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3)화 (43/128)

“밤별아!”

여자는 아주 오랜만에 만난 군마의 머리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가 그녀의 열 배는 훌쩍 넘을 텐데 겁도 안 나는 모양이다. 말도 그녀를 기억하는지 눈만 끔뻑이며 유순하게 굴었다.

“꼭 타고 가야 돼요? 갑옷도 익숙해질 겸 걷고 싶은데.”

말에게 당근을 먹이던 여자가 슬그머니 물었다. 말 위에 앉기 미안한 눈치였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웠으므로 결국 황궁까지 걷기로 했다.

리온은 들뜬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카르트에 들어온 이후 제대로 시내를 둘러본 적이 없다. 카이젠미어의 모든 부와 풍요가 집약된 도시니 아무리 고향이 대도시였다고 한들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깐 보고 가도 돼요?”

그녀의 걸음이 멎은 곳은 의외로 무기점이었다. 귀찮은 허락 대신 금화 주머니를 넘기자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생글 웃었다.

“주니까 거절은 안 할게요.”

그녀가 작은 무기점을 샅샅이 둘러보는 사이 주변의 기척을 확인했다. 따라오는 자들이 몇 있지만 위험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경계는 늦추지 않는 편이 좋다. 하인즈가 약속한 영역은 벗어난 지 오래고 교황은 마지막까지 영악한 인물이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자 신경은 금세 곤두섰다. 그때였다.

“선물이에요.”

어느새 가게에서 나온 여자가 대뜸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내려다보니 탄비아산 강철로 만든 회색 투구다. 하지만 알아보는 것과는 별개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리온은 의아한 시선을 보내다 감탄처럼 말했다.

“아, 내 돈 주고 산 내 선물?”

“마음은 내 마음을 썼는데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어요. 남는 걸로 산 거라.”

능청이 늘어난 여자가 눈매를 접으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순간 심장이 덜그럭 불쾌하게 뛰었다. 손을 뻗자 강철 투구가 평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분명히, 온도에 문제가 있는 건 강철 쪽이어야 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

리온 베르크는 성기사다.

그가 투구를 받아 드는 순간 베로니카는 절감했다. 사내답게 깎여 나간 얼굴에는 이렇다 할 감상이 들어있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쯤 투구의 생김새를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관을 섞지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

비정상이다.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리온이 보통의 성기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더 자유롭고. 용병처럼 농담하고, 내키는 대로 군다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단지 전장을 많이 떠돈 인간의 생존 법칙에 불과했다. 베이른에 들른 용병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술 한잔이나 따끈한 스튜만으로 금세 즐거워한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기에 현재를 만끽하는 습관을 기른 것이다.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위험하잖아요. 나중엔 나한테 감사하는 날이 오게 될걸요.”

리온이 몇 가지 세세한 율법을 어기고도 평연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하지만 베로니카를 받아들이기란 또 다른 문제였다. 한낱 인간이 정한 교리가 아니라 최초의 제사장이 받았다는 4계명에 적힌 내용이다. ‘생명 창조’로 이어지는 타락적인 결합은 지양해야 한다.

인간이 흉내 낸다 한들 창조는 신의 것. 다른 동물들이야 종의 번식을 위해서라 해도 사제들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본능마저도 신앙을 이길 수는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수련을 받는다고 들었다.

베로니카는 여관의 창문으로 견습 기사의 행렬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칼바람에도 자세를 움츠리지 않고 눈을 정면으로 향한 채 무표정으로 걸었다. 근처에 또래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면 뺨의 근육은 더욱 경직되며 미간은 10대답지 않게 깊이 팬다. 참고 인내하고 무시한다.

리온이 입을 맞출 때마다 흥분하면서도 그녀를 결코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다. 아무리 방탕한 척해 봤자 그는 그녀와 만난 이래 가장 소중한 신념을 놓친 적이 없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신앙과 신념을 빼앗을 수만 있다면.

“절대로 환불하지 마요. 버린 선물은 평생 아무도 없는 동굴을 헤매게 된다는 말 알죠?”

혹시 돌려줄까 무서워 베로니카는 거리를 벌리면서 생글거렸다.

그가 그녀의 외로움을 알아봤던 것처럼 그녀도 그의 고독을 알고 있다.

우울한 인간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의 냄새를 잘 맡는다.

지금까지 리온의 동요는 딱 두 번. 친모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와 메클렌부르크의 죽음을 들었을 때다.

파고들어야 할 틈이 어디인가는 자명하다. 아낌없이 주는 무한한 애정이다. 어리광 부릴 데 없이 자란 소년은 작은 애정에도 쉽게 파괴되기 때문이다.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리온은 투구를 든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기다리듯 멈춰 섰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눈이 발아래서 보드득 소리를 냈다.

***

리온이 신분을 밝히자 검고 높다란 철창살이 양옆으로 열렸다. 베로니카는 한겨울에도 관목이 잘 가꾸어져 눈의 왕국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정원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사실 으리으리한 대성당에 그 대단한 교황까지 만났으니 더는 놀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멀리서만 보던 황금색 궁전이 완연히 보이자 기가 죽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황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정확한 거리는 몰라도 둘 다 커다랗다 보니 어느 쪽에서든 상대 건축물이 훤히 보였다) 궁전은 민들레처럼 온통 금빛이었다. 성의 주인이 부를 드러내고 싶어서 혈안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동안 긴장으로 입 안의 침이 말랐다. 배 속에서 나비가 춤을 추는 듯했다. 유랑 극단의 원숭이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베로니카는 집시들이 찾아올 때마다 동전을 꼭 쥐고 찾아가서 희귀한 새나 토끼를 입을 벌리고 보던 어린 시절을 반성했다. 주는 대로 받는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리온의 말로는 마침 오늘 협의회가 모이는 날이라 카르트 안의 귀족들이 다 그녀를 보러 올 거라고 했다. 오늘의 희귀 동물은 베로니카인 셈이었다.

“저거 정말로 다 순금일까요?”

긴장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베로니카가 마차에서 내려서 내뱉은 첫마디였다. 마차에서 내리도록 손을 잡아 준 리온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렇다던데. 밤마다 조각을 떼어 가는 도둑들 때문에 매년 새로 금을 녹여서 채운다고 하지.”

“진짜요?”

하긴, 천년 제국의 궁전이니 사치스럽게 황금 기둥을 세웠는지도….

“진짜겠어?”

어이가 없어져서 올려다보자 리온이 픽 웃었다. 그제야 그가 그녀의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도금이겠지. 일단 높이가 저 정도인데 황금의 무게가 감당될 리가 없잖아.”

“도금이면 떼어 가기 더 좋은 거 아니에요?”

리온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 베로니카는 그가 벽을 자세히 살펴보려는 줄 알았다. 그때 의전관의 묵직한 외침이 귀를 사로잡았다.

“카이젠미어 황가의 요한나 3세, 황금 바다의 딸 요한나 황녀 전하 납십니다.”

어지러운 말 가운데 ‘황녀’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황실 기사를 거느린 젊은 여자가 환한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베로니카는 그렇게 화려한 드레스며 눈부신 장신구는 처음 보았다. 여자는 온통 반짝반짝해서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때 바로 옆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경고했다.

“고개를 숙여. 황녀와 눈도 마주치지 마.”

리온의 조언에 따라 서둘러 바닥을 보았다. 그사이 요한나 황녀는 살랑거리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베르크 경, 고개를 들어요. 우리 사이에 그렇게 살갑지 못하게 굴 건가요?”

요한나 황녀가 매끄러운 흰 장갑에 감싸인 손을 친근하게 내밀자 리온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한 발자국 나아갔다. 그리고….

흘끔거리던 베로니카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허리를 굽힌 리온은 요한나 황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올바른 예의는 아닌지 금색 망토를 두른 기사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외람되오나 이 자는 신의 기사입니다.”

“이제는 아니지요. 베르크 경은 카르트의 영웅이시자 위대한 카이젠미어를 섬기는 국민인걸요.”

황녀는 해맑게 웃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굳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당당함과 아름다운 자신감. 베로니카가 한평생 흉내 내던 매력이다. 선천적으로만 가질 수 있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여자에게서 햇살처럼 흘러나와 스며들었다.

그때 시선을 느꼈는지 황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 정말 눈 색이…. 그럼 이쪽이 그 소문의 ‘바하무트’군요. 인두겁을 뒤집어썼다는.”

황녀의 목소리는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웠지만 그 내용은 송곳니처럼 날카로웠다. 베로니카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사이 리온이 대신 입을 열었다.

“굳이 신경 쓰실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동화자는 카이젠미어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텐데. 어리석게 이단 숭배에 빠진 결말은 이토록 참혹하군요. 그래도 뒤늦게 회개하고자 한다니 기특한 일이에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거리는 그대로인데 마치 그들과 베로니카 사이에 유리 막이 놓인 것 같다.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

그들은 베로니카가 알지 못하는 귀족들에 대해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리온은 자주 미소를 지었고 내리깐 눈을 황녀에게만 박아 두었다.

아마 그의 눈에도 보이리라. 요한나 황녀에게서 피어나는 저 찬란한 봄꽃의 향기가.

뭐지, 이건.

싫다. 이런 기분.

베로니카는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끼어선 안 되는 곳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실은 경에게 잠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내게 시간을 내줄 수 있나요?”

“귀중한 시간을 베푸신다면 제게 있어 영광입니다.”

한참 흘려보내던 말에 귀가 트인 것은 리온이 황녀를 따라갈 기미를 보였을 때였다. 베로니카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자신은? 혼자 알현실에 가야 한단 말인가?

“폐하께서 중요 안건의 논의를 끝내시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지. 그동안 ‘저것’이 응접실에만 있게끔 가져다 놓으렴.”

베로니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황녀는 시녀에게 안내를 지시했다.

여자라고 무시당한 적은 있었어도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물건 취급당한 적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충격받은 시선을 리온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는 베로니카를 흘긋 일별했을 뿐 금방 가겠다는 허울뿐인 말조차 하지 않았다.

무심하게 떨어지는 눈길은 황녀를 향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굳이 웃으려는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럴 가치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이젠 고개를 내리는 것도 잊고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실로 동여매 조이는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갑옷 때문에 어젯밤부터 들떴던 자신이 우스웠다.

뭐가 자신만 알아보는 빈틈이란 말인가. 그런 건 진짜 사랑받은 사람들 앞에선 비참하게 빛이 바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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