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2)화 (42/128)

“…안 돼, 안 돼. 벤자민!”

리온이 감았던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고 창밖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눈 그림자가 침대 위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렸다. 깼는지 여자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악몽이야?”

한동안 안 꾸는 것 같더니. 흘끗 옆을 돌아보자 일렁이는 붉은 눈과 마주쳤다. 그것이 일반 적안과 다른 점은 어둠 속에서 섬뜩할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사실이다. 여자는 눈만 깜빡일 뿐 대답이 없었다. 리온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안아 줘?”

“…날 싫어하면서 왜요?”

“싫어하진 않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옆으로 누운 여자는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뗐다.

“베이른 꿈을 꿨어요.”

여자가 악몽을 얘기하는 건 처음이다. 리온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이마에 팔을 얹었다.

“고향이 아니라 사람 꿈일 텐데.”

“…어떻게 알았어요?”

“툭하면 자다가 벤자민, 벤자민 하고 흐느끼는데 모를 리가 있나.”

태연히 이름을 꺼내자 여자의 작은 호흡이 잠시 멎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아주 귀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고백했다.

“벤자민은 베이른에서 날 구해 줬던 친구예요. 당신이 오기 전에요.”

“그 난장판에서 친구를 구한다니 눈물 나게 감동적이군.”

“먹혔어요. 내가 밀었거든요.”

흔하디흔한 소재가 순식간에 흥미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다시 흘끗 고개를 틀자 달빛을 역광으로 둔 여자의 얼굴에서 붉은 눈만 선명했다. 휘어진 두 눈은 어둠 속에서 우는 듯이 웃었다.

“구해 줬으니까 베이른을 나가서 같이 살아 가자는 거예요. 뭐랬지, 결혼하쟀나? 내 아버지가 머리를 뜯어 먹히는 동안 자기가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은혜도 모른다는 식으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댔어요.”

기억을 떠올리는지 여자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어지러워서 밀었는데 바하무트의 손이 뒤통수를 꿰뚫어서 끌고 갔어요. 죽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 사납게 굴었던 거군.”

“그래서 끝까지 밀어내지는 못했고요.”

리온이 구원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을 때, 벤자민이 생각나서 싫었을 거다. 하지만 벤자민이 생각나서 반항을 이어 가지도 못했다. 그녀가 밀어냈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광야에서 루에가인을 죽이면서 주저함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무력하게 침잠해 있었다.

“벤자민은 평소에는 정말 괜찮은 애였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대장간을 구경시켜 주고. 몰래 맛있는 잼도 여러 병 나눠 주고.”

“글쎄, 사내놈들이 여자한테 정도 이상으로 잘해 주는 이유가 착해서는 아니라고 보는데.”

“그럼 뭔데요?”

“같이 눕고 싶단 뜻이지. 그거 외엔 없어.”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잖아요.”

리온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동공을 빤히 보다가 몸을 일으켜 부싯돌을 당겼다. 대답이 없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무기를 사 주고 악몽을 꿀 때마다 안아 주고. 당신도 나한테 정도 이상으로 잘해 줬지만 같이 눕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잖아요.”

“예외의 경우였지, 우린.”

짧게 대답한 리온은 아셀도르프에서 샀던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고 침대 옆의 덧창을 열었다. 찬 바람에 머리칼이 사납게 나부꼈다. 시원하게 들이쉬었다 내뱉자 회색 연기가 흩어졌다.

티란에 머물 때는 이 남부의 이파리를 꽤 좋아했었다. 태우고 나면 속에 있던 더러운 내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라.

“미안하다고는 안 해요?”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으면 하겠지만. 의미 없는 사과가 그렇게 듣고 싶어?”

“네.”

“미안해.”

“…….”

침묵하는 여자를 보고 리온이 픽 웃었다.

“그러게 그런 건 뭐 하러 시켜. 기분만 더러워지게.”

“어머니 얘기는 진짜였어요?”

여자가 불쑥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생모의 이야기도 했던가. 광야에서 정신이 나갔을 때의 일이다.

리온은 눈 때문에 흐려진 별을 보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아니.”

“말도 안 돼.”

“네가 날 더 좋아하도록 지어낸 이야기야. 인간은 닮은 면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여자는 뭐라고 반박할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서슴없이 파헤쳐 끝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계속 그랬다.

“너 애정 결핍이잖아.”

다가오지 마. 더는.

리온은 차갑게 내뱉곤 비스듬히 웃었다.

멈칫 굳어 버린 여자의 얼굴이 칼을 맞은 듯 파리해졌다. 보름달이 핏기가 가신 낯을 어스름히 비추었다.

“그래서 너보다 불쌍한 얘기 들으면서 기뻐했잖아. 그걸 연민이라고 부르든 동정이라고 우기든 네 마음이지만. 그때 네 눈은 대다수의 인간이 불행을 봤을 때 보내는 시선과 같았어. ‘나는 저렇게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다.’”

누구에게나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이 있다.

여자의 핏빛 눈동자가 흔들리자 대기가 따라서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리온은 재밌다는 듯 웃다가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들자 담배를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 두고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언제나처럼 탁하고 흐릿한 숨을 나눴다.

“아, 그리고 네 친구는 죽었어. 기왕 악몽을 꿀 거면 차라리 내 꿈을 꿔.”

입술을 떼어 내고 속삭이자 여자가 뚫어지게 눈을 마주쳐 왔다. 미묘한 기류가 전류처럼 혈관을 흘렀다. 가끔은 돌아 버릴 것 같다.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내고 혀가 죄를 지으면 혀를 잘라 내야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온 마음이 죄를 지으면 무슨 수로 회개해야 하나. 온몸이 여자를 원하면.

“왜 숨기고 싶었는지 알겠어요. 당신은 속부터 완전히 비틀렸어.”

여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리온은 고개를 기울인 채 씩 웃어 보이곤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었다. 제게 맞춰서 만들어진 것처럼 여자는 품에 꼭 들어맞았다. 으스러져라 안으면 신기루처럼 녹아 사라질 신체는 살냄새조차 여리고 부드러웠다.

“되게 늦게도 알아채네.”

하얀 침대 위에는 눈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그녀를 안은 그의 등 뒤에도 자국이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맞닿아 뛰는 심장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리온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독이라도 탈 거면 술에다 넣어. 모르고 마실 수 있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녀는 대답 대신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몸을 웅크렸다. 가느다란 호흡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사실 그들이 지금까지 나눈 것이야말로 숨이 아니라 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일 리가 없으니.

창밖에는 가루처럼 작디작은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겨울 과일을 나눠 먹던 어느 쓸쓸한 날처럼, 하루가 쌓인다.

***

“네 친구는 죽었어. 기왕 악몽을 꿀 거면 차라리 내 꿈을 꿔.”

리온 베르크는 나쁘게 다정했다. 언제든지 그랬다. 괴롭히는 척하면서 위해 준다. 사람 헷갈리게.

베로니카는 그런 그를 좋아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처 줬다 한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죽었을 때 유일하게 곁에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불꽃. 아프게 데이고 나면 손을 떼야 하는데 매혹적인 불은 더 세게 움켜쥐고 싶게 만들었다. 마침내 손을 뻗어 꿈속의 불꽃을 만진 순간, 잠기운이 달아나 천천히 눈을 떴다.

찢어질 듯 세게 움켜쥐고 있는 검은색 옷자락이 가장 먼저 보였다. 세상이 남색으로 덧칠된 이른 새벽이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었다. 지척에 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눈은 잠기운 하나 없이 명료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안 잤어요?”

“잤어.”

그가 짧게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옷에서 떼어 냈다. 그녀가 붙잡고 있어서 못 일어난 모양이었다. 바로 놓아 주려던 리온이 문득 그녀의 손바닥을 살피고는 물었다.

“손이 왜 이래?”

“아…. 긴장하면 꽉 쥐는 버릇이 생겨서요.”

대충 변명하자 리온은 손톱이 낸 상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젯밤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이 사람은 자기가 아침에 유독 유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러고 있으니 아프게 상처 준 일은 사라지고 다시 같이 광야를 가로지를 때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의 팔은 사람을 어리광 부리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칭얼대면 어른처럼 안아 줄 것만 같은.

“아직 어두운데 벌써 나가요?”

“겨울에 해 뜰 때 일어나는 게으름뱅이는 못 돼서.”

손바닥의 상처가 별거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리온은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로니카는 멀뚱히 누워서 그가 씻고 나갈 채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침대에서 벗어난 건 그가 나가기 직전이었다. 쭈뼛쭈뼛 문까지 다가가자 리온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왜?”

“그냥, 잘 다녀오라고 말하려고요.”

“아까 거기서 말해도 됐을 텐데.”

“배웅이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아, 배웅.”

그렇게 중얼거린 리온이 특이한 것을 마주하듯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베로니카는 그제야 그들 사이에 이런 인사는 굉장히 어색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러니까 꼭 가족이 된 것 같지 않은가.

“다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부부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베로니카는 잠자코 기다리는 리온과 시선을 마주쳤다. 다음 말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흘러나왔다.

“오늘은 일찍 오면 안 돼요? 어제도 내내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는데.”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내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

겨울이 흐르는 동안 리온은 사병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보고, 설득하고, 병사들에게 바하무트를 상대하는 법을 훈련 시켰다. 베로니카가 기록한 환상을 황제에게 바치고 전서조가 가져온 소식과 비교하게 했다. 각국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바깥 소식을 아는 고위 계층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는 때로는 남부에 있는, 때로는 서부에 있는 바하무트의 눈으로 세상을 봤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얼굴 있는’ 바하무트는 다시 블라센 산맥 깊숙이 숨어들었다고 했다. 마치 동물의 동면과도 닮아 보인다고.

최북단의 화이트랜드만 해도 국경 지역을 빼면 안전한 유일한 나라였다. 아무도 막지 못한 바하무트를 겨울이 막아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2년 내내 따뜻한 남부에 있다가 올라왔으니 바하무트가 유독 혹독한 이번 겨울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 생긴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리온은 여자가 황제를 알현할 날짜도 잡았다. 카르트의 온 귀족이 ‘살아 있는’ 동화자를 보기 위해 모일 것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지루한 겨울의 흥미진진한 볼거리인 셈이었다.

귀먹은 돼지처럼 앉은 자들에게 같은 경고를 되풀이하다 돌아오면 여자는 아직 깨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항상 그가 씻기까지 기다렸다가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것은 기이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하루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관계없이, 여자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방이 텅 비어 있어 곧장 검을 뽑아 들다가 복도에서 여자와 마주쳤다.

“아, 연습하다가 원래 있던 방 창문을 깨뜨려서요. 임의로 방을 옮겼어요.”

그녀가 머쓱하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시퍼런 검날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만 익힐 수 있으면 가구 정도는 부숴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멋대로 방을 나가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엔 진짜로 힘을 다루는 요령을 얻은걸요.”

그 말은 허세가 아니다. 그녀는 바하무트의 대기를 원하는 때 쓸 수 있게 되었다. 자유자재로 부리는 정도는 아니어도 원하는 때 한 번만이라도 쓸 수 있다면 황제에게 감명을 주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검을 빼 든 이유가 진실로 여자가 방을 빠져나간 것에 화나서였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습격을 가정하고 여자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었던가? 알 수 없었다. 리온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검을 휘두르는 자세를 봐줬다. 여자는 베고 썰고 찌르는 모든 동작을 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게걸스럽게 습득했다. 몰두할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밟는 모든 발자국은 정확히 어린 시절의 그가 거쳐 간 지점과 같았다.

“이게 뭐예요?”

마침내 황제를 알현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설마 입궁할 때 그 꼴로 갈 줄 알았어?”

여자는 은색 갑옷을 눈앞에 두고 황망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입을 줄 모르는 것 같아 도와주자 얼굴을 붉혔다. 이럴 때 여자는 잘 익은 여름의 복숭아를 닮았다.

“오스카도 여유로워 보이던데. 기사단의 봉급이 괜찮은가 봐요.”

“원래 결혼만 안 해도 살기 편해.”

심드렁히 대답하자 여자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망토와 투구까지 하나하나 보다가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

마침 교회의 종탑이 우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잠시 창밖을 향했던 시선을 돌리자 여자가 다시 말했다.

“고마워요. 이렇게 큰 선물은 처음 받아 봐요.”

지는 노을 탓인지 여자는 온통 붉다. 눈도, 뺨도, 귀와 목덜미도.

인생의 어느 찰나는 이유 없이 특별하다. 만개한 별의 은하수나 젖은 바닥의 낙엽같이. 머리에 각인된 이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온도와 습도까지 피부에 아로새긴다.

구름 한 조각 없는 새빨간 하늘이 어둡게 물들었다. 리온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이 얼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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