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이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자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도록 알고 지낸 동료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야. 네겐 내 문제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
베로니카는 버려진 아이처럼 문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쓰러질 듯 창백했다. 그녀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대답했다.
“주제넘었다면 미안해요. 돕고 싶었어요. 너무 걱정돼서….”
“왜 네가 그 검은 복도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해?”
리온이 불쑥 질문했다.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분명 보안이 철저해서라고 당신이.”
“그래? 그 말대로라면 교황이나 황제도 그 지하에 박혀 있어야겠군. 네 탈출에는 단 한 명의 기사가 아니라 수만 명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했을 테고.”
“…….”
베로니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리온은 그녀가 사고를 진행할 시간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다.
“널 교황한테 판 사람은 나야.”
그녀의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네가 첫날 했던 생각이 맞아. 카르트에 들어오려면 필요했어. 버리기 좋은 지점이라고도 생각했고.”
“거짓말.”
베로니카는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작아서,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사실이야. 거짓말이면 왜 진작에 찾아가지 않았지? 카르트에 귀환한 지도 이틀이 지났어. 오늘 아침에는 황실에 찾아갈 정도로 여유로웠지.”
“하지만 오스카를 통해 날 탈출시켰잖아요.”
“내가?”
리온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기사 하나의 단독행동에 불과해. 너 대신 죽을 창창한 미래가 안타까워 입을 다물어 주긴 했지만.”
“…그럼 기다리라는 말은 왜 했어요? 다음엔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광야에서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길 바란다고 했으면서. 그래서 나는….”
흐려지는 말끝은 상처받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칼에 찔린 사람 같았다. 찔리고 베이는데도 고집껏 서 있다. 리온은 난도질로 손가락 사이 사이에 흐르는 피를 인지했다. 피곤하다. 끝낼 시간이다.
“그래야 다루기 편할 테니까. 기껏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하루쯤 더 다정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뎅, 뎅, 뎅, 때마침 먼 종탑에서 여섯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하에서 열두 시간마다 울리던 종과는 다른 것인데도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창문으론 파드득거리며 새들이 날아갔다. 작은 그림자가 평화롭게 그녀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다. 창밖으로 하얀 깃털이 떨어져 흩날리자 비슷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치 불안해하던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리온이 찾아왔던 날 같다. 가지 말라는 말에 옆에 앉아 있던 그때. 내려다보는 눈과 휘어지는 입꼬리.
“알고 있었어요?”
화살처럼 주고받던 공방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적막에 잡아먹힌 방 안에서 베로니카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멍울지듯 차올랐다. 리온은 미간을 좁히고 나지막이 불렀다.
“이리 와.”
베로니카는 망설이다가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그녀가 말랐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원래도 작은 체구였지만 지금은 가냘프기까지 했다. 리온은 그녀를 죽 훑어 내려 눈밭을 걷느라 발개진 맨발을 바라봤다. 거슬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바로 앞까지 온 가느다란 팔을 홱 잡아당긴 충동은 거기서 왔을 것이다. 베로니카는 그에게로 무너져내렸다.
“방금 그런 말을 듣고도 잘만 와서 안기는데.”
리온이 낮게 속삭였다.
“어디 모자란 새끼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잖아.”
그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그녀가 아무리 동화되었어도 내부의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심장이 부서진 고장 난 인형 같았다. 눈을 치켜뜨지도 반항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순수하게 그를 좋아했고, 동시에 무서워했다.
폭력을, 자신보다 힘이 센 인간의 손길을. 이상하게도 그 무력함이 리온을 더 자극시켰다. 리온은 흑단 같은 머릿결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을 맞췄다.
“처음부터 경고했어. 그것의 소재지를 알 수만 있다면 나는 더한 짓도 할 수 있다고. 팔다리를 자르든 묶어서 끌고 다니든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그만…. 아파요. 놔 줘요.”
“싫은데.”
리온이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런 걸 원해서 왔잖아, 너?”
고개를 숙였다. 땅거미를 등지고 더 뜨거운 해와 맞닿았다. 따뜻하고 말캉한 살덩이와 뒤섞이자 며칠간 잊기 위해 애쓰던 감각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사람을 미치게 만들던.
빌어먹을.
등을 꽉 끌어안자 여자가 아픈 사람처럼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주먹 쥔 손으로 어깨를 밀어내고 밭은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잠시 떨어졌던 입술은 금세 다시 뒤얽혔다. 리온은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머리칼 속으로 밀어 넣은 손에 힘을 주자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애초에 그녀에겐 그를 밀어낼 힘도 의지도 부족했다. 질척한 소리가 들리며 입술 사이로 야릇한 신음이 샜다. 숨이 턱 끝까지 찼을 때 내는 살기 위한 호흡이 흥분을 실어 날랐다.
여자는 감시로 붙은 기사에게도 이렇게 매달렸을 것이다. 목에 팔을 감고 간절하고 절박하게. ‘이름’을 부르면서. 이름도.
“혼자서 걸어갈 수 있어요. 저 사람들이 나를 얕볼까 봐 그래요, 노아?”
언젠가 들었던 여자의 말소리가 귓가에 녹아들었다. 뒤이어 젊은 메클렌부르크의 차가운 음성도 이어졌다.
“이전의 일들은 잊어라. 네 이름은 오늘부터….”
행위가 거칠어졌다. 리온은 작은 얼굴을 단단히 잡았다. 깊이 탐닉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눅진한 쾌락에 빠져 헤엄쳤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타락한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신이 아닌 여자의 눈물이었다.
눈물. 뜨겁고 축축한 슬픔이 손가락에 느껴지자 리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여자는 울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소리도 없이. 붉은 눈은 물기가 서리자 더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들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지는 해의 주황빛이 머리칼을 서글프게 물들였다. 더, 조금만 더.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녀가 상처 입은 소년을 발견했다. 심연에 빠진 영혼에 손을 뻗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은밀한 고요를 깨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닿았을지도 모른다.
***
“어떡하면 좋아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깜빡 잠들었는데 기분이 싸해서 일어나보니까….”
오스카는 달리고 있었다. 헉헉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발을 동동 구르던 한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리에 메아리쳤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예요. 신발도 그대로 있는걸요.”
강이 어는 온도였다. 쌓인 눈은 그녀를 기억하겠지만 거리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뒤엉켜 어지러웠다. 신발도 외투도 챙기지 않은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추측할 계제가 없었다.
만에 하나 얼굴을 아는 교황청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제길. 아니다. 어쩌면 애초에 데려간 사람이 교황청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만한 키에 검은 단발을 한 여자 못 보셨습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의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여자는 오늘 한 다섯쯤 보았다고 우스갯소리로 대답하는 무리도 있었다.
잡화점 가게 주인에게 같은 대답을 받고 나가려던 때였다.
“친구들은 찾아가 봤소?”
“예?”
<평화의 주간>이라고 적힌 신문을 보던 잡화점 주인이 심드렁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을 뒤지고 다닐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을 찾아가야지. 이 날씨에 무턱대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소?”
오스카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맞는 말이었다.
왜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가. 카르트에 지인이 있을 리도 없고. 베로니카가 찾아갈 사람은 처음부터 단 한 명뿐이었다.
리온 베르크.
그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잡화점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나온 오스카는 거침없이 거리를 가로질렀다. 다리는 자연스럽게 리온이 머무는 여관을 향했다. 한번 떠올리고 나니 가정은 확신으로 변했다.
오스카는 그 밤을 기억했다. 리온이 떠나기 전날 밤, 잠시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일이 길어질 것 같으니 먼저 가보라던 말.
그날 명령에 따르던 오스카는 속으로 리온을 경멸했다. 몇 날 며칠을 여자와 단둘이 광야를 넘었다고 했다. 그가 그녀와 같이 밤을 보내고 금기를 어겼을 것은 자명했다.
‘베르크’라는 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만일 여자가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행동했다. 리온이나 오스카는 베르크의 성을 지닌 아이 중에서는 손꼽히게 잘 풀린 편이었다.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은근한 무시를 견디고 살았다. 당장 직공의 도제가 된다 해도 경쟁에서 뒤로 밀렸다.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이는 불길하기 때문이다.
물론 리온은 제명당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선택할 리는 만무했다. 그는 이미 한번 베로니카를 버렸다. 보러 와달라는 말에도 무관심했다.
이를 까득 깨문 오스카는 여관 점원에게 은화를 던져 준 뒤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랐다. 쿵쿵, 전해 들은 호수의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요동치는 심장 소리와도 흡사했다. 초조했다. 오스카는 불안이 양심 때문이라 단정 지었다. 아니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