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7)화 (37/128)

“황실? 바로 새로 모실 주인을 찾은 겁니까?”

필립이 경멸을 담아 되물었다. 리온은 미소만 지었다.

카르트의 세력은 교황청 하나가 아니다. 황제는 독립 국가였던 카르트를 집어삼킨 뒤 수도를 이 땅으로 옮겨 왔다. 최대한 많은 병사를 동원해야 하는 리온의 입장에서 황실 군대는 탐나는 대상이었다.

메클렌부르크가 있었더라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리온의 명성도 황족의 흥미를 끄는 데 아직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밤새도록 젊은 황자들을 설득하고 아침에는 늙은 황제를 알현했다. 황족들은 리온이 하는 말을 전부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황실에 맹세한 기사들을 소집해 주긴 했다.

아침부터 투견처럼 검을 겨뤘다. 황제는 리온이 자신의 개보다 강한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메클렌부르크가 이 꼴을 보았다면 그를 교회의 수치로 여겼겠지만 어차피 리온에겐 잃을 명예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 단장의 귀환만 기다리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황실의 이름은 이렇게 귀찮은 상황을 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필립은 일부러 황실을 입에 올린 리온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그리고 시선을 리온에게 고정한 채로 낮게 명령을 내렸다.

“집행관을 두 번째 끝방으로 데려가라. 사형수를 앞에 두고도 놓친 얼간이에게 목 잘린 신상 형을 내린다.”

리온은 우람하고 험상궂은 집행관의 얼굴에 둔한 공포가 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각 맞춘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들어와 고함지르는 집행관을 방 밖으로 몰고 나갔다.

마치 가축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리온은 동정도, 그렇다고 인과응보에 대한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피곤함 외에는 아무 감흥도 그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여자의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가슴을 울렁이는 감정도 있기는 했지만.

단지 검은 강일 뿐이다. 흔들리는 심연. 물에 덮여 보이지 않는 빛.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교황청의 눈이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의 과오로 밝혀질 경우엔 신검을 바쳐야 할 겁니다.”

필립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경고하곤 흰 망토를 길게 펄럭이며 방을 나가 버렸다.

신검은 주인을 택하는 검이다. 그러니 이것은 리온을 죽이겠다는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리온은 똑같이 험악한 표정을 짓는 대신 무감한 얼굴로 걸음을 떼어 냈다.

그의 눈길은 오직 복도 끝에서, 오스카 베르크를 마주쳤을 때만 잠시 머물렀다. 그것은 지극히 찰나라, 리온을 주시하는 수십 쌍의 눈은 물론 오스카 그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자는 무사하다. 살아 있다. 그걸로 됐다. 누구에게 매달려 누구와 입을 맞추든, 누구의 품에서 구원을 애걸하든 알 바는 아니다. 환상이 다시 필요해질 때나 오스카를 찾으면 된다.

처음부터 거슬리는 여자였다. 이런 식으로 처리되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성은 그렇게 정리해 냈다.

그리고 여관에 돌아가 제 방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맨발의 여자를 본 순간 그는 그 모두를 잊어버렸다.

***

저벅, 걸음 소리가 멈췄다. 베로니카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낯선 회색 갑옷을 지나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 기쁨이란 그간 겪은 고통만큼이나 컸다. 여기까지 와서도 만나지 못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베로니카는 한나가 낮잠에 빠진 사이 집을 몰래 빠져나왔다. 혹시 작은 소리가 잠을 깨울까 염려되어 신발이나 겉옷도 찾지 못한 채.

다행히 거리의 사람들은 소문의 여관을 알려 줄 만큼 친절했고, 여관 주인은 일행이라는 말에 감히 말을 얹지 못할 만큼 리온을 무서워했다. 모든 일이 기적처럼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색하며 벌떡 일어난 다음 순간에는 그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리온의 무표정한 얼굴에 떠오른 빛이 지극히 낯설어서. 그건.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흘끗 뒤편의 계단을 확인한 리온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강하게 당겨 안았다. 베로니카는 등과 어깨를 감싸는 거친 손속에 신음했다. 상처는 붕대를 갈 때마다 피를 낼 정도로 지독했고 몸은 전에 비할 데 없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소리가 새자 리온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열쇠를 꽂아 넣어 방문을 열었다. 베로니카는 밀리듯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아파요.”

“그거 다행이군. 적어도 감각은 정상이라는 뜻이니까.”

등 뒤로 문이 쿵 닫히자마자 리온이 손을 떼어 내며 낮게 뇌까렸다. 그는 안은 손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속삭임이 통할 정도로 밀착한 거리에 서야 했다.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줄은 몰랐는데. 네 발로 직접 걸어서 나간 거 아니었어? 한낱 쥐새끼도 지하로 기어들고 나면 하루는 머리 박고 숨는 법을 알아.”

“괜찮아요. 거리도 잘 살피면서 왔고, 여긴 어차피 다른 기사들도 없으니까.”

“귀찮게 하네, 진짜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온은 언성을 높이지도 빈정거리지도 않았다.

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더니 시선을 내렸다.

“목이 말라? 그럼 순진한 기사라도 잡아먹어. 그러라고 붙여 줬잖아.”

뺨을 붙드는 손은 건틀릿을 껴서 차가웠다. 그의 눈빛만큼이나.

베로니카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거예요. 내가 본 환상이 필요하잖아요.”

그것은 기죽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건넨 말이기도 했다. 베로니카는 단 며칠 만에 바뀌어 버린 남자의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초조한 입술은 가치만 증명하면 리온이 다시 미소 지어 주리라 생각했다. 다정하게 대해 주기를. 다시 필요하다 말해 주기를.

그래서 베로니카는 성급히 내뱉었다.

“당신 아버지가 죽었어요.”

두고두고 후회할 말실수였다.

작은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공기가 차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마침내 리온이 입을 열었다.

“…뭐?”

그런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쥔 악력에 베로니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리온의 길고 잘생긴 입매가 서서히 비틀렸다.

“누가 죽었다고?”

목덜미가 쭈뼛 곤두섰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그는 자유의 날개를 떼어 내던 때처럼 잔혹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아버지. 아, 베로니카는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기사단장을 만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아직까지 베로니카의 추측에 불과했다. 섣부른 말을 해명해야 했다.

“그게,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동안, 기사단장님을 만났어요. 읏, 그리고… 누가 말해 준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을 보고 당신을 닮았다고 생각해서.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에요. 난 그냥,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당장 쫓아낼 것 같아서.”

“메클렌부르크가 죽는 걸 봤어?”

리온은 길게 이어지려는 말을 잘라 내며 물었다. 베로니카는 붙잡힌 얼굴을 끄덕이려 애썼다. 한동안 숨 막히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리온의 눈에 사나운 파문이 일었다. 그는 뭐라고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불안하게 살펴도 점차 표정이 사라지는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까마득한 심연이다. 그 강에 빠진 소년을 구해 낼 수는 없다. 베로니카는 급하다고 아무 말이나 뱉은 스스로를 원망했다.

마침내 리온은 말없이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곤 방 안쪽으로 걸어가 검을 풀어 놓으며 말했다.

“내가 떠난 이후의 일부터 하나씩 설명해. 있었던 일 전부.”

그가 갑옷의 잠금쇠를 하나씩 풀어낼 때마다 기다란 망토가 발아래로 떨어지고 흉갑이 벗겨졌다. 베로니카는 문간에 멍하니 서서 리온이 방어구를 하나씩 내려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망망대해에 떨어진 듯 막막했다.

“있었던 일을… 전부 다요?”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목을 조르던 메클렌부르크의 모습이었다. 목이 졸리던 순간이 생각나자 오른손이 저절로 꽉 오므라들었다. 베로니카가 살에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어진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자 리온이 흘긋 시선을 돌렸다. 베로니카는 손을 서둘러 등 뒤로 숨기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떠나고 며칠 안 돼서 교황 성하와 기사단장님이 찾아왔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동화자가 되는지 말씀해 주셨어요.”

“20년 전에 목 잘린 신상을 본 인간들이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리온은 그녀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재촉했다. 베로니카는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왜 바하무트가 동화자를 만드는지 궁금하다고. 멀쩡히 살아서 대화할 수 있는 상태의 동화자는 처음 본다고 하셨어요. 그 뒤엔 기사단장님이 다가와서 제게서 성력을 앗아 가셨고, 정신을 잃었어요. 그런데 듣기론 그때 제가 예언을 했다고 해요.”

리온이 행동을 멈추고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베로니카는 말을 이었다.

“작은 검을 빼앗기고 카르트는 무너지리라. 많은 사람이 신의 외면 아래 죽어 가리라. 예언의 시대는 20년 전에 끝났지만, 그래도 그건 분명 예언이었다고, 기사단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리온은 잠시 침묵하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예언 때문에 직접 블라센에 뛰어든 거군.”

“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한 예언이 그분을 사지로 몰았고… 심지어 당신을 구하러 가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어요.”

환상 속에서 바하무트가 메클렌부르크 쪽으로 향하길 바랐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어쩌면 그녀의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때 리온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베로니카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긴소매 튜닉 차림이 된 리온은 피곤한 눈가를 가린 채 느릿느릿 읊조렸다.

“그래서 네 말을 들은 메클렌부르크가 날 구하러 블라센에 왔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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