할 직감이 정답이라고 속삭였다.

그들은 신을 찾고 있다. 그리고 이 땅의 인간을 대체하고자 한다.

그때 뎅, 뎅, 뎅 하고 하루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울 해가 일찍 져 버렸기에 방 안은 어두웠다. 아무도 없었다. 리온은 한참 후에나 돌아올 것이다. 깜깜한 사방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종소리가 멎은 순간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벗어나 미친 사람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희미한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 여관을 빠져나갔다. 발길이 닿는 대로 뛰었다.

어디든 좋으니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따뜻한 불빛과 온기가 있는 곳으로!

“슈바르츠발트 양?”

삐거덕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에밋이었다. 상냥한 한나의 환영을 기대하고 있던 베로니카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아, 에밋 씨. 안녕하세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번에도 그렇고 전 항상 이렇게…. 카르트에 아는 사람이 따로 없어서요. 오스카는 어디 사는지 모르고.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오라고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밋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기, 잠시만요. 괜찮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들어오세요. 마침 오스카 씨도 안에 계시니까요. 저녁은 드셨나요?”

뜻밖의 말에 베로니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스카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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