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9)화 (39/128)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리온의 눈에서 불길이 꺼졌다. 마치 꿈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비 오는 현실에서 함께 눈을 뜬 것 같았다. 찰나의 기적 같은 순간은 지나갔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베로니카는 아픔에 가까운 슬픔을 느꼈다. 리온이 그녀의 뺨을 닦아 주며 픽 웃었다.

“누군지 맞히기 할래?”

쾅쾅, 대답하지 않자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몸집을 키웠다.

“내 생각엔 네 기사님이 아닐까 싶은데.”

문을 흘끗 보던 리온은 그녀를 놓으며 일어나려 했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성이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그의 가면을 벗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해진 지금이 아니면. 메클렌부르크의 소식에 동요한 지금이 아니면.

멈칫해서 빤히 내려다보던 리온은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손으로 그녀를 떼어 냈다. 고작 손이 닿은 것뿐인데 낯선 행위처럼 느껴졌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이 그녀를 완전히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앉아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활짝 열린 손가락이 덜덜 떨리며 살아 있는 생물처럼 경련했다.

“여기 있습니까?”

그사이 문밖에서는 그녀도 아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리온은 서두르지 않고 걸어가 문을 열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는 오스카가 리온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뛰다 온 사람처럼 이마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고 가슴과 어깨도 크게 오르내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역시, 하고 중얼거린 그는 이내 따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리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오스카가 불평했다.

불평, 그래, 그건 화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걱정이다. 그녀가 리온과 나누기 원했던 감정의 교류다.

“죄송해요. 괜한 일에 말려들지도 모르는데 한나 씨한테 사정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어요….”

베로니카는 서둘러 사과했다. 방금의 일 탓인지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오스카는 그제야 목청을 가다듬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살폈다. 눈물 자국이 선연한 얼굴과 불그스름한 목덜미. 부은 입술. 침대 위.

오스카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가져가게? 맡아 준 건 고마운데 다시 가져갈 생각으로 온 거라면 그건 안 되겠는데.”

그때 리온이 문에 등을 기대며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교황청에서부터 따라온 충견들이 주위에 진을 치고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물건 대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먼저 물건 훔치듯 빼간 사람은 누구지?”

리온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팔라딘은 명령에 따른다.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성하께서 아끼던 기사의 타락을 아시면 상심이 크시겠어.”

아픈 데가 찔리자 오스카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가는 방향을 본 리온의 입꼬리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원한다면 뽑아. 그 후를 책임질 자신만 있다면.”

“하지 마요.”

베로니카가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녀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되풀이했다.

“전 괜찮아요. 그냥 가도 돼요.”

호칭은 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오스카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실력은 모른다. 하지만 리온의 검이라면 충분히 봤다.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감옥에서의 일이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제 됐어요. 몰래 내보내 준 걸로 넘치도록 갚았어요.”

“하지만.”

“더는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베로니카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전신에 힘을 주고 선 오스카가 맥이 빠질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그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금 리온은 결코 제정신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눈빛은 불길하게 침잠한 지 오래였다. 잘못 걸리면 피해를 입는다. 오스카는 그녀를, 그가 버린 귀찮은 여자를 굳이 끄집어낸 장본인이니까.

결국 오스카는 한참 만에 검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애초에 그에게는 권리가 없었다. 베로니카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리온 곁에 남기를 선택한다면 그뿐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보던 오스카는 마침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십시오. 그 두 사람에게는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무 바닥이 삐거덕 울었고 잠시 후 그림자도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문이 닫히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리온이 무표정하게 감탄했다.

“눈물겨운 이별이군.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야.”

“…이제 날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고민 중이야. 괜한 오해를 뒤집어쓰긴 싫고. 그렇다고 돌려보내 죽이기엔 쓸모가 아깝고.”

리온이 다가서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침대에 부딪혀 주저앉자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양피지를 구해다 줄 테니 내일부터 보는 모든 것을 기록해.”

“그것만 하면 돼요?”

“아니.”

그가 침대에 앉은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며 웃음기 없이 말했다.

“내 허락 없이는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지 마.”

길게 비쳐 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곧 절망적인 어둠이 내려앉을 시각이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불꽃이 홀로 허덕이는 밤.

입을 열어 대답할 틈은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그가 다시금 입을 맞춰 왔으니까. 침대에 등이 눌리며 고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발버둥 치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을 뿐이다. 짓누르는 압박감과 파고드는 쾌락을 참아 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까와 달리 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적 같은 광야는 이미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닿을 수 없다.

“무서워? 뭘 그렇게 떨어.”

아슬아슬하다, 고 생각했다. 내려다보는 남자의 흉터는 오늘따라 흐르는 눈물처럼 보였다. 무감정한 눈. 그녀에게 수치와 고통만 주고 싶은 눈. 그는 절대로 그녀를 안지는 않을 것이다.

“괴물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차라리 같이 타오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나의 불길이 되어 춤출 수 있다면, 우리는.

***

여자는 계속 울었다. 텅 비다시피 한 몸에서 성력이 줄줄 흘러넘치게 될 때까지.

리온은 오스카가 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성력을 부여받지 못했다면 여자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살아 있으니 뭔가를 나누긴 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몸에 생명력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꺼지고 있는 듯했다. 짜증스러웠다.

양팔을 들어 눈을 가린 여자를 홀로 두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평평한 포석은 발아래서 딱딱한 소리를 냈다.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가족이 기다리는 아늑한 집을 향해 스쳐 지나갔다. 정처 없이 걷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여기저기서 향긋한 국물 냄새와 굴뚝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질퍽해진 까만 눈을 밟던 그는 사거리 중앙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분명 목적지 없이 걸었는데 어느새 교황청으로 올라가는 열쇠 길목 앞에 서 있었다. 22년 전의 환영이, 지금의 그만큼이나 젊은 기사가 분수대 앞에서 선언한다.

“이전의 일들은 잊어라. 네 이름은 오늘부터 리온이다. 리온 베르크.”

고개를 젖히고 새까만 밤하늘을 직시하자 눈송이가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자 차가운 결정이 얼굴에 와 녹았다.

메클렌부르크가 죽었다. 피와 성력으로 모자라 새 이름까지 주었던 인물이. 세간의 명칭으론 ‘아버지’ 라고 불리는 한 명의 사내가.

하지만 그는 결코 리온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한 번도 ‘아버지’였던 적이 없다. 그는 ‘아버지’ 외의 전부였다. 긍지를 지키는 기사이자 대공가의 명예를 갑옷처럼 두른 남자. 뭇 검사들의 목표이자 대적자. 교황과 황제의 징검다리. 아이와 시민들의 자랑. 존경. 경애. 영웅.

“하하, 하하하.”

리온은 웃음을 터뜨리며 분수대에 주저앉았다.

메클렌부르크가 죽었다. 그 대단한 알브레히트 폰 메클렌부르크가.

“당신도 별거 없네.”

이마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자신을 위해 나갔을 거라고?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리온은 메클렌부르크 평생의 오점이었다. 귀족의 혈통이라면 누구나 성력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는 처음에는 리온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큰 성력을, 어느 정도로 신의 축복을 타고났는지 알기 전까지는.

리온을 사랑한 것은 오직 신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알고 있었어요?”

“울어요?”

생각이 뚝, 끊기며 아이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불러왔다. 말라 버린 분수대에 앉아 있던 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곰 인형을 안아 든 여자아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는 줄 알았어요. 맞죠? 울고 있었죠?”

“아니. 안 울었는데.”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손가락에 축축한 환각이 되살아났다. 리온은 태연히 입매를 당겼다.

“나쁜 사람은 울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이 대신 울어 주거든.”

“정말요? 그럼 아저씨 나쁜 사람이에요?”

아이가 놀라서 물었다. 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아이의 이름을 불러서 그럴 틈이 없었다. 리온이 흘긋 그쪽을 바라보자 걱정 반 경계 반의 얼굴을 한 여인이 아이에게 어서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래. 나쁜 사람이니까 빨리 엄마한테 가 봐.”

아이의 동그란 갈색 눈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더럭 겁이 나긴 했는지 서둘러 달려가다 철퍼덕 넘어졌다. 아이는 들으란 듯 시끄럽게 울어 댔다. 엄마가 다가와 안아 줄 때까지. 그러고도 한참을 더.

리온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일어났다. 어떤 눈물을 생각했다. 울지 않는다던 여자가 흘린 눈물이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연민했다. 친부의 죽음에 무감각한 그를 위로했다.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내면 위로 떨어졌다. 툭.

속이 울렁거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언제지. 어디서부터지.

심장이 찢어져 열린 것처럼 무력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환각의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리온은 눈물에 닿았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듯 주먹을 쥐었다. 죽여야 한다. 죽어야 했다. 마음이 고이다 못해 썩어서 마지막엔 영혼을 태우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노아가 아닌 리온이, 신의 사자가 짊어진 숙명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두컴컴해진 거리에 티란에서 죽은 동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의 손에 닿지 못하고 바닥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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