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1)화 (41/128)

“하루 종일 잤는걸요.”

리온은 그녀가 좀 더 쭈뼛대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몸짓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날의 일을 싹 잊어버린 듯이 다가와 양피지를 내밀었다.

“빼곡히 채우고도 시간이 남았어요. 심심하고 답답해서 그러는데 베르크 경한테 제 검을 돌려 달라고 전해 줄 수 있어요? 그거라도 있으면 좀 시간이 잘 갈 것 같아서요.”

그녀가 빼곡히 채운 양피지를 들고 와 내밀며 말했다. 리온은 기록을 받아들며 흘끗 말간 안색을 살폈다. 성력 덕분인지 안색은 한결 나아 보였다. 그러나 붉은 눈과의 대비는 여전히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바하무트가 주는 위화감.

그 순간, 리온은 그녀의 새로운 쓸모를 생각해 냈다.

“왜 그렇게 봐요?”

“검을 아직도 배우고 싶어?”

“당연하죠.”

“왜?”

“그야….”

입을 열었던 여자가 멍하니 있다가 불쑥 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합격이에요?”

리온은 표정이 사라진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도 그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감정을 감추고 눈치를 살핀다. 똑똑한 선택이다. 갈기갈기 찢긴 상처를 남에게 보여 줘 봤자 낫기는커녕 더 크게 벌어지기나 할 뿐이다.

“뭐라고 말하든 합격이야.”

리온은 받아 든 양피지를 한편에 내려놓으며 무심히 말했다.

“뭐든 휘두르는 편이 황제의 관심을 끌기 좋겠지.”

황제라는 말에 여자가 눈을 의심스레 치떴다. 그러나 그때 마침 1층에서 따뜻한 목욕물이 올라왔으므로 대화는 잠깐 끊어졌다.

도시 내에 겨울 강이 있는 카르트는 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찬물은 언제든 쓸 수 있고 뜨거운 물도 값을 지불하면 금세 데워다 준다.

리온은 문득 여자 몫을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목욕물도. 식사도.

이 늦은 시각까지 온종일 굶은 셈이다.

“저녁을 한 사람분 더해서 올려.”

리온이 목욕물을 가지고 온 점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이 나가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황제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교황청에서 나온 이상 네 신변을 보호해 줄 세력은 황실 정도야. 안 그래도 바하무트의 무서움을 모르는 인간들이니 네가 강하면 강할수록 효과가 좋겠지. 그게 검이든, 일반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는 이상한 바람이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날 다시 팔아 치우려고 한다는 얘기군요.”

방어구를 벗던 손이 정지했다. 시선을 내리자 여자가 흔들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주먹은 꽉 쥐어져 있고 기다란 속눈썹은 나비처럼 팔랑였다. 어제부터 눈만 마주쳐도 맞기라도 할 사람처럼 군다. 리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무서워하는 주제에.

“너라고 지금도 내 옆에 남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남고 싶어요.”

주저 없는 대답에 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자는 한층 작게 덧붙였다.

“당신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거든요.”

“…….”

“아주 많이 좋아해서. 당신 자신을 잃을 정도로.”

광야의 신상 앞에서 리온이 했던 말과 동일했다. 그녀는 뒤이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이었다.

“자유롭게 떠나더라도 그 후에 떠날 거예요. 그럼 당신도 내가 본 설원의 풍경을 볼 수 있겠죠.”

자유롭게 떠난다라, 가만히 듣던 리온은 그 부분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어마어마한 낙관성이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도 제가 살아 있으리란 믿음을 보인다니.

한 바하무트를 죽이면 그것에 연결된 아래 개체들도 죽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리온이었다. 티란에서, 연구를 위해 생포한 바하무트들 중 하나가 탈출해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다. 유독 힘이 센 개체였는데 그것을 베자 철창에 묶여 있던 다른 것들도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리온은 죽은 개체가 전날 분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믿을 만한 기사들을 시켜 생포에 매진했다. 전선을 유지하기도 급급한 마당에 무리한 짓이었다. 그러다 임무 도중 그를 따르던 기사 하나가 바하무트에게 동화되었다. 개국 가문 출신이 아니라서 귀족인데도 성력이 없는 자였다. 명백히 리온의 책임이었고, 그래서 섣불리 판단했다.

바하무트를 죽여서 동화를 끝내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바하무트의 눈에 검을 찔러넣자마자 기사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사백안으로 커다랗게 뜨이던 눈. 무릎을 털썩 꿇으며 뻗던 손.

쓰러진 시체의 잔상은 이내 눈앞의 여자로 바뀌었다. 어떤 의미에선 확실히 ‘자유롭게 떠나게’ 될 것이다.

“그거 기대되네. 여러모로.”

“기대되면 이상한 데 팔아넘기지 마요.”

“팔아넘기는 게 아냐. 황제에게 경고차 널 보여 주고 싶을 뿐이지.”

사람들은 미지의 힘에 겁먹기 마련이다. 그녀를 황궁 안에 두고 싶어 할 리 없다.

“그것도 싫어?”

리온이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싫으면 이대로 교황청에 끌려가든가.”

여자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잿더미가 된 고향을 떠났을 때처럼,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럼 내 검을 먼저 구해다 줘요. 광야에서 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약속도 지키고요.”

“휘둘렀을 때 황제에게 위압적인 인상을 줄 자신은 있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상한 힘을 말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당신이 없는 사이에 조금은 익숙해져서….”

거기까지 말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검은 복도가 생각났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유쾌한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형편 좋은 방에 머물렀는지 기억하는 리온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거 다행이군. 네가 연습해야 할 건 원할 때 적당량의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야. 가구 한두 개 정도는 부숴도 상관없지만 이 방을 나가선 안 돼.”

리온은 일부러 많은 귀족과 황제 앞에서 그녀의 존재를 언급했다. 그러니 대놓고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교황의 쥐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나마 현재는 하인즈 폰 크라우스, 기사단에 남은 사람 중 리온과 유일하게 연이 닿는 기사가 사병을 고용해 도와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선 안 됐다. 하인즈가 약속한 건 이 여관 주변만이다.

“저녁 식사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점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으므로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리온은 그릇을 탁자에 두고 씻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서로 얼굴 맞대기도 불편해졌으니 식사할 시간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욕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식어 버린 수프와 파이를 앞에 두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던 리온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음식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또 단식 투쟁이라도 하려고?”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같이 먹으려고 기다린 거예요. 그동안 늘 그랬으니까.”

농담하나 싶어 쳐다봤지만 말간 얼굴은 진지해 보였다. 리온은 헛웃음을 흘리다가 수건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식사를 시작했다. 리온은 와인으로 입을 축이며 여자를 관찰했다. 종일 굶은 사람치곤 파이를 잡는 손도 오물거리는 입도 느리기 짝이 없었다.

한동안 공기 중에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원래 이랬던가. 리온은 새삼스럽게 카르트에 들어오기 전의 날들을 돌이켜 보았다.

여자는 항상 말하고 있었다.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베이른 항구에 사람 없이 들어오는 유령선이라든가, 낮 두 시쯤에 뛰어들던 새파란 바다. 그것을 그림으로 담아 내던 어느 방랑 화가. 완전히 젖은 채 검은 바위에 올라앉으면 닿을 듯 가까워 보였던 수평선.

두서없는 이야기는 어디든지 향했다. 말하지 않을 때는 뱃노래를 흥얼거렸다.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라고, 그런데 옆집 할머니는 그녀가 그런 노래를 부르는 걸 싫어했다고 했다.

“뱃사람은 다 남자니까 걱정하셨던 거겠죠. 뭐라고 했지. 어리광 부릴 데 없는 계집애들은 사내놈들이 조금만 잘해 줘도 금방 마음을 줘 버린다고 했었나.”

“왜요?”

시선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리온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여기 적힌 내용, 평소에 네가 보던 환상이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탁자 한편에 놓인 양피지를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실제로 달랐어요. 더 또렷하고, 보고 나서 심장이 뛰지도 않고. 이건 점점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다른 바하무트의 눈으로 본 건 처음이라 신기했어요.”

“마지막에 아셀도르프 이야긴 뭐지? 뭘 찾고 있는 것 같았다고?”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뭔지는 나도 잘 몰라요.”

여자는 뭔가 더 말할 듯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어 버렸다. 리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하무트에게 목적의식이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 단언할 만큼 그들의 행동 방식을 알지도 못해.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이유가 있겠지.”

“그러고 보니까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을 늘 믿네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잠자코 기다리자 여자가 덧붙였다.

“메클렌부르크 경의 죽음도, 오스카는 믿지 않고 있을걸요. 눈을 보면 알아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 가서 전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믿는 기색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자마자 믿으니까.”

“네게 거짓말할 이유는 없을 텐데.”

여자는 뭔가를 들춰 보기라도 할 듯 가만히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식사가 재개되고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접시를 바깥에 내놓고 각자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침대에 앉아 창문을 보는 동안 그는 무기와 갑옷을 닦았다.

불이 형편없는 벽난로에 장작을 채우고 보니 어느새 여자는 앉은 채 졸고 있었다. 까딱거리는 모양새가 햇살 아래 늘어지게 누운 고양이와 비슷해 보였다. 편하게 눕혀 준 뒤 불을 모조리 껐다. 그 후에 아주 잠깐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잘 것인가, 아니면 옆에 새로 방을 얻을 것인가.

잠이 든 여자의 색색거리는 호흡에 귀를 기울이다 혹시 모를 위험을 생각했다. 푸른 달빛이 흘러내린 얼굴은 평온했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는 못했다. 시선을 미끄러뜨린 끝에 결국 옆자리에 누웠다. 만일 관계에도 형태가 있다면 여자와 자신의 것은 일찍이 비틀리고 일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아마 처음 빚어지던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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