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0)화 (40/128)

이는 신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마귀야,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내 이름은 군단이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 Evangelium secundum Marcum 5:8-9

***

환상은 꿈과는 다르다. 아무 때고 찾아온다. 주로 밤에 보는 것은 단지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환상치곤 지나치게 뚜렷한걸.

저벅. 베로니카는 불티가 날리는 도시를 앞에 두고 생각했다. 도시는 이미 와르르 무너졌다. 발치로는 송장을 노리는 쥐가 지나다닌다. 꼬리가 길고 털이 듬성듬성한 그들은 바하무트와는 좋은 친구 사이다. 하나는 몸, 하나는 머리로 나누어 천적을 갈라 먹으니 흉측한 짐승끼리 사이가 나쁠 리 없다.

끔찍한 식사도 눈에 익었기에 베로니카는 그런 것에는 시선을 두지 않는다. 가장 먼저 느낀 위화감은 바닥에 쌓인 눈이 없다는 사실이다.

눈 대신 깔린 낯선 모래. 부서진 황토색 벽.

베로니카는 이내 제가 어마어마하게 큰 건축물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거대한 피라미드. 다시 말해 이곳은 남쪽의 탄비아다. 하지만 어떻게? 얼굴 있는 바하무트는 얼마 전까지 블라센에, 얼어붙은 산맥에 있었는걸.

주위를 둘러보던 베로니카는 바닥에 널브러진 방패에서 제 모습을 확인한다. 머리가 없는 평범한 바하무트다.

즉 그녀는 지금 자신을 동화시킨 바하무트가 아닌 다른 개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이렇게 전 세계를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걸까?

이래선, 마치 ‘신’ 같잖아.

그렇게 생각한순간 풍경은 삽시간에 변한다. 이번엔 용암이 굳으면서 형성된 울퉁불퉁한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등 뒤로는 시퍼런 파도가 아가리를 벌리고 혀를 날름거린다. 사슬 군도라고도 불리는 동부의 롬 군도임이 틀림없다. 위에서 화살이 쏟아진다. 동부의 전사들은 거친 항쟁 중이다.

뒤이어 눈이 키보다 높이 쌓인 화이트랜드, 풍속이 자유롭고 땅이 기름진 루에가를 본다. 습격하는 바하무트는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부수고 파괴하고 인간을 먹는 것 외에는, 아무 뜻도.

그러다 특이점이 온 것은 폐허가 된 아셀도르프에서다. 도시의 크기에 비해 과하게 많은 수의 바하무트 떼가 도시에 바글거린다. 그들은 명백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베로니카가 머물렀던 여관 앞에서. 닫히던 도개교 앞에서. 절박하게 찾아 헤맨다. 어느 개체가 이곳에서 그들이 찾던 것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뭔데? 나도 알려 줘. 뭘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건데?

알려 주면 같이 찾을 수도 있잖아.

신의 머리. 사라진 신이 숨은 곳.

오싹-.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무언가가 파고든 순간, 베로니카는 숨을 멈추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 누워 있었다. 하얀 베개에 누워 하얀 이불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눈은 부었는지 몹시 땅겼고 창문에서는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놀랍도록 평화로운 아침이다.

“…….”

그래. 괜찮아. 현실이야. 여긴 환상도 아니고 그 검은 복도도 아니야. 이제 괜찮아.

베로니카는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법 넓은 침대에는 그녀 외에 누군가 누웠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그렇게 역겹다는 눈으로 보던 남자가 여기서 밤을 보냈을 리 없다.

어제의 마지막 기억은 눈물 흘리던 자신과 내려다보던 리온의 차가운 얼굴이다. 무서워서 팔을 들어 눈을 가렸었다. 자꾸만 메클렌부르크가 목을 조르던 때가 떠올라서.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그 순간이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때의 메클렌부르크는, 시커먼 얼굴이었다. 눈만 희고 커다랗게 박혀서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팠다. 공포에 질렸다. 그래서 무슨 말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이 났다.

애초에 리온과 잘되리라 생각한 건 아니다. 그의 신념은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뚜렷이 보였고 그녀도 그렇게 감정이 깊었던 건 아니니까.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이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가 묻지 않아도 스스로.

베로니카 슈바르츠발트라고. 당신도 알다시피 그 성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십자가를 진 신의 피를 닦아 주었다는 여인. 그녀처럼 당신의 짐을 나눠 들고 싶다고.

이미 쓸모없어 버려진 줄도 모르고.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베로니카는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옆으로 몸을 틀었다.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걱정하고 기다릴까. 좋아할까.

그것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이른에서 만난 리온까지 사라지면, 정말 혼자가 되어 버리니까. 외로운 망망대해에서 흔들리느니 파도가 아프게 때리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편이 나으니까.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의 환상에 꽃이 순식간에 가맣게 시들어 흩어졌다.

그때 누워 있던 시야에 사이드 테이블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온종일 무력하게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깨끗한 옷과 깃펜, 양피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허락 없인 나가지 말고, 환상은 빠짐없이 기록해라’였던가….

흐리멍덩한 눈이 차츰 또렷해졌다. 그녀는 간밤에 본 기나긴 환상들을 떠올리다가 결국 탁자에 다가가 펜을 들었다.

눈을 비비며 기억나는 대로 더듬더듬 써내려 나갔다. 비단 리온의 요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어제 본 건 바로 적지 않으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너무 많았다. 날아가는 필체가 각국의 상황을 역사가만큼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들은 목소리만은, 왜인지 꺼림칙해서 집어넣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 거다. 신의 머리라니.

“바하무트가 말할 리 없잖아.”

확인하듯 중얼거린 베로니카는 펜을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씻고 싶었다. 고작 20년의 짧은 지혜지만 그녀는 나쁜 기분이 물에 씻겨 나간다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옷을 벗고 피로 너덜너덜해진 붕대를 둘러서 풀었다. 딱지가 떨어지는지 움직일 때마다 아팠다. 자연스럽게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침대에 눌리고 쓸리던 감각. 아프다고 말해도 비켜 주지 않던 남자.

“괴물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양팔을 감싸고 물 없는 욕조 한가운데 누웠다. 꼭 관 같았다.

“진심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을까?”

혼자 물었으니 대답은 어디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정답을 만들어 냈다.

“…괜찮아. 필요 없어서 버렸다면 다시 필요해지면 되는걸.”

간단한 문제다. 주저앉으면 설원에 혼자 남게 된다. 어떻게든 일어나야 한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햇빛이 잘 드는데 왜 아직도 검은 복도에 갇혀 있는 것 같지.

***

“그대가 폐하께 고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소?”

“흠, 근거가 된 여자는 동화자라고 들었소만, 동화자가 어찌 살아 있는 거요?”

“성하께서도 이 일에 대해서 알고 계시다는 건가?”

리온은 온종일 바빴다.

메클렌부르크가 죽었기 때문이다.

성 기사단 단장의 죽음은 단순한 영웅의 실종이 될 수 없다. 신검 헤네시스가 돌아오지 못한 이상 절대로.

신검은 성력을 먹는다. 그 말은 신검을 이용하면 천년이 넘게 성력이 쌓인 카르트의 장벽도 얼마든지 가르고 들어올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바하무트가 인간의 무기를 사용한 전례는 이미 여러 번 관찰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쓰는 방법만 깨우치면 곧잘 따라 했다.

공성전에서 인간의 투석기를 이용한 바하무트나 벽 위에 매달린 포탄을 인간의 군대를 향해 쏜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검이라고 해서 못 쓸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교황은 오스카의 입을 막았을 것이다. 이 일이 알려졌다간 단순히 민심이 술렁이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아마 현재 교황청에서 메클렌부르크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필립과 오스카, 교황까지 세 사람 정도일 거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예언도 마찬가지다.

리온은 날이 밝자마자 황실을 찾았다. 황제에게 아는 전부를 전했다. 정보의 원천을 말하기 위해 동화자에 대해 언급하고 신변 보호도 요청했다. 예상한 대로 파문은 어마어마했다. ‘그’ 메클렌부르크가 죽었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귀족들이 모인 장로회가 소집되고 리온은 여러 번 진술을 반복했다. 남은 모든 명예를 걸었다. 물론 그럼에도 믿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무엇보다 이곳은 카르트였다. 신이 평화를 약속한 땅. 천년 간 지켜진 낙원.

바하무트가 바다에서 올라온 지는 겨우 2년 남짓 되었고 사람들은 피부에 와닿기 전에는 안락한 평화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불안해하던 아셀도르프 사람들조차 끓는 냄비의 개구리처럼 몸을 담그고 있었을 따름이다. 멸망이 코앞까지 왔다고 해도 그들은 코웃음 칠 뿐이다. 오늘이 어제와 같았던 것처럼 내일이 오늘과 같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은 내리막길에 있는데도.

다가올 봄의 건국제나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황족과 귀족들에게 리온의 경고는 잔칫상의 파리와도 같았으리라. 어쩌면 바하무트 하나를 생포해다가 성내에 떨어뜨려 놓는 편이 빠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여관 문을 열었을 때였다. 리온은 늦은 시각인데도 불을 밝히고 있는 침대맡의 촛대를 보고 멈칫했다.

아, 그랬지.

심부름꾼을 시켜 옷이며 양피지를 구해다 놓으라고 말해 두긴 했지만 그 후로 여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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