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봐요, 정말 예쁘죠. 이건 펠릭스 오라버니가 생일 선물로 사 주신 사파이어 목걸이에요.”
요한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어린애 주먹만 한 파란 보석을 들어 보였다. 리온은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다 시선을 내렸다. 새파랗게 번득이는 보석은 두 시간째 황녀의 방에 잡혀 있다는 사실처럼 그에게는 무가치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끌려왔다. 응접실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을 여자가 신경 쓰였다. 눈치 빠른 황녀를 의식해 아무 언질도 주지 않고 왔다.
“아, 역시 검을 다루는 기사님껜 지루한 이야기일까요?”
“지루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바다 같은 파란 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울상을 짓는 황녀에게 리온은 건조한 미소를 그려 보이며 대꾸했다. 여러모로 상대하기 번거로운 여자였다.
황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뿐인 딸, 요한나는 어떤 면에선 패악을 부리는 폭군보다 더했다. 그녀가 만약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아들로 태어났다면 형제를 다 죽이고 인재(人災)가 되었으리라. 밤낮 생글생글 웃고 다녀도 속에 칼을 감춘 것이 뻔히 보였다.
그렇기에 그는 황실에서 그녀를 제일 먼저 포섭했다. 요한나는 권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그가 황자들을 만나도록, 뒤이어 황제를 알현하고 다른 고위 귀족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베르크의 성을 달고 이렇게 빠르게 황실의 중심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요? 그럼 목걸이 좀 걸어 줄래요? 우리가 우연히 보석점에서 만났던 날처럼요.”
드레스 자락이 부풀도록 쾌활하게 돌아선 황녀는 금빛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치워 목덜미를 드러냈다. 리온의 서늘한 시선은 그녀가 앞의 전신 거울을 보기 직전 사라졌다. 오늘까지만 비위를 맞추면 된다. 황제가 확실히 동화자의 신변 보호를 공표할 때까지만.
리온은 말없이 받아 든 목걸이를 채웠다. 그러자 황녀가 앞에 있는 거울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어때요?”
“생각한 것보다도 더 잘 어울리십니다.”
짤막하게 말하자 황녀는 뒤를 돌았다. 가슴보다 아래 있는 작달막한 여자가 손을 뻗어 왔다.
“다행이네요. 혹시 안 어울리면 어떡하나 싶었거든요. 난 예쁜 건 다 가져야 하는데. 반짝반짝한 건 전부 다.”
그렇다면 황녀는 누구보다도 붉은 눈의 여자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그 여자보다 반짝이는 존재는 본 일이 없으니.
“까마귀.”
불현듯 리온의 입술이 움직였다. 황녀는 얼굴에 닿기 직전 손을 멈칫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까마귀요?”
“까마귀 같으십니다.”
사실은 여자의 검은 머리를 생각하다 나온 중얼거림이었을 뿐이다. 알아채지 못한 황녀는 재밌는 광대의 농담을 들은 것처럼 까르르 웃었다.
“아하하, 갑자기 그게 무슨, 경은 생각보다 엉뚱한구석이 있네요. 의외예요.”
리온은 상냥한 미소를 흩뿌리는 황녀를 가만히 보다가 웃음이 그치자 물었다.
“계속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왜 제게 하대하지 않으십니까?”
“음, 글쎄요. 일종의 존중 같은 거죠.”
황녀는 불거진 턱선을 쓸어내리다가 마침내 입술에 기름한 손가락을 갖다 댔다.
“저는 마음을 나눌 사내와는 말을 나눌 때도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리온은 내리깐 시선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리고 여자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잡아 떼어 내며 말했다.
“전하, 저는 신께 영혼을 바친 기사입니다.”
“그래요? 제게 딸린 입과 귀가 전하기론 그대가 제사장의 계명을 어겨서 동화자를 살렸다고 하던데요.”
황녀가 관심 갖지 않길 바랐던 단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미묘한 초조함이 치밀었다.
태어나서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쥐었던 인간들은 이렇게나 오만하다. 싸구려 검이나 밤에 안아 주는 아주 작은 다정함에도 세상을 선물 받은 듯 굴던 여자가 떠올라서 속이 뒤틀렸다.
“체액이 뒤섞여야 한다던데. 성인 남녀가 광야에서 단둘이 무얼 했을까요.”
“전하의 귀가 교황청의 작은 소리까지 들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여자를 좋아해요?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던걸요.”
황녀는 제 아랫사람이 속삭여 준 소식을 마치 제 눈으로 직접 본 듯이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무기점 앞에서 느꼈던 시선과 여관 근처까지 따라붙었던 미행이 떠올랐다.
교황의 쥐새끼가 아니라 황녀가 보낸 벌레들이었나.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예쁘장한 편이긴 해도 그 정도 수수하게 생긴 아이들은 거리에도 흔한데. 처음 알게 된 여자라 특별했던가요?”
“외람되오나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무표정하게 황녀를 응시하던 리온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생각하고 계시는 일은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필요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어떤 감정이 있었다면 성하께 바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황녀는 그 일도 이미 알고 있는지 은은한 미소만 띄워 보였다.
한동안 눈을 마주친 채로 침묵이 흘렀다. 슬슬 가 보아야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다행이에요. 그럼 오늘의 알현 장소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도 화는 안 내겠네요.”
다행이라는 말은 황녀의 말버릇이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올 때마다 정반대의 일, 그러니까 불행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리온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순 표정을 굳히자 요한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실은 황제 폐하께서 요즈음 종교에 더욱 신실해지셔서요. 교황청에서 이미 판결이 난 사형수를 사면하는 일은 아무래도 껄끄러우신 모양이에요.”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테오도르 경과 결투를 붙이기로 하셨어요. 그편이 신이 뜻하시는 바를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요.”
테오도르. 그는 황녀의 호위 기사이자 카르트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검기를 다루는 몇 안 되는 실력자였다.
리온은 목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자세 몇 개를 익히고 이제 막 검과 친해지기 시작한 여자가 상대할 급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동화자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일이죠. 제가 교회에서 들은 바로는 신께서 함께하시는 한 막대기와 돌멩이를 든 양치기 소년도 창을 든 거대한 투사를 이길 수 있다더군요.”
그래, 분명 신께서 함께하신다면 그런 기적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여자는 동화자였다. 신은커녕 마귀와 함께했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해 봤자 황녀는 지금 그녀를 잔인하고 요란한 볼거리를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제물로 제공하겠다는 소리였다. 리온은 입꼬리를 비틀어 미소지었다.
한 방 먹었군.
평생 이런 부류의 귀족들을 상대해 왔으면서도 이들이 평민의 생명을 길가의 돌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잊었다.
리온은 차가운 혐오를 억누르며 태연히 입을 뗐다.
“전하. 그 여자는 놓치기 아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벽 밖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물론이죠. 하지만 신의 종이 배척한 자를 받아들이기란 겁나는 일이에요. 그나저나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그렇게 빛나는 눈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불안한가요?”
황녀는 여실히 그를 놀리고 있었다. 리온은 협상가인 황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가늠했다. 그녀는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
“뭘 원하십니까?”
빙빙 도는 귀족식 화법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리온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녀는 갸웃거렸다.
“뭘 원하냐니요? 꼭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조건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이만 물러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황녀는 아까보다 더욱 밝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이런, 물러나는 게 아니라 날 에스코트해야죠. 같이 가요.”
그 후에 어떤 길을 거쳐서 야외 테라스까지 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리온은 걸음이 빨라지지 않는 데 집중했다. 황녀가 그의 다급함을 알아채서는 안 되었다. 이건 그런 식의 놀이였다.
“다들 알다시피 지금 뜰에 앉은 여자는 바하무트에게 동화되고도 살아남은 이교도다. 바하무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바하무트의 힘을 빌려 쓴다. 짐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찾아왔으나 짐 또한 신의 충실한 아들이니 함부로 교황청에 반기를 들고 괴물을 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테라스에 도착해 황녀의 뒤에 섰을 때 여자는 빈 뜰의 중앙에 고개를 조아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사하다는 안심도 잠깐이었다.
“하나 자비로운 신께서는 살인자에게도 두 번의 기회를 준다고 하셨다. 예언의 시대도 지나갔으니 신의 뜻을 알 길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성한 결투뿐이다. 황실 기사와 싸워 이긴다면 동화자를 모두의 앞에서 받아들이겠다.”
여자의 무결한 눈과 시선이 뒤얽혔다. 들어가서 당장 끌어내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그때 황녀가 부채 아래로 나직이 속삭였다.
“내게 충성 맹세를 바쳐요. 도와줄 테니까.”
목소리는 시끄러운 장내의 소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갔지만 일부는 리온의 귀에 분명히 박혔다.
잠시 경직된 사이 나팔이 울고 결투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르는 검으로 여자를 가지고 놀았다. 마치 사냥감을 일부러 놔주었다가 다시 잡는 맹수와도 같았다. 끝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좋아. 저러다가 죽겠어요.”
끝은 정해져 있고, 중간의 선택만이 자유롭다.
“신념을 아예 버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알다시피 황실 기사단에는 신의 기사였던 자들도 많이 있답니다.”
챙!
마침내 여자의 검이 반토막 나 텅그렁 바닥을 굴렀다. 진짜 사 주는 거냐고 의심스럽게 올려다보고 홀로 검을 쓸어 보던 여자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복잡하던 생각이 새까맣게 지워졌다. 리온이 입을 열었다.
“맹세를 할 테니 결투를 중지시켜 주십시오.”
“…진심인가요?”
“여자가 죽으면 진심이 아니게 될 겁니다.”
황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세간에서 칭송하는 천사 같은 미소인데도 리온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우람한 기사의 목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