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4)화 (44/128)

베로니카는 화려한 응접실에서 홀로 긴 시간을 보냈다. 금방 올 것 같던 리온은 베로니카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옆 의자에 풀어 둔 검집은 따사로운 햇살을 품고 새까만 윤기를 흘렸다. 동백꽃 가지가 하얗게 빛난 순간, 베로니카는 아셀도르프에서 그토록 떠올리고자 했던 꽃말을 바람처럼 기억해 냈다.

“…기다림, 애타는 사랑.”

소리 내어 내뱉은 독백에 허탈하게 웃음이 나왔다. 겨울을 이기고 피는 꽃이라 강한 꽃말을 지녔을 줄 알았더니.

“하나도 안 강하잖아.”

오히려 약해빠졌다. 기다림에는 힘이 없다. 심지어 붉은 꽃잎은 탐스러운 금색 꽃술을 꾸며주기 위해 존재한다.

불현듯 꿀처럼 화사한 금발을 가진 황녀가 다시 떠올랐다. 요한나 황녀는 여자가 귀한 카이젠미어 황가의 고명딸이었다. 온실 속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자랐을 황녀가 리온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둘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일까. 아무리 골몰해도 리온의 과거를 함께하지 않은 이상 알 길이 없었다. 왠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폐하께서 나아오라 명하셨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시커먼 생각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 시종이 응접실 문을 열고 말했다. 베로니카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일어섰다. 걸음마다 리온도 있으리란 사실을 되새기지 않았더라면 홀로 걸을 용기는 나지 않았을 거다.

“여기가 알현실인가요?”

걸음을 멈춘 베로니카가 물었다.

안내된 곳은 상상한 장소와는 많이 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높은 계단을 오르자 카르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궁전의 널따란 야외 테라스가 나왔다. 햇살을 가리는 천막 아래 왕과 귀족들이 앉아 있고 테이블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병사가 쉰 명쯤 도열할 수 있는 너비의 빈 뜰을 보며 베로니카는 시종을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주로 기사들이 시합을 벌이는 황실 결투장입니다.”

결투장이라고? 왜?

물어볼 틈은 없었다. 황제 옆에 서 있던 시종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도착을 알리자 황제가 한 손을 올렸다. 잔잔하게 흐르던 말소리가 잦아들며 온 시선이 모였다. 베로니카는 어쩔 수 없이 리온에게 배운 예절대로 빈 뜰의 중앙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카이젠미어를 다스리고 수호하시는 동부의 군주, 떠오르는 태양을 뵙습니다.”

시선이 송곳처럼 와 박혔다. 무대에 익숙한 그녀를 긴장하게 한 건 시선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호기심과 경시였다.

“그래, 네 얘기는 많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라.”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늙고 뚱뚱한 남자가 가까이서 눈에 들어왔다.

저 자가 황제라고?

그래도 교황은 위엄이라도 있었지, 검버섯이 가득한 노쇠한 황제에게는….

그때 비어 있던 자리로 뒤늦게 요한나 황녀가 들어와 앉는 바람에 생각이 끊어졌다.

그녀와 동행한 리온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의자 뒤에 섰다. 눈이 마주치고 시선이 뒤얽혔다.

“큼, 다들 알다시피 지금 뜰에 앉은 여자는 바하무트에게 동화되고도 살아남은 이교도다. 바하무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바하무트의 힘을 빌려 쓴다. 짐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찾아왔으나 짐 또한 신의 충직한 아들이니 함부로 교황청에 반기를 들고 괴물을 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제가 말을 이어 갈수록 베로니카는 등줄기에 스멀스멀 끼치는 불길한 소름을 느꼈다.

“하나 자비로운 신께서는 살인자에게도 두 번의 기회를 준다고 하셨다. 예언의 시대가 지나간 이상 신의 뜻을 알 길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성한 결투뿐이다.”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베로니카는 거칠게 뛰는 심장의 비명을 들었다.

“그리하여 나, 레오폴트 1세가 선포하노니 동화자가 황실 기사와 싸워 이긴다면 모두의 앞에서 그녀를 받아들이겠노라.”

뭐라고?

베로니카는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편에서 곰처럼 우람한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뜰에 들어섰다.

이게 뭐야? 단순히 황제와 귀족들에게 겁을 주는 시간이 아니었어?

겁먹은 시선은 재빨리 리온을 찾았다. 싸늘한 무표정이 된 그에게선 아무 의미도 읽을 수 없었다. 설마, 속인 건가? 뭐 하러? 왜?

이제 필요 없어져서?

“투구를 쓰고 일어나라.”

우직한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철 갑옷에 금빛 세공이 눈부신 기사는 오만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서 매무새를 다듬자 그가 예법에 맞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인사했고 곧 결투를 알리는 나팔이 울었다.

그 잠깐 새에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될 리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혼란스러웠다. 리온에게 배운 것은 검을 휘두르는 자세 정도고,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애쓴 대기의 안정도 자유자재로 다루기엔 역부족이었다. 누군가와, 그것도 훈련된 기사와 검을 맞부딪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기사가 철퇴처럼 투박하고 거대한 검을 위협적으로 뽑아 들자 베로니카는 즉시 물러서며 발검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수군수군. 귀로 파고드는 술렁임이 사라지고 검을 높이 치켜드는 기사만 보였다. 베로니카는 머리 위로 내려오는 번득임을 쳐다보다가 반사적으로 막아냈다. 챙!

팔이 찌릿하고 울렸다. 너무 무거웠다!

아무래도 상대 기사는 높으신 분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생각인 듯했다. 그는 일부러 시간을 끌며 눈만 있어도 받아 낼 공격을 이어 갔다. 캉, 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꼭 검이 아프다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싸디싼 대량 생산용 검이 기사의 철검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 대단했다.

이마로 땀이 흐르고 동공은 한계까지 부풀었다. 실은 처음부터 끝이 정해진 싸움이었다. 끝은, 끝은.

힘겹게 버티던 검이 반토막 나며 베로니카는 그 충격으로 뒤로 넘어졌다. 투구가 비참하게 바닥에 굴렀다.

비참. 비참하다. 그것만큼 지금의 심리를 잘 대변할 말이 또 있을까. 발가벗고 군중 속에 들어간 기분이다.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어머니가 광야에 갔던 것? 안전한 카르트가 아니라 베이른에 살던 것?

그것도 아니면, 리온 베르크의 눈에 띈 것?

눈부신 태양을 등진 기사가 목덜미에 칼을 들이댔다.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고 철제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을 쥐었다. 공기가 일렁였다고 느끼자마자 철퇴 같던 대검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서 떨어졌다.

“무슨 짓을!”

기사의 눈이 커지더니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맨손이 된 남자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메클렌부르크로 변했다. 시커먼 얼굴에 빛나는 안광. 목을 졸라 오는. 압살하듯 짓누른다.

베로니카는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완전한 공황에 빠져 사고가 불가능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머리에 산소가 모자랐다. 환청이 들렸다.

“기억해 둬. 아무리 덩치 큰 거인도 머리가 반토막 난 채 돌아다니진 못해.”

그 순간 팍, 기사의 투구 안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목을 조르는 힘이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제 위에 있던 남자의 빈 투구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피와 살점이었던 것이 형체 모를 죽으로 뒤섞여 그녀의 볼과 이마에 투득, 툭 떨어져 내렸다.

“아… 아아….”

죽었다.

쿵 소리가 나며 베로니카의 위로 목이 날아간 남자의 몸이 쓰러졌다. 깔려서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여자들의 비명 소리는 선명했다. 주위에 소란이 인 것을 공기의 떨림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입을 벌린 채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매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누군가가 시체를 치워 주며 몸을 앉혀 세웠다.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리온, 나….”

“빌어먹을, 네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아?”

말은 짙은 경멸에 의해 맥없이 끊겼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또렷해지는 시야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워진 리온의 얼굴이 담겼다.

“테오도르는 황녀의 기사야. 넌 황제가 가장 아끼고 신임하던 자를 죽였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탓하는 어조가 아닌가. 왜? 뭘 잘못했는데?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남은 게 문제인가?

느닷없이 뺨을 맞았을 때처럼 눈물이 핑글 고였다.

서러움이 치밀었다. 그녀는 방금 죽을 뻔했다. 방금도, 검은 복도에서도. 몇 번이나. 당신 때문에.

“하지만 당신이 분명 깊은 인상을 주라고.”

“사람을 죽이라고 한 적은 없어. 널 쳐다보는 눈빛들을 봐.”

짓씹든 내뱉는 말에 드디어 리온 외의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채를 펼치고 수군거리는 부인들과 질려서 물러난 귀족들.

아, 저 눈빛을 안다. 아주 징그러운 벌레가 나타났을 때 짓는 경멸의 표정이다. 귀신을 보는 듯한 공포도 깃들어 있다.

한창 밤을 괴롭히던 아셀도르프의 악몽은 예지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꿈. 평생 그토록 원하던 시선. 시선. 시선인데도.

새까만 얼굴에 눈만 둥둥 떠서 보인다.

콱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먹은 것을 게워 낼 듯했다. 리온은 그런 그녀를 반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말씀드린 바하무트의 힘입니다. 이들이 부리는 대기는 때로는 단련한 기사들도 이겨 내기 어려워합니다.”

리온이 황제에게 말했다.

“파견대를 보내든 방어를 대비하든 뭔가 수를 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카르트는 봄과 함께 찾아온 바하무트에게 무참히 짓밟히게 될 겁니다.”

“그럴듯한 말이에요. 예언의 시대가 끝났는데 과거의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청명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리온의 주장을 두둔했다. 요한나 황녀였다.

“아아, 무엇보다 저기 하늘을 봐요. 신의 전령인 매가 결투를 지켜보았군요. 우리 모두 신께서 자비의 눈을 어느 쪽을 향해 뜨시는지 보았어요.”

사람들은 하늘을 빙빙 돌고 있는 맹금을 올려다보고 크게 술렁였다. 매는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신성한 동물이다. 이렇게 된 이상 시뻘게진 얼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던 황제도 시치미를 뗄 수는 없었다.

“요한나 황녀의 말이 현명하구나. 결투의 결과가 뜻밖이다만 짐은 물론 동화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동화자는 이 시점 이후로 황실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이는 교황청의 뜻에 반하는 일이 아니라 국민들을 보호하고 신의 뜻을 존중하는 처사이니라.”

황제가 마지못해 선언하자 도움을 준 황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리온은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황녀의 언행은 베로니카를 향한 안쓰러움 때문이 절대로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그들이 사라진 동안 무엇을 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리온의 차갑게 다그치던 말투도 떠올렸다. 왜인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굴욕적인 기분이 들었다.

난, 대체 꾸역꾸역 살아남아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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