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4)화 (34/128)

오스카가 예를 갖추며 필립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필립은 마지막으로 리온을 보고, 안 그래도 멀끔한 흰색 정복을 한차례 다듬고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내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에는 리온과 오스카만이 남았다. 정물화처럼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오스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르크 경.”

창밖만 보던 리온의 눈이 움직였다. 오스카는 부고 편지를 쓰는 사람처럼 단어를 고르다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슈바르츠발트 양이 경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슈바르츠발트?”

“예. 환상에 대해 직접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다리던 오스카는 의아함에 흘끔 눈을 들었다. 베로니카 슈바르츠발트. 이름이 틀렸나. 분명히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었다. 그런데 리온은 마치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접한 반응이었다. 이윽고 무표정하던 리온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기도 했고….

“슈바르츠발트.”

리온은 음미하듯 되뇌었다.

“그렇군.”

그는 오스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자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건 누군가 그녀에게 성력을 베풀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리온은 그자가 누군지 쉽게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떠날 때보다 훨씬 인간다운 얼굴을 한 오스카를 앞에 둔 이상.

“굳이 직접 찾아가야 할 필요는 못 느끼겠는데. 무슨 내용이지?”

“성하께서 제 입을 닫으셨으니 저에게는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 내가 알아선 안 되는 문제겠군.”

“단장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건방진 말을 한마디 올리도록 허락하신다면….”

“허락 안 해.”

리온이 짧게 말을 끊자 오스카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리온은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말을 이었다.

“기사단에 속하지도 않은 외부인에게 기밀을 발설하겠다는 건가?”

교단에서 제명된 리온의 신분은 사실상 평민 용병에 불과했다. 막말로 무사히 돌아온 파견대가 그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귀족 살해 방조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교황이 통제하려는 정보에 굳이 손 뻗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의 위치를 말하는 환상이 아니라면 흥미 없어. 블라센 산맥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이라도 한다던가?”

오스카는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리온은 전투 도중에 올려다봤던 절벽 위의 바하무트를 기억했다. 여자는 그때 자신을 본 것이다. ‘그것’이 어디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관심이 없었다.

리온은 단지 메클렌부르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단장도 블라센에 발을 들인 이상 사태의 심각성은 알았을 거고, 대공가의 입김이라면 황제의 군대까지도 동원할 수 있을지 몰랐다.

끝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다른 데 신경이 팔릴 틈이 없다.

“깨자마자 경을 찾았습니다.”

리온이 등을 돌린 순간이었다. 오스카가 주어 없는 문장을 뱉었다.

“누가 같이 자자고 했어요? 그냥 옆에 있어 달라고요. 오늘만요.”

“그건, 그러니까. 이대로 여기 버려두고 가진 말라는 말이었는데.”

“오늘 옆에 있어 준다고 하면 돌려줄게요.”

심장이 불쾌하게 조여들었다. 공기 대신 칼 조각을 삼킨 듯 폐부가 통증을 호소했다. 가장 어이없는 건, 기이한 소유욕이 치민다는 사실이었다. 다 놀았다고 버려 놓고. 다른 이가 제 인형에 손을 대자 화를 내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

“목이라도 말랐던 모양이지. 더 신경 써 주지 그래.”

나직이 내뱉은 리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잘라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평생 해 온 짓이었다. 피가 섞인 가족도 버렸는데 하물며 잠깐 온기를 나눈 여자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에서 죽이고 나면, 동요 없는 평정이 찾아올 것이다. 그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

검은 방에는 저녁 식사와 몸을 씻길 수녀가 왔다 갔다. 그러나 리온은 밤이 깊도록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구석에 웅크린 채 아이처럼 색색거렸다. 돌바닥이면 차가워야 마땅하건만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듯 뜨거웠다. 아파서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덫에 발이 빠졌다. 벗어날 수 없었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말라 버린 혀를 움직여 말을 토해 냈다. 목소리가 귀에 들어가자 뇌가 잠시간 기능했다. 기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잿더미가 된 고향. 양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았던 설원. 그곳에서 술잔을 내밀던 남자의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

동등해지고 싶었다.

만나고 싶은 이유를 꼽자면 그러했다. 그가 베푼 구원에 대가를 치르고 싶어서. 그러고 나면 그녀도 당당히 잔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둘뿐인 광야에 마주 서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베로니카는 박탈당한 자유를 되찾아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당신이….

그때 마른 가지 같은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는 바람에 생각이 끊겼다. 오그라든 오른손을 힘없이 다른 손으로 누르자 촉감과 함께 청각도 깨어났다. 복도에서 성마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이윽고 문이 철컹 열리더니 한 사람이 누운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베로니카는 놀라지도 않았다. 이제 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았다.

또다시, 그리고 어김없이 오스카 베르크다.

평소와 다른 점은 복장이었다. 강철 판금 갑옷 대신 복도를 지키는 병사들처럼 미늘로 된 갑옷을 착용한 오스카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미를 감지한 베로니카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리온은요?”

“베르크 경은 오지 않을 겁니다. 일어나십시오.”

말하면서 오스카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사실상 들어서 세운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곧장 한 손에 가지고 있던 검은색 수도복을 내밀었다. 상하의가 통짜로 연결된 검은 원피스와 머리카락까지 가릴 수 있는 베일이었다.

“눈 색이 튀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다니십시오. 그리고 혹시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제가 대신 대답할 테니 입을 열지 마십시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비텔스바흐 경, 아니, 부단장님이 당신의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집행인이 들어올 겁니다.”

사형 언도.

싸늘한 죽음의 손가락이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베로니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뒤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게서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을 빠르게 짚어 냈다.

“왜 나를 도와요?”

베일을 덮어쓴 베로니카는 현기증과 토기를 무릅쓰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려 애썼다.

“아까 낮에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당신은 명령이 무엇보다 중요한 기사처럼 보였는데요.”

“아직도 그렇습니다. 전 단지 메클렌부르크 단장님의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떠나기 전에 동화자의 목숨만은 반드시 붙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단장이란 사람은 죽었다. 게다가 이런 일에 교황의 허락이 없었을 리 없다. 잘은 몰라도 들키면 그 또한 입장이 난처해지는 정도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강력한 신념에 불과할까. 아니면 한 인간의 주체적인 행동인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고마워요.”

베로니카는 분명하게 말했다. 투구 때문에 얼굴이 가려진 남자가 멈칫하더니 문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런 얘긴 나가서….”

말이 끝맺어지지 못한 건 열린 문 앞에 서 있던 손님 탓이었다. 무슨 일인가 시선을 돌렸던 베로니카는 귀신처럼 문간에 바짝 붙어 선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간 체구가 큰 리온에게 익숙해져 있어서 웬만한 기사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는데. 배가 술통처럼 튀어나오고 얼굴의 살이 늘어진 육중한 남자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집행관님이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오스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투구를 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목소리는 태연을 가장했어도 아마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을 게 뻔했다.

“부단장님, 집행령이, 떨어졌다. 두 번째, 끝방으로, 이교도를, 운반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어눌했지만 지금까지 들어 본 목소리 중 가장 굵었다. 동화책을 읽을 때 인간보다는 괴물의 목소리로 쓰일 법한 저음이었다. 고개를 숙인 베로니카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도끼를 보았다. 자루는 지팡이처럼 길었고 도끼날은 베로니카의 얼굴을 두 개 합친 것보다도 컸다.

그러나 그녀를 진정 긴장하게 한 것은 ‘두 번째 끝방’이라는 표현이었다.

검은 복도의 제일 끝방은 베로니카가 처음 왔을 때 묵던 곳이다. 그럼 그 옆의 방이란.

쿵. 쿵. 심장이 벽을 내리치는 도끼처럼 뛰어댔다. 간헐적으로 울리던 쿵쿵대는 소리. 그 정체를 생각하자 팔다리에 차가운 소름이 돋아났다.

“아, 여기 있던 동화자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아마 다른 곳으로 옮긴 듯합니다. 저희도 평소처럼 여자를 치료하러 왔다가 빈방을 막 확인한 참입니다.”

오스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설명하고는 베로니카를 제 뒤로 당김으로써 내부를 보여 주었다.

집행관이 머리를 수그려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텅 빈 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부단장님께 이와 관련해 혹 아시는 게 있는지 여쭈러 가 보겠습니다.”

“잠깐.”

집행관이 방을 보던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자, 목살에 주름이 잡히며 훅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것이 풍겼다. 베로니카는 숨을 참았다. 안 그래도 메스꺼운 속이 뒤틀렸다.

“소속.”

“보급감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베로니카는 놓아 버릴 것 같은 정신을 붙드느라 오그라든 주먹이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는데도 내버려 두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보급감, 아니다.”

그때 집행관이 거구를 수그리더니 킁킁 소리가 나도록 냄새를 맡아댔다. 그러고는 거대한 손가락으로 베로니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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