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6)화 (36/128)

출신을 말한 뒤엔 조금 긴장했다. 이 여자는 베이른의 상황을 알까?

“베이른이면, 세상에. 그럼 바다를 보면서 자란 거네요? 정말 부러워요. 저는 바다를 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쾌활한 대답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바깥의 일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베로니카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옛날엔 그 바다를 건너서 롬 군도로 건너가는 꿈도 꿨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순백의 성기사를 그리며 카르트를 꿈꿀 때 저는 야만족 남자들의 벌거벗은 상체를 그리곤 했죠. 어머니가 기겁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니까요.”

여자는 참새처럼 말이 빠른 데다 무척 사교성이 좋았다. 움츠린 경직도 잠시, 베로니카는 반짝거리는 기세에 금세 빨려들었다.

따뜻했다. 햇살도, 분위기도. 현실감이 너무 없다. 베로니카가 멍하니 보자 여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박수를 짝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너무 늦었죠. 저는 한나라고 해요. 어제 제 옆에 서 있던 수줍은 남자는 에밋이고요.”

“베로니카예요.”

짧게 소개한 베로니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덧붙여 물었다.

“베르크 경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아, 오스카 씨요? 그분은 저희 생명의 은인이에요.”

한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뜨개질감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에밋의 은인이지만, 에밋이 없으면 저도 살 수 없으니 제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그이가 마차 사고를 당해 아래 깔렸을 때 모르는 척하지 않았던 유일한 분이거든요.”

친구 사이라기엔 서먹해 보였던 존칭, 부부의 무조건적인 환영이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그분이야말로 기사다운 기사죠. 평민 출신인데도 흰 사자의 갑옷을 입다니. 저희 부부는 그런 분께 빚을 갚을 수 있어 기뻐하고 있어요. 그러니 편하게 머물러요.”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회가 난 김에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에 머물던 이름을 떠보듯이 입에 올렸다.

“평민 출신 기사는 한 명이 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듣기론 리온 베르크가 카르트에 돌아왔다던데. 혹시 들었어요?”

“아, 물론이죠. 이 거리에서도 티란의 사고와 관련해서는 소문이 꽤 나돌았어요.”

한나는 베로니카가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몹시 기꺼워하며 대답했다. 베로니카는 그녀가 그의 전선 이탈을 말하는 건가 고민했다. 그러나 단순한 이탈 문제라기엔 미심쩍은 표현이 있었다.

“‘사고’라니요?”

“모르세요? 교황청에서 오셨으니 당연히 아실 줄 알았는데.”

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지나가던 새가 들을까 겁난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말로는 소문의 시발점이 교황청의 마구간지기라니까, 진짜일 가능성도 있는 것 같아요. 왜, 그, 리온 베르크가 티란의 전선에서 도망친 날 말이에요. 그날, 사실은 같이 나갔던 600명의 기사도 귀환하지 못했대요.”

베로니카는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출전한 600명의 기사가 다 같이 전선을 떠났단 말인가? 그럼 왜 리온은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까?

“전부 죽은 거죠. 붉은 기사 딱 하나만 빼놓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따스한 햇살이 들이치는 오후인데도 한기가 감돌았다. 손가락에 힘을 풀자 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소문으론 붉은 기사가 미쳐 버려서 동료들을 제 손으로 다 죽인 거래요. 그러곤 무서워지니까 도망간 거죠. 시민들이 사랑하던 기사이니 교황청은 쉬쉬하지만 기사단에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들었어요.”

손이 떨렸다. 머릿속으로는 리온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허공을 보는 눈. 무릎에 걸친 팔. 마주치는 눈은 심연처럼 깊다. 그를 계속 궁금해했었다. 영혼의 어둠을 들여다보길 원했다. 그에게서 저와 같은 외로움의 냄새를 맡아서. 그런데도 강해 보여서.

가면이 단단한 이유는 그 아래에 감춘 실체가 만신창이기 때문인데도.

베로니카는 지금쯤 기사단장의 부고를 들었을 리온을 떠올렸다. 그는 여전히 혼자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슬픔을 잘라 내기 위해 제 살을 깎고 있으리라.

옆에 있어 줘야 한다. 누구라도.

돌이켜 보면 잿더미가 된 고향을 앞에 둔 베로니카도 그의 칼날에 도움받지 않았던가. 무기력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원수조차 도움이 된다.

리온에 대해 생각하느라 이어지는 말은 대부분 놓쳤다. 만나야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겨우 한 문장이 귓가에 박혀 들었다.

“애인이죠?”

베로니카는 놀라서 눈길을 들었다. 한나는 놀리듯 웃고 있었다. 얼굴이 순간 막을 새도 없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렇구나,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사랑이 진실로 죄라면 왜 신께서 인간에게 사랑에 빠지는 마음을 주셨겠어요. 응원할게요. 오스카 씨와는 이름도 맞춘 듯 잘 어울리는걸요.”

아, 바보처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리온에 대해 말하는 것일 리 없는데.

베로니카는 수녀복과 오스카의 부탁이 모종의 상상력을 자극했음을 깨달았다.

수녀와 사랑에 빠진 성기사라, 낭만과 배덕감이 철철 넘치는 조합이긴 했다. 베로니카는 장밋빛으로 물든 얼굴을 보다 손사래 쳤다.

“아니, 오해예요. 베르크 경과는, 아니 오스카 씨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황급히 부정한 베로니카는 베르크 경이라고 했다가 리온이 생각나는 바람에 호칭을 정정했다.

얼굴을 붉히자 한나는 다 안다는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베로니카는 울상을 지었다. ‘발끈하면 더 놀림당하게 된다’는 리온이 알려 준 진리를 되새기며 억지로 식사에 전념했다. 다른 데 열중하는 편이 화제를 돌리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리온을 다시 만나긴 해야 하는데.

엄격하다던 부단장 때문에 그도 그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카르트는 낯선 땅이고 베로니카는 리온을 빼면 이곳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고심할 때였다.

“그나저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바람을 쐬고 싶어도 밖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게 좋겠어요. 이 옆 거리에 바로 그 리온 베르크가 묵고 있거든요.”

“네?”

화들짝 놀라서 큰 소리로 반문했다. 한나의 집게손가락은 햇살이 흘러드는 거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굴려 화분이 있는 창문을 멍하니 쳐다보자 한나는 불안에 떤다고 느꼈는지 안심시키려 들었다.

“아, 그렇다고 또 너무 걱정할 건 없고요. 우리도 여관에 묵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지 일주일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봤으니까. 뭐 아침 일찍 교황청에 가서 밤늦게나 돌아오겠죠. 그러니 괜찮아요.”

리온이 근처에서 지내고 있다. 오스카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그녀를 맡긴 것이다. 눈을 깜빡이던 것도 잠시, 베로니카는 이내 환하게 밝아진 안색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한나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하자 그녀는 놀란 듯 멈칫했다가 이내 마주 웃었다.

“뭘요. 진짜로 고마우면 한 그릇 더 줄 테니까 남기지 않고 먹어요. 이런 사람은 보는 쪽이 더 아슬아슬해서 못 살겠다니까. 아플 때는 더 잘 먹어야 해요.”

식사를 마친 접시를 뺏어가는데도 베로니카는 말리지 않았다. 평소엔 새처럼 먹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왜인지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불에 그려진 선인장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

한편 그 시각, 교황청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아니, 뒤집혔다는 말로는 불충분했다. 위험한 사형수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대화했다는 위병이 이 자가 맞는지 확인하게.”

귀족답게 분노를 차게 갈무리한 필립은 거대한 몸체를 우그리고 선 집행관에게 명령했다.

검은 복도에는 언제든 리온을 제압할 수 있게끔 무장한 기사들이 창날을 세우고 일렬로 늘어 서 있었고, 검은 방에는 필립과 집행관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집행관은 팔짱 끼고 벽에 기대선 리온에게 고개를 수그리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뒤이어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꺼운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오. 다른 냄새. 완전히 다른, 냄새 입니다.”

“이런, 그러게 내가 아니라니까. 비텔스바흐 경은 속고만 사신 모양이야.”

능청스레 지껄인 리온이 집행관에게 씩 웃어 보이자 필립의 얼굴은 한층 싸늘해졌다. 그는 이 일이 리온의 짓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가 차갑게 일갈했다.

“풀어 줘 봤자 어차피 멀리 도망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야 당연하지. 도시를 봉쇄했으니까.”

“봉쇄 건에도 불만이 있습니까?”

그 말에 리온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가라앉은 자색 눈을 마주 보았다. 베이른에서 패배를 겪고 온 상처 입은 보라색 눈동자. 바하무트의 무서움을 체감하고 온 눈이다.

“그럴 리가. 장벽 저편의 상황이야 최근까지 밖에 있었던 사람이 제일 잘 알겠지. 설령 내가 불만을 품는다 해도 바꿀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리온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다만 아쉽다는 생각은 드는군. 카르트에는 내년 겨울까지 버틸 풍요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봉쇄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시기가 문제라는 뜻이었다. 너무 일렀다. 피난민을 받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황제고 교황이고 제 이익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카르트에 없었던 필립도 그 점에는 동의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가 봐도 되나? 아침부터 황실에서 광대 노릇을 했더니 피곤해 죽겠군.”

리온은 벽에 기댔던 등을 떼어 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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