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5)화 (35/128)

“…….”

송곳 같은 침묵이 고막을 찔렀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등의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이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벽의 촛불이 위험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바라봤다. 더 있다간 들킨다. 더 있다간.

“자매들에게는 피를 흘려야만 하는 주간이 있지요.”

오스카 뒤에만 서 있던 베로니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교회에서 월경 중인 여자를 얼마나 불결하게 보는지는 집행관의 반응으로 분명해졌다. 그가 우악스레 코를 움켜쥐며 뒤로 물러난 것이다.

덕분에 나갈 틈이 생기자 오스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의문도 풀리신 듯하니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저희가 부단장님께 보고드릴 테니 집행관님은 평소의 일정을 따르시면 됩니다.”

베로니카는 오스카의 뒤로 종종걸음쳤다. 집행관의 시선이 뒤로 느껴졌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게. 그러나 결코 느리지 않게.

“이쪽입니다.”

복도 중앙의 올라가는 계단을 그냥 지나친 오스카는 복도를 죽 따라 내려가다가 세 번쯤 오른쪽으로 꺾었다.

검은 복도는 베로니카의 생각보다도 훨씬 컸고 미로같이 복잡했다. 창고와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나선형 계단을 통과하면서도 그들은 말 한마디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베로니카는 걷느라 지쳐 말할 기력도 없었다. 그간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부족했다.

마침내 숨 쉴 틈이나마 난 것은 높다란 나선형 계단을 지나 별빛이 보이는 하늘 아래로 나갔을 때였다.

좁은 입구 양옆으로 병사 두 명이 서 있었지만 복장만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했으므로 그때부터 걸음은 다시 느려졌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는 시원했다. 폐가 뻥 뚫릴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그들은 교황청 뒷문으로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각인지 불이 켜진 집은 얼마 없었고 뒷골목은 더없이 한적했다. 오스카는 건물과 건물 사이 길을 한참 걷다가 불이 켜진 작은 가정집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투구를 벗더니 그녀에게 허리춤에 있는 검을 풀어 내밀었다.

“이건….”

푸른 달빛에 검집의 붉은 동백꽃이 드러났다. 오스카는 긍정했다.

“당신 겁니다. 가지고 있으십시오. 제가 아는 사람이 며칠쯤 당신을 돌봐 줄 테지만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검집을 받아 들었다. 그러다 손이 맞닿자 오스카는 어색하게 물러났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었다. 오스카는 그녀의 붉은 눈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이걸로 빚은 다 갚았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확인입니다만, 집행관에게 둘러댄 말이…. 그러니까. 사실이라면,”

“생리하냐고요?”

묻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 직접적으로 되묻자 어둠 속에서도 오스카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부끄러워지는 기분이라면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난처한 상태를 서둘러 없애 주기 위해 덧붙였다.

“안 해요. 이렇게 된 이후로는 죽. 그러니 정결치 못한 여인과 닿았다고 회개할 거 없어요.”

걱정했던 부분이 맞는지 오스카는 땅만 보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바닥을 보다가 회의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른 의미로 회개는 해야 할 테지만….”

“아니요. 오늘은 제가 대신 당신을 변호하는 기도를 올릴게요.”

베로니카는 부르터서 피가 나는 입술로 웃어 보였다.

“잘 말할 테니 걱정 마요. 아, 오늘의 당신은 내가 만난 기사 중 가장 신의 아들다웠다는 말 정도면 될까요?”

밤바람에 베일이 휘날리자 맑은 미소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스카는 추위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말할 듯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그들이 서 있던 작은 가정집의 문이 열렸다. 그리곤 어디선가 본 듯한 단발의 여자가 놀라 소리쳤다.

“어머, 오스카 씨? 왔으면 문을 두드리시지 왜 그냥 서 계셨어요?”

베로니카처럼 짙은 흑발을 지닌 여자는 뒤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도 소리쳐 불렀다.

“역시 고양이가 아니었다니까. 에밋! 오스카 씨야. 빨리 나와 봐.”

베로니카는 쾌활한 여자에게 곧장 관심을 빼앗겼다. 분명히 낯이 익은데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르트에 사는 사람을 자신이 어디서 봤단 말인가.

잠시 후 발 끄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서 절뚝이는 남자가 걸어 나왔다. 단란한 신혼부부처럼 한데 서자 그제야 여자의 부른 배가 보였다. 힘겹게 현관에 다다른 남자는 오스카의 얼굴을 확인하자 늦은 방문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 정말이네! 오스카 씨, 이런 시각에 대체 무슨 일이에요?”

“밤늦게 기별도 없이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도움 구할 데를 찾던 중 언제든 찾아오라 하신 말씀이 기억나서요.”

그때까지 베로니카를 보고 있던 오스카는 긴장한 시선을 돌렸다. 베로니카는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교회 밖의 사람을 대하는 데 어색해 보였다.

“이분에게 이틀 정도만 손님 침실을 내주실 수 있을까 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물론 보상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세 끼 식사와 상처를 갈 붕대 정도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숨 쉴 틈 없이 흘러나온 부탁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확실히 기별 없는 방문이란 예의 없는 것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던 것도 잠시, 부부는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희가 오스카 씨에게 돈을 받을 리가 없잖아요. 추운데 거기 서 있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마침 차를 끓이고 있었는데 잘됐어요.”

상냥한 초대에 오스카의 얼굴에 안심이 번졌다. 그러나 그는 곧 난처한 거절을 해야 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사정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이분을 사람 눈이 닿지 않는 방에서 돌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로니카가 듣기에도 수상한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낯선 여자를 맡아 달라니. 남의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니. 그러나 부부는 묘한 눈으로 수녀복을 입은 베로니카와 오스카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말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나 보군요. 걱정 마세요. 마침 한나가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해했거든요.”

오스카는 이유도 묻지 않는 세심한 부부에게 몇 번이고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베로니카와도 목례를 주고받은 뒤 급하게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깨에 숄을 두른 여자가 현관 계단을 내려와 베로니카에게 말을 걸었다.

“누추하지만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들어오세요. 안색도 창백하고 옷이 너무 얇아 보여요. 몸을 좀 녹이셔야 할 것 같아요.”

누추하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집 안은 흘러나오는 온기만으로도 호화스럽게 느껴졌다. 그 검은 복도에 갇혀 있던 시간이 한 달은 된 것만 같았다. 잘 아는 부류의 사람들, 평범한 시민들의 다정한 태도에 안심한 탓일까. 아니면 탈출하며 몸을 혹사하고 무리한 탓일까. 여자의 손이 팔에 닿는 순간 긴장을 풀리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기우는 세상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눈이 스르르 감기며 귓가에 놀란 외침이 떨어졌다. 베로니카는 줄 끊긴 인형처럼 쓰러지며 걱정했다. 이 선량한 부부에게 해를 끼쳐선 안 되는데.

제게서 흘러나온 기이한 대기가 그들을 해치지 않기만을 빌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부는 무사했다. 피해를 끼쳤다면 이렇게 포근한 침대를 내어 줄 리 없지.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성력이 없이도 살아남고 검은 복도를 탈출할 때는 대기마저 통제했다. 왜 다른 동화자들과는 다른 걸까. 왜 점점 적응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들이치는 햇살과 나무 천장. 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소리였다.

이제 이런 일도 지긋지긋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짓.

고개를 돌리자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에 열중한 여자가 보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흘긋 일별하던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뜨며 털실을 내려놓았다.

“어머,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요? 말을 하지. 물을 줄 테니까 고개를 조금 들어 봐요.”

여자가 머그잔을 들어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밤새 자면서도 계속 목이 마르다고 했어요. 땀도 계속 흘리고. 지금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베로니카는 대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훨씬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몇 시예요?”

“점심이 막 지났어요. 아, 배가 고프죠? 잠깐만 기다려요.”

여자는 활기차게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가서 냄비에 있던 스튜를 담아왔다. 그러곤 커다란 빵 덩이도 잘라서 그 위에 얹었다. 불청객 주제에 여러모로 힘든 시기의 임산부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민망해졌다.

“소시지랑 콩이랑 양파를 넣어서 끓인 스튜예요. 끓인 지 얼마 안 돼서 따뜻해요. 이건 덩이줄기를 갈아서 설탕을 넣은 음료고요. 한번 마셔 봐요.”

“감사합니다.”

몸을 일으켜 침대맡에 기댄 베로니카는 식사를 시작했다. 흘릴까 봐 쟁반을 무릎에 두고 먹는데 자꾸만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입에 맞아요?”

맛을 떠나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나 베로니카는 감사함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특히 이 음료는,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에요. 카르트 음식인가요?”

“아뇨, 이래 봬도 제가 직접 개발한 거랍니다. 다른 데 출신이에요?”

자랑스럽게 말한 여자는 생긋 웃더니 물었다. 베로니카는 주저하다가 시선을 스튜로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네. 베이른에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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